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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에 거하라

(요한복음 15:4, 10, 12, 15) 안에 머물러 있어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 안에 머물러 있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없는 것과 같이, 너희도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면 열매를 맺을 없다.

너희가 계명을 지키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서,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같다.

계명은 이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종은 그의 주인이 무엇을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들은 모든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1. 나는 혼자인가?

기원전 5세기경 아테네의 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는 인간의 기원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원래 인간은 남녀의 구분이 없는 자웅동체여서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얼굴도 앞뒤로 두 개, 팔이 네 개, 다리도 네 개나 있었습니다. 이 시절 인간은 워낙 힘이 좋고 지혜로워서 신들도 두려워했습니다. 하루는 제우스가 신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인간들을 어떻게 할 것인지 고심하다가 몸을 반으로 나누어서 남자와 여자가 되게 했습니다. 그렇게 반쪽으로 분리된 인간은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고 언제나 자신의 반쪽을 그리워하는 나약한 존재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반쪽짜리 인간은 언제나 외롭고 불안한 것입니다.

일부 심리학계에서는 분리불안을 인간의 근본적인 심리문제라고 보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태아 때는 엄마와 일체감을 느끼며 지냈습니다. 따뜻한 양수에서 노닐며 탯줄로 공급되는 양분을 먹고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차디찬 세상밖으로 나옵니다. 탯줄이 끊겨버립니다. 모든 사람이 겪는 이 경험이 인간이 가지는 분리 불안의 근원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선악과를 먹은 후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이 어떻게 분리불안을 겪게 되는지 잘 나타납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단절이 생깁니다. 또한 자연과 인간 사이에도 단절이 생깁니다. 죄가 있기전에는 하나님께서 인간이 살던 에덴동산을 자유롭게 다니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자연과 소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오면서 모든 것이 단절되고 죽음이 들어옵니다. 죽음이 무엇일까요? 육체적인, 생리학적인 죽음보다 더욱 근원적인 죽음의 의미는 단절과 소외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제가 예전에 외로움, 고독, 불안은 현대의 산물이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개인과 주체가 등장하면서 이런 개념들이 현대사회와 인간의 주요 문제로 등장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특히 신, 전통, 국가에 우선해서 개인이 등장합니다. 이런 개인을 등장시키는 데 앞장섰던 사람들이 실존주의자들입니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말을 했습니다. 본질 즉 내가 존재해야 하는(사회적, 종교적, 전통적) 이유보다 나의 실제 존재가 먼저 있다는 말입니다. 제가 학교 다닐때 국민교육헌장이라는 것을 외웠던 기억이 납니다. 첫문장이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입니다. 사르트르가 이 문장을 본다면 개소리라고 할 것입니다. 역사적 사명은 만들어지는 것이지 본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연히 태어나 여기 이 자리에 서 있는 ‘나’ 즉 실존이 더 근본적이고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인간을 내던져진 존재라고 말합니다. 본질은 없고 실존만 있다면 좋게 말해서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허무한 존재가 됩니다. 그래서 던져진 존재에서 스스로를 던지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스스로 자신의 본질을 규정하고 자유롭게 살 수 있어야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자유의 결정으로 인한 책임도 스스로 져야하죠.

그렇다면 앞에서 말한 외로움, 고독, 불안을 인간의 근원적 문제로 보는 심리학파들이나 성경해석은 잘못된 것일까요? 이런 것들은 근대에 들어와 개인이 등장하면서 생긴 것들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도 아리스토파네스도 근대의 인물들이 아닙니다. 이들은 인간에게 자의식이 있을 때부터 외로움, 고독, 불안이 근본적인 인간의 문제라고 보았습니다. 다만 근대에 개인이 출현하면서 이런 불안들이 더욱 도드라지고 의식될 뿐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개인보다 공동체가 강하던 시절에도 불안이 있다고 말합니다. 다만 의식하지 않은 채로 있을 뿐이라는 것이죠.

아무튼 한마디로 말하면 인간은 외로운 존재, 고독한 존재, 불안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1. 믿고 의지하는 것에 의해 내가 규정된다.

