Skip to content

조회 수 8819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움베르토
에코의 평론: 감정과 이성

글쓴이: 한누리빛 (taegie)

※ prologue: 앞으로 사흘 동안 움베르토 에코의 글을 번역해서 실으려고 합니다. 그는 서로 다른 뿌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 우리들에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특히 다른 문명과 종교를 인정하지 못하고 자기만의 관점에 사로잡혀서 서로를 파괴하고 있는 오늘의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 그의 글은 우리들에게 '나'를 되돌아봄과 동시에 '상대'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훈련을 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에코의 글이 다소 난해해서 우리 말로 옮기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부드럽지 못한 번역글에 양해를 바랍니다.

움베르토 에코(69)는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지식인에 속한다. 그는 "Baudolino"라는 악당 소설로 철학자들과 저술가들의 호평을 받았으며 출간 당시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성과를 얻었다.

출처: 슈피겔 online
http://www.spiegel.de/kultur/literatur/0,1518,163907,00.html (유료 기사:기사당 0,40 Euro)


------------------

움베르토 에코의 평론
감정과 이성


이탈리아 저술가 움베르토 에코가 테러리스트들이 위협하고 있는 이 시기에 가져야 할 '이성'에 대해 이야기하다.

오랜 세월동안 계속되면서 세상을 피로 물들이는 모든 종교 전쟁들은 '우리'와 '남들,' '선'과 '악,' '흰색'과 '검은색'과 같이 상대방을 모두 하나로 몰아 단순화시키고 상대에 대해 난폭한 감정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일어난다. 만약 서양의 문화가 가치있고 유익한 것이라고 증명되었다면, 모든 일에 연구와 비판 정신을 가지고 대처했을 것이고 그 결과로 우리는 '단순성'이라는 유해한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을 것이다.

물론 서양 문화는 그 유익성을 항상 증명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그 서양 문화의 역사 속에는 유대인들의 책을 불사르고, 그들의 예술을 "퇴폐예술"이라고 저주하고, 그들을 "저급한 인종"이라고 하면서 쓸어버린 히틀러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문화의 가장 훌륭한 측면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피부색이 다른 모든 젊은이들과 더불어 토론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 다음 세대로 살아가고 있는 이 젊은이들의 시대에도 새로 지은 빌딩들이 무너지고 있는 현상을 우리들이 막기를 원한다면 말이다.

우리를 자주 혼란에 빠뜨리는 것은 다양한 요소들이 우리 속에 모두 함께 내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즉 자신과 자신의 뿌리를 동일화시키는 것이라든지, 서로 다른 뿌리를 가진 자들을 인식하는 문제라든지, 무엇이 선하고 악한 것인지에 대해 판단하는 것 등과 같은 것이 우리 속에 함께 들어 있다는 것이다.

특히 뿌리 문제에 대해서는 매우 많이 혼란스럽다. 만약 누가 나에게 나의 남은 생애 동안 살아갈 곳으로 몽페라토(이탈리아 중부에 있는 피몽트 구릉지대)의 작은 마을이 더 좋은지, 아펜니노 국립공원의 웅장한 산 속이 더 좋은지, 아니면 평화로운 시에나 언덕이 더 좋은지를 묻는다면, 난 몽페라토를 결정할 것이다. 그러나 이 결정이 내가 이탈리아의 다른 지역의 경치를 피몽트와 비교해서 저급하게 평가하는 것을 뜻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여기에서 뿌리란 자신이 자라온 '고향'을 가리키며, 몽페라토는 에코의 고향이다: 역자 주]

누구든지 자신을 자신이 자라온 문화와 동일화시키기 마련이다. 자기의 뿌리를 부정하고 뿌리를 옮기는 경우는 극소수이다.

만약 우리나라[이탈리아: 역자주] 대통령이 자신은 카불에 사는 것보다 밀라노 근방에 사는 것이 더 좋다고, 또 바그다드에 있는 병원에서 치료받는 것보다 밀라노에 있는 병원에서 치료받는 것이 더 좋다고 발표하려고 했다면(이것은 서양 사람의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지 아랍민족의 편에서 평가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기꺼이 그의 의견에 동조할 것이다. 그리고 심지어 이런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누가 나에게 세상에서 최고로 시설 좋은 병원이 바그다드에 있다고 말할지라도, 나는 밀라노에 있는 병원이 더 편하다고, 또 편하기 때문에 더 빨리 치료된다고 말할 것이다. 또한 뿌리는 종교적 또는 민족적인 뿌리까지도 넘어선다. 예를 들자면 난 모스코바보다도 리모게스에 더 살고 싶다고 하는 그런 것이다. 왜 그런가? 그렇다면 모스코바가 훌륭한 도시가 아니란 말인가? 그 이유는 당연히 리모게스에서는 내가 말이 통하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자신을 자신이 자라온 문화와 동일화시키기 마련이다. 그리고 뿌리를 옮기는 경우는, 설령 있다 해도, 극소수이다.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분명히 아랍 사람처럼 차려 입었지만 마지막 장면에서는 결국 집으로 다시 되돌아왔다.

우리는 바로 이 점을 간과했기 때문에 지금 문명이 서로 대치되어 있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서방 문명은 단지 경제적으로 발전했다는 이유 때문에 다른 문명들에 대해 꼬치 꼬치 참견하고 있다. 흔히 그들은 다른 문명들을 천하게 보고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그리스인들은 그리스어를 구사하지 못한 자들을 보고 '말더듬이'라는 뜻의 '미개인'(Barbaren)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들을 마치 전혀 말을 하지 못하는 자들처럼 대했다.

그러나 스토아 학파(아마도 그들 가운데 일부는 음성학을 최초로 연구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처럼 보다 성숙한 그리스인들은 '미개인'이란, 그리스어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 사상을 갖고 있지 못한 자들이라고 서둘러 지적했다. 마르코 폴로는 중국인의 생활양식과 복장에 대해서 경외심을 가지고 묘사하려고 노력했고, 중세 기독교 신학의 대교부들은 아랍의 철학, 의학, 첨성학 서적들을 번역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심지어 르네상스 시기의 사람들은 바빌로니아로부터 이집트까지 이르는 잃어버린 고대 동방의 학문을 탐색하고 추구하는데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또 몽테스키외는 페르시아인이 프랑스어를 얼마나 잘 이해하는지 설명하려고 했으며 현대 인류학자들은 그들의 첫번째 연구 과제의 대상으로 Salesianer[성 프란체스코 공동체의 회원: 역자 주]를 선택했고, 더 나아가서 그들이 어떻게 사고하고 생활했는가를 아는 것으로만 그치지 않고 가능한한 완전히 그들처럼 변화하기 위해서 Bororo[성 프란시스 수도원이 있는 곳: 역자 주]까지 가서 살았다.

위에서 난 인류학자들을 언급했는데, 문화인류학이 19세기 중반부터 등장해서 발전했다는 사실을 기억해볼 때, 서양 문명이 가지는 양심의 가책은 다른 문명의 입장에서 볼 때 너무나 미흡하다는 사실 밖에는 새롭게 이야기할 것이 없다. 특히 다른 문명의 입장에서 볼 때 그들에게 있어서 진짜 '미개인'은 역사가 짧은 사회와 원시적인 민족들이다.

서양 문화는 그들이 가진 모순되는 조건들을 숨김없이 터놓고 토론하는 능력을 발전시켰다

서양인들은 미개인들을 대하는 데 있어서 별로 지혜롭지 못했다. 서양인들은 미개인들을 "발견하고는", 그들의 생활 습관을 바꾸려고 노력했고, 아랍인들의 도움으로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노예로 활용했다. 여기서 아랍인들의 도움이 무엇인지를 설명하자면, 뉴올리언스에서 프랑스 출신의 잘 교육받은 귀족들로부터 부림을 받아 소모된 노예들을 아프리카 해안에서 배에 태운 사람들이 바로 이슬람 상인들이다. 문화인류학의 과제는 서양적인 논리와는 다르지만 경멸하거나 억압하지 않고 진지하게 수용해야 하는 다른 논리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데 있다.