코로나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사람들과의 만남이 적어졌습니다. 어디를 가더라도 사람들 사이에는 적절히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상점은 아크릴 판으로 고객과 점원의 접촉을 막고 있습니다. 그리고 점원은 대부분 마스크를 쓰고 있습니다. 가족이 없는 사람들은 더욱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병원 가기가 어려워지다보니 혼자 계시는 노인분들은 상황이 더욱 어렵습니다. 고독하고 불안한 존재가 더욱 고독하고 불안하게 만드는 상황속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무신론적 실존주의자들은 사람들에게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하지만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그리고 엄격히 말하면 실존주의자들도 모든 권위에서 해방이 아니라 존재근거와 권위를 ‘자기(Self)’에게 것이라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실존주의자는 자유로운 영혼이 아니라 신이나 국가나 특정 권위를 의존하는 대신 ‘자기’의존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그만큼 의존하고 믿을 수 있는 존재일까요? 시지프스처럼 의미도 없이 무거운 돌을 산 정상까지 힘겹게 밀어 올렸다가 바닥으로 굴러떨어지면 다시 정상으로 밀어올리는 일을 반복하는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저는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니체는 초인을 말하고 실존주의자들은 자유로운 주체를 노래하지만 결국 모임이나 자유로운 주체가 되기에는 나약한 인간의 애처로운 모습을 발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철저히 긍정으로 시작하고 있지만 비관적인 허무주의로 끝나고 맙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믿고 의지할 것을 찾습니다. 자본주의 시대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오늘날엔 돈을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대상으로 삼는 사람들이 가장 많은 것 같습니다. 이제 돈으로 못사는 것이 없는 세상이 되다보니 맘몬이 가장 위대한 신으로 등극한 것 같아보입니다. 하나님과 맘몬,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말하며 오직 하나님만 섬기겠노라 고백하는 교회들도 실상을 들여다보면 많은 교회들이 맘몬이 둔갑한 하나님을 섬기는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권력을 섬기고, 어떤 사람들은 국가를 신성시하고 섬깁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연인을, 또 어떤 사람은 특정 종교의 신을 섬깁니다. 섬기는 사람은 섬기는 것에 의해 자신의 가치관과 세계관이 바뀝니다. 섬기는 대상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살게 됩니다.

 

  1. 주님만을 섬기는 그리스도인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을 나의 주로 고백하고 섬기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섬기는 분이 같다는 것은 같은 가치체계를 가지고 같은 세계를 살아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섬김의 대상이 규정하는 가치관을 따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께서 자신 안에 거하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세계에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여러분과 저는 그 초대에 응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세계의 질서와 가치를 따르기로 고백했습니다. 세례는 이 고백의 형식적인 절차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 자신 안에 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자신 안에 있을 때만 열매를 맺을 있다고 말합니다. 열매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갈라디아서 5:22-23)

맘몬을 섬기는 사람의 계명은 “돈이 되는 일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 정도가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계명은 무엇인가요? 바로 “서로 사랑하라.” 입니다. 즉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 그리스도의 세계에 산다는 것은 사랑 안에서 사랑을 베풀며 사는 것입니다.

대부분 섬김을 받는 대상은 섬기는 자를 종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일전에 저희 할머니께서 작은 삼촌이 귀신에 들려 이웃에 있는 친구 무당을 찾아 갔다고 합니다. 무당은 가난한 할머니에게 친구로서 이렇게 조언했다고 합니다.

“내가 귀신을 내쫓을 수는 있는데 그렇게 되면 네가 정기적으로 내가 모시는 신령에게 제사를 지내야 해. 그러니 그러지말고 저기 큰 신이 있는 교회에 가서 한번 부탁해 봐.”

그 말을 듣고 교회에 가서 기도를 통해 작은 삼촌에게 들어갔던 귀신을 내쫓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 일을 계기로 할머니가 교회에 나갔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섬김을 받는 대상은 섬기는 자를 노예로 부리는 속성이 있습니다. 돈을 섬기는 사람은 돈의 노예, 권력을 섬기는 사람은 권력의 노예가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친구로 부르십니다.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으로 부르십니다. 그래서 우리만 그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 안으로도 들어오신다고 하십니다. 그것도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시고 들어오십니다.

힘과 두려움으로 우리를 굴복시키시지 않고 사랑으로 우리를 설복하십니다. 그러므로 그의 세계안에서 그의 계명을 따라 서로 사랑하는 우리들에게는 세상이 줄 수도 빼앗을 수도 없는 평안이 있습니다. 만약 아직까지 문틈에서 기웃거리시는 분이 계시다면 그 분 안으로 들어오시길 초대합니다. 고독과 불안 대신 사랑과 평안을 누리시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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