이것은 인류학자가 일단 다른 논리가 있음을 밝히고 나서는 그 논리대로 살아가기로 결정하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소수의 예외들을 간과해 지나치지 않고, 오랜 기간동안 데번[잉글랜드 남서부 지방: 역자 주]이나 피카르디 등 해외 여러 곳으로 다니면서 어디가 근심 없는 노년을 향유하기에 좋은 곳인지 직접 필드 워크를 마친 후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우리가 인류학자들이 쓴 책을 읽는다면 문화인류학이 상대주의적인 입장을 받아들이고 있으며 하나의 문화는 여타 다른 문화와 마찬가지로 좋은 것이라는 사실을 주장하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될 것이다. 나는 이 결론이 썩 좋아보이지는 않는다. 인류학자들은 우리에게 기껏해야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생활방식을 존중해야 한다"고 말할 따름이다.

우리가 문화인류학으로부터 배워야 하는 진짜 교훈은 오히려 다음과 같은 것이다. 즉 우리가 "어떤 한 문화는 다른 문화보다 우월하다"라고 말하고 싶다면, 우리는 그렇게 말하기 위한 판단 기준에 대해 동의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첫 번째 요소는 '어떤 한 문화란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한 요소는 우리가 '어떤 판단 기준에 근거를 두고 문화를 판단하는가' 하는 것이다. 우선 우리는 어떤 한 문화란 무엇인지를 객관적인 방법으로 서술할 수 있다. '이 사람은 홀로 전체 자연을 가득 채우는 어떤 영적인 존재나 자신만의 신(神)을 믿으면서 산다,' '저 사람은 한 집에 사는 가족 구성원 속에서 이런 저런 규칙들에 따라 살아간다,' '저 사람은 코에 구멍을 뚫어 반지를 다는 행위를 아름답게 여긴다(이것은 서방의 젊은이들의 문화라고 묘사할 수 있다),' '저 사람은 돼지고기를 부정하게 여긴다,' '저 사람은 명절이 되면 개를 끌고가서 솥 안에 집어넣기 위해 토막낸다,' 또는 미국 사람들이 프랑스인에 대해 하는 것처럼 '저 사람은 개구리를 먹는다'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한 가지 요소는 판단 기준이다. 이 판단 기준은 우리가 자라온 뿌리에 의해서 결정되는데, 그 뿌리라는 것은 우리가 선호하는 것들, 우리의 관습들, 우리가 특별히 애착을 느끼는 것들, 우리의 가치 체계 등을 말한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여러분은 인간의 수명에 있어서 평균적으로 40살을 사는 것보다 80살을 사는 것이 더 가치있는 것이라고 여기는가? 나는 개인적으로 분명히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신비주의자라면 내 의견에 반대하고 80살 먹은 미식가와 23살밖에 안된 성 루이지 곤차가[St. Luigi Gonzaga. 14세기의 이탈리아 성자: 역자 주] 중에서 후자가 더 알찬 삶을 살았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단순히 더 오래 사는 것에 가치를 두기 마련이다. 만약 우리의 가치 기준이 그러하다면, 서양의 의학과 과학은 여타 다른 많은 지식 형태들과 의료 행위들보다 더 우수하게 되는 것이다.

여러분은 기술이 발전하고 무역 시장이 확대되고 수송 속도가 빨라지는 것이 가치있는 것이라고 믿는가? 그렇다.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에 동의하고 있으며, 우리의 기술 문명이 우수하다는 사실을 마치 '법'처럼 여기고 있다.

그러나 서방 세계 안에는 파괴되지 않은 자연과 조화롭게 살아가는 것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비행기 여행 대신에 기구(氣球)에 매달 바구니를 짜고, 자동차를 타는 대신에 걸어서 마을을 오고 가고, 오존층에 구멍을 내지 않기 위해서 냉장고를 사용하지 않는 쪽도 동시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떤 한 문화가 다른 문화보다 우월하다고 정의하고 싶다면, (인류학자들이 그러는 것처럼) 단지 문화를 서술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이것만은 필수불가결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가치 체계에 대해서만 이야기해야 한다는 점에 눈을 돌리기 바란다. 오로지 이 점에서 우리는 "우리의 문화가 '우리에게는' 더 낫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 기독교 근본주의를 공부하도록 요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것을 더 잘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대화를 정말 잘 하는 사람은 우리들에게 이슬람 세계 앞에서 존경을 표하라고 요구하고, 아비첸나(그는 현재의 아프가니스탄에서 가까운 부차라에서 태어났다)와 아베뢰스와 같은 사람들이 있었음을 기억한다. 그런데 사실 가장 뛰어났던 사람으로 항상 이 두 사람만을 언급하는 것은 하나의 죄악이다. 서양에서 알킨두스나 아벰파체나 아빈체브론이나 이븐 투파일, 또는 14세기의 대역사가 중에서 서양에서 사회학의 실제 창시자로 간주하는 이븐 찰둔이라는 사람을 비교 연구한 예는 아직 한번도 없다. 그러나 기독교 세계에서는 아직 손도 대어보지 않았던 그 시절에, 아랍인들은 이미 스페인에서 지리학, 천문학, 수학, 의학을 연구했던 사실을 우리는 기억한다.

위와 같은 사실은 모두 옳은 이야기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에 관해서 토론하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소위 훌륭한 토스카나 공동체가 위치한 빈치(Vinci)가 뉴욕보다 더 우월한 이유를 설명하면서, 빈치에서 레오나르도가 태어났던 시대에 뉴욕의 맨하탄에서는 네 명의 인디언이 땅에 앉아서 폴란드인들이 그 땅에 들어와 60 굴덴[옛날 유럽에서 통용되던 화폐단위: 역자 주]에 맨하탄 반도를 매입하기를 150년 이상 기다리고 있던 바로 그 시대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방식으로 위와 같은 논리에 대해 불만을 털어놓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논박은 온당하지 않다. (누구에게든지 감정을 상하게 하고 싶지는 않지만) 세계의 중심은 오늘의 뉴욕이지 빈치와 같은 곳이 아니다.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이다.

아랍의 빈민 집단이 우리에게 침공당하는 동안에 스페인 출신의 아랍인들이 기독교인과 유대교인들에 대해서 매우 관대했던 사실을 떠올리려고 한다면 그것은 쓸데 없는 짓이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나서 무슬림과 적이 되었을 때 살라딘[제3차 십자군원정 때 기독교인들과 싸웠던 무슬림의 군주: 역자 주]이 예루살렘 재탈환 이후에 기독교인들에 대해서 매우 너그럽게 대처했던 사실을 기억해내고자 한다면 그것 또한 의미없는 짓이다. 오늘 아랍 세계에는 기독교인들에게 관대하지 못한 근본주의적, 신본주의적인 정부가 있다는 점이 사실의 전부다. 또한 오사마 빈 라덴이 뉴욕과는 우호적인 사이가 아니라는 점이 사실의 전부다. 반면에 프랑스인들이 바돌로매 축제일때 대학살[구교도들이 2000명이 넘는 신교도들을 학살한 사건: 역자 주]을 자행했지만 오늘날 그들을 일컬어 야만인이라고 규정하는데 찬성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애써 지난 역사를 인용하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지난 역사는 양날 선 검(劍)의 역사였기 때문이다. 회교인들은 창으로 사람들을 찔렀다.(이것은 악한 것이다) 그러나 비잔틴 정교회는 위험한 친척인 회교도의 눈을 뽑았고, 카톨릭은 지오르다노 브루노[르네상스 시절의 이탈리아 철학자로서 내세만 바라보는 기독교의 금욕적 도덕은 위선이며 기독교는 현세 사회에 이바지해야 한다고 외쳤다: 역자 주]를 불태워 죽였다. 영국 국왕의 특허권을 가진 해적선이 카리브해에 있는 스페인 식민지를 불태우는 동안에, 회교도 해적들은 그들이 죽인 희생자들을 날로도 먹고 구워서도 먹었다. 빈 라덴과 사담 후세인은 둘다 서방 문명에 대한 열렬한 대적이다. - 그러나 우리는 이런 서방 문명 속에서 소위 히틀러나 스탈린과 같은 작자들과 함께 행동했다. (스탈린의 경우 그가 매우 악했기 때문에, 그가 학교에서 막스를 공부하고 막스책을 읽을 때에도 그는 동양인으로 취급되었다)

이것은 아니다. 가치 기준의 문제는 지나간 역사 속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다. 가치 기준의 문제는 바로 동시대의 카테고리 속에 놓여 있는 것이다. 오늘날 서방 문화가 가진 훌륭한 측면들(이를테면 자유롭고 다원적인 면, 이것은 우리가 반드시 지녀야 할 가치있는 것이다) 가운데 하나는, 다양하고도 상반되는 가치 기준들을 가진 여러 문제들을 다룰 때 다른 기준을 가진 사람들이 서서히 설득당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우리는 사람이 오래 사는 것은 좋은 것으로, 환경을 오염시키는 것은 나쁜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우리가 인간의 수명 연장에 관해 연구된 엄청난 실험들을 계속 해나가기 위해서 왕성하게 정보를 주고 받으면서 그 실험을 지원하는 시스템을 필요로 하다보면, 자신들의 편에서 비록 환경 오염을 유발시키는 시스템이라 할지라도 그 연구를 지원하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느끼게 된다.

서양 문화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순되는 상황을 솔직하게 공개적으로 털어놓는 능력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알고 있었고 그렇게 이야기했던 서양 문화는 바로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것 같다. 최근에 일어나는 모든 논란들은 '전체의 예'와 '전체의 아니오'의 문제들로부터 일어난다. 부패한 일반화가 초래하고 있는 위험과 부정을 피하는 긍정적인 일반화의 범위가 어느 정도까지 용납되는가? 에이즈로 죽어가는(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이지만) 수백만명의 아프리카인들의 생명 또한 우리가 어떻게 연장시킬 수 있는가? 그것도 에이즈에 걸린 환자들이 기아로 죽어가는데도, 오염된 음식을 삼키고 있는데도, 그것을 그대로 보고만 있는 지구촌의 시장 경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그들을 어떻게 살릴 수 있는가?

이상과 같이 서양을 추종하고 서양 문화를 조장하는 판단 기준에 대한 신랄한 비판은, 판단 기준에 대한 질문이 얼마나 대답하기 힘든 미묘한 문제인가를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한다. 은행이 고객의 비밀을 보호하는 것이 옳은 것이며 문명화된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확실하게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렇지만 만약 테러리스트들이 런던 시로부터 빼돌린 돈을 자신의 구좌에 맡기려고 할 때도 그 테러리스트들의 비밀을 보장해줄 것인가? 소위 프라이버시를 지키는 것이 긍정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 아니면 애매모호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의' 판단 기준에 대해서 토론하고 있다. 서방 세계는 지금까지 기술 발전의 판단 기준을 긍정적으로 수용하지 않고 불교인이 된 사람들이나, 단 한번도 바퀴를 사용하지 않고 말을 타고 다니는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처럼 특이한 시민들을 '인정해주는' 차원 안에서만 토론을 해왔다. 그러나 학교는 우리의 감정에만 치우친 주장들에 근거를 둔 판단 기준들에 대해서 분석하고 토론하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문화인류학이 풀지 못한 질문들이 바로 여기에 있다. "개개의 문화가 가진 특질들을 심지어 존중하라고까지 배웠던 바로 그 일개 문화의 일원이 우리에게 이끌려 우리와 함께 살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실제로 대부분의 서양에서 인종차별적인 반응이 나오는 원인은 애니미즘 신봉자들이 말리 공화국에서 살고있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애니미스트들이 우리들 가운데 정착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자! 한번 생각해 보자! 만약 그들이 우리와 함께 살면서 차도르[이슬람 여성이 입는 옷으로 얼굴과 손을 제외하고는 몸을 모두 가리는 옷: 역자 주]를 뒤집어 쓰고 다닐 경우, 또 그들의 딸들을 수술시키려 하는 경우(신혼 첫날밤까지 질입구를 봉합하는 수술), 또 (서방의 특정 종파들에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병에 걸린 자식들을 위해서라 할지라도 수혈을 거부하는 경우, 그리고 마지막 남은 식인종을 뉴기니아에서 데리고 나와서(아직 그런 경우는 없지만) 우리들이 사는 곳으로 이민시켰는데 그 식인종이 최소한 매주 일요일마다 아동 한 명씩을 구워 먹으려 할 경우는 우리가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식인종의 경우 우리는 모두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 식인종을 감옥에 가두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차도르를 덮어쓰고 학교에 가는 소녀의 경우는 어떤가? 나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만약 그들이 차도르 쓰기를 좋아한다면, 우리는 왜 그것으로 마치 세상이 끝날 것처럼 난리를 쳐야 하는가? 질 봉합수술에 대해서는 논쟁이 일어난다. (매우 관대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조차도 이것은 지역 병원에서 시술해야 하는 것으로 여긴다. 왜냐하면 그래야 위생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를 들어 무슬림 여인들이 여권 사진을 찍을 때 베일을 쓴 채로 찍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규칙을 가지고 있다. 그 규칙은 누구에게나 적용되고 시민임을 증명하는 척도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우리가 그 규칙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고 믿는다. 만약 내가 회교 사원을 방문한다면 신발을 벗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그 나라의 규칙과 관습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따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베일을 쓰고 사진을 찍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나는 우리가 그 상황에서는 타협할 수 있다고 본다. 어떻게 사진을 찍든지간에 심사 조건에 부합되기만 하면 최종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니까. 어쩌면 가까운 미래에는 여권 속에 지문을 찍게 될지도 모른다. 만약 무슬림 여인들이 자신들의 복장 규정을 따라 살고 있다면, 그러나 그들이 우리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여태 가지게 될 것이라고 생각지도 않았던 권리들을 몸소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많은 서양인들이 코란 학교에 다니면서 그들의 자유로운 면들을 보고 무슬림이 되기로 결심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몇년 전에 "선언적인 인류학"[각각의 문화는 서로 공유하는 면이 없고 배타적일 뿐이라는 개념을 가진 인류학: 역자 주]을 지지하는 '트랜스쿨투라'(Transcultura)라는 이름의 국제 기구가 생겼다. 그 기구에서는 한 번도 서양에서 살지 않은 아프리카 연구원에게 프랑스 지방과 볼로냐 사회에 대해서 글을 쓸 것을 제안했다. 난 여러분들에게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다. "내게 가장 놀라웠던 두 가지 사실이 있는데, 유럽에서는 자신들의 개를 산책시킨다는 사실과 사람들이 해변에서 나체로 돌아다닌다는 사실이다"라고 쓴 그들의 글을 우리 유럽인들이 읽었다면 거기에서 양 쪽의 서로 상반된 시각이 부딪혀 작용하기 시작할 것이며, 또 거기에서 흥미로운 논쟁들이 벌어질 것이라고 말이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게 기독교 근본주의를 연구하도록 요청한다고 한번 상상해보자. 이 경우에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카톨릭 교인들은 다루지 않고 아야톨라[이슬람의 시아파 신도들이 부르는 신의 이름: 역자 주]보다 더 열광적이어서 각종 교과서에서 다윈에 관한 모든 언급들을 삭제시키려고 하는 미국의 개신교를 다룰 것이다. 내가 믿기로는, 상대의(기독교) 근본주의에 관한 인류학적 연구를 하는 바로 그 때부터 자신들(이슬람)의 성격을 보다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우리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성전(聖戰)에 관한 우리측의 개념을 파악하게 되고(나는 그들에게 흥미로운 많은 서적들과 새로운 자료들을 추천해 줄 수 있다), 그리고나면 아마도 그들은 그들 입장에서의 성전의 그림을 비평적인 시각을 가지고 보게 될 것이다. 정말 서양에 사는 우리들은 "야만인의 사고"(La pensee sauvage)에 대해 연구함으로써, 우리의 사고방식이 가진 한계들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서방 문명에서 많이 이야기해 온 가치들 가운데 하나는 차이를 수용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누구나 게이일 수 있으며 정치적으로 그들을 받아들인다'고 말하지만 집에 돌아와서는 그들에 관해서 킥킥거리고 비웃으면서 말한다는 사실에 우리 모두는 이론적으로 동감한다. 그렇다면 차이를 수용하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 국제 문화 연구소(Die Academie universelle des cultures)에서는 인터넷에 웹싸이트를 띄웠다. 연구소는 그 싸이트를 통해서 학생들에게 각각의 다른 문화들을 어떻게 수용할지에 대해서 가르치기 원하는 각 나라의 교육자들에게 인종, 종교, 전통, 관습 등과 같은 다양한 주제들에 관한 자료들을 찾을 수 있도록 제공하고 있다.

우리가 처음에는 자녀들에게 "사람들은 모두 동등하다"고 말하면서 거짓말을 꺼내놓지 않겠다고 결심하게 된다. 그러나 곧 자녀들은 스스로 이웃들이나 반 친구들이 자기 자신과 똑같지 않음을 경험하게 된다. 모두가 다른 피부색깔을 하고 있고, 아몬드 색깔의 눈동자를 가진 사람들, 머리 숱이 많거나 직모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들, 특이한 음식을 먹는 사람들, 성찬식에 가지 않는 사람들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매우 쉽게 알아차린다. 또한 자녀들에게 '동물들도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피조물'이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렇게 가르친다 할지라도 자녀들은 교실에서 그들에게 철자법을 가르치고 있는 염소[우쭐거리기 잘하는 여자를 일컫는 비속어로 여기서는 여선생님: 역자 주]를 전혀 쳐다보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녀들에게 사람들마다 기질이 매우 다르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차이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귀중한 선물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또한 그렇게 보여 주기 위해서 그 차이점이 어디에서 생기는 것인지를 꼼꼼하게 설명해 주어야 한다. 이탈리아에 살고 있는 교사라면 이탈리아 학생들에게 다른 나라의 친구들은 왜 다른 신에게 기도하는지, 또는 왜 다른 친구들은 락큰롤처럼 우리와는 다른 음악을 연주하는지 이해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당연히 중국 교사라면 교회가 있는 나라와 이웃해서 살고 있는 중국 아이들에게 그 차이점들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그리고나서 그 다음에 할 일은 다른 이들의 음악과 우리의 음악이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다른 이들이 믿는 하나님도 우리들에게 선한 일을 하도록 명령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일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이의를 제기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플로렌스(피렌체)에서 이렇게 하고 있지만 카불에서도 그들은 그렇게 하느냐? 그들은 안 하는데 왜 우리만 해야 하느냐? 자! 이러한 이의 제기는 서방 문명의 가치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유추된 질문일 뿐이다. 우리는 우리 사회를 다원적인 공동체로 이해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무슬림들이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것을 허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단지 그들이 카불에서 기독교를 전도하는 자들을 위험에 몰아넣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도 똑같이 그들을 배타적으로 대하면서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정말 우리 사회를 다원적인 공동체로 이해하고 또 그렇게 실천해왔다면 우리는 또한 탈리반에게도 그렇게 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무슬림들과 함께 사는 것을 허용하듯이, 어느 날 무슬림이 사는 곳에 기독교 교회가 서거나 무슬림들이 불상을 그들 손으로 폭파시키지 않게 되기를 희망한다.

오늘날 보통에서는 벗어난 특이한 많은 것들이 양지로 나오고 있다. 그리고 왼쪽에는 통상적으로 그렇듯이 친이슬람권이 있는 반면에, 오른쪽에서 가지고 있는 고유한 정세(情勢)는 서양의 가치들을 방어하는 태도인 것 같다.

그리고 심지어 모든 면에 있어서 지식의 가치와 기술적인 진보와 서양의 현대 문명을 항상 방어하려고만 하던 태도가 세속화된 얼굴과 진취적인 날개로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기술과 과학의 진보 이데올로기를 모든 공산주의 정부들도 채택하게 되었다. 사실 1848년의 공산주의의 출현은 부르죠아 계층이 확대되고 있다는 신랄한 비판과 함께 시작되었다. 막스는 우리가 바퀴를 새롭게 발견하고 아시아의 생산방식으로 전향해야 한다는 식으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부르죠아 계층이 가진 독특한 가치들과 그들이 이룬 성취물들을 프롤레타리아 계층이 가져다가 사용하자고 이야기했던 것이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최소한 처음에는 프랑스 혁명을 거부하면서 시작되었지만 이제는 거꾸로 '우리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가치들에게로 돌아가야 한다'고 외치면서 진보라고 하는 세속적인 이데올로기에 대해 항상 저항하는 반작용적인 사상이 되어버렸다. 전통을 이야기하는 사상가 밑에서 그 사상에 심취한 사람들은 조상의 관례와 신화나 불교의 가르침 외에 이슬람교를 항상 그들이 선택한 영성의 원리적인 원칙으로 삼았다. 그들은, 우리가 비록 진보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무미건조해져 버렸다 할지라도, 우리가 그들보다 우월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과 우리가 수피교[이슬람의 신비주의 종교: 역자 주]나 춤추는 데르비스[이슬람교의 고행파 탁발 수도승]에서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항상 우리에게 일깨워 준 사람들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오늘 이 시기는 이상한 틈이 하나 벌어져 있다. 그러나 이 틈은 아마도 우리가 서 있는 편에서 한 때 저지른 큰 과오(그리고 확실히 우리는 그 과오 속에서 살아간다)를 아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표시일 뿐일 것이다.

바로 이런 시점에서 우리는 그들만이 따르고 있는 미신, 다른 사람들과 과감히 맞서는 그 미신을 이해해야 한다. 바로 분석과 비평이라는 무기를 가지고서 말이다. 나는 이 주제가 단지 기자회견에서뿐만 아니라 학교에서도 다루어지게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출처 - http://www.spiegel.de/kultur/literatur/0,1518,163907-2,00.html
(참고: 원문을 보시려면 0,40 Euro를 내야 합니다. 유료 기사거든요)

* epilogue: 에코의 이 글은 아프간 전쟁이 진행되고 있을 무렵 이성을 잃어버리고 자기와 정체성이 다른 아랍 세계를 무력으로 잠재우려고 했던 비문명국 미국을 비판하며 쓴 글입니다. 그의 비판은 지금 이라크를 침략한 미국뿐만 아니라 여기 우리들에게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숙고해 보아야 할 좋은 글인 것 같아 옮깁니다.
?

Title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글쓰기 및 편집 방법 2 file 다중이 2016.06.12 48249
321 외숙모가 가시며 인사를 전해 달라고 하셨어요. 구정희 2007.02.14 8822
320 죽고 싶은 분에게 운영자 2003.07.15 8823
319 섬길 교회를 찾고 있습니다. 김숙희 2006.11.26 8830
318 요가, 명상 교실;7월29일 11시 30분 구정희 2007.07.24 8830
317 On earth, as it is in heaven 3 먼동 2010.10.02 8830
316 “저 강금실인데요…” `응 뭔데?` ---nate 뉴스 운영자 2003.03.06 8833
315 새삼스럽던 록키의 아름다움 1 엘보우리버 2009.06.28 8835
314 생활의 지혜 운영자 2003.12.08 8841
313 잊혀진계절~ Jasper~ 2003.11.01 8843
312 지난 여름 카나나스키스 하이킹 후 2 운영자 2009.01.12 8847
311 [대북송금] 노벨상을 돈주고 샀다구?? -딴지일보 운영자 2003.03.02 8849
310 퍼스트 스텝스 소개 동영상- 수잔리치 인터뷰 ch 2010.09.13 8850
309 한국영화 방가방가를 보고... 4 뚜버기 2010.12.11 8850
308 문 목사 방북 20돌을 회고하며 / 정경모 1 Quote 2009.04.02 8866
307 예수와 노무현의 공통점 8가지 - 오마이 운영자 2004.03.18 8868
306 정신대 할머니의 슬픔 운영자 2005.08.21 8879
305 형제자매분들께 질문있습니다. 이승운 2003.05.18 8881
304 한국영화제 밀양 2009.04.17 8882
303 영혼의 햇빛 플로렌스 2012.10.21 8882
302 노무현 대통령과 검사군단 토론 후일담 운영자 2003.03.09 8892
301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성인 운영자 2005.09.13 8895
300 <동이>가 <대장금>을 못 넘는 진짜 이유는… 1 마틴 2010.05.22 8899
299 벼랑 끝으로 내몰린 서민들이 크게 늘어나 Soonchang 2009.02.18 8910
298 미국관련 비자, 유학과 입국정보입니다 동명에이젼시 2003.10.26 8921
297 메일 열기만 해도 감염..웜 급속확산(상보) 운영자 2004.03.18 8922
296 Thank you for your time & effort!! 1 가현 2011.12.03 8930
295 인터넷언어 갈수록 암호화 운영자 2005.09.30 8934
294 인터넷정치방송|인터넷 동영상 운영자 2008.06.02 8935
293 전우여, 그 한국인 위안부에 고통준 것 대신 사과해주게` 운영자 2005.08.12 8936
292 내가 거듭나고 보니 김기태님글 2006.08.09 8942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5 6 7 8 9 10 11 12 13 14 ... 20 Next
/ 20

Powered by Xpress Engine / Designed by Sketchbook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