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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24 20:28

[설교요약] 흙과 형상

조회 수 599 추천 수 1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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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상과 흙 사이

(창세기 1: 27)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창세기 2: 7)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1. 자연의 경이

먼저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순수의 전조(auguries of innocence)의 첫 구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To see a World in a Grain of Sand

And a Heaven in a Wild Flower 

Hold Infinity in the palm of your hand 

And Eternity in an hour.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온 세상을 보며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
그대 손바닥 안에 무한을 쥐고
한 순간 속에 영원을 보라.

 

그 다음은 윌리엄 워즈워스의 무지개라는 시입니다.

저 하늘 무지개를 보면

내 가슴은 뛰노라

나 어린 시절에 그러했고

어른인 지금도 그러하고

늙어서도 그러하리

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죽는게 나으리!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

내 하루하루가

자연의 숭고함 속에 있기를

My heart leaps up when I behold

A rainbow in the sky:

So was it when my life began;

So is it now I am a man;

So be it when I shall grow old,

Or let me die!

The Child is father of the Man;

And I could wish my days to be

Bound each to each by natural piety.

10여년전 미국에 있을 때 서부 종단 여행을 한적 있습니다. 샌디에고에서 시작해서 LA, 샌프란시스코, 포틀랜드, 시애틀을 거쳐 밴쿠버까지 올라갔습니다. 횡단은 해본적이 없지만 종단 여행의 독특한 재미가 있습니다. 위도를 따라 올라가는 여행이라 다양한 계절과 자연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여행할 당시가 3월이었는데요. 샌디에고와 LA에는 야자나무가, 오레곤 주를 지나갈 때면 활엽수림이 펼쳐집니다. 밴쿠버를 거쳐 로키를 넘어갈 때는 눈 덥힌 침엽수림이 펼쳐집니다.

시애틀에서 캐나다 국경을 너머 밴쿠버로 들어갈 때 이미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각이었습니다. 밴쿠버에서 하루 숙박하고 켈로나로 갈까 하다가 숙박비를 아끼려고 최종 목적지인 켈로나로 향했습니다. 한 밤중에 캐나다 로키를 넘는 길이 얼마나 험난한지 모르고 한 결정이었습니다. 밴쿠버에서 켈로나를 넘어 가는데도 캐나다 로키 줄기를 가로질러 가야 하기 때문에 큰 산들을 두 번 정도 넘어야 합니다. 해발 2,500미터가 넘는 산길에는 가로등 하나 없었습니다. 3월인데도 길 양 옆으로 눈이 성인 키만큼 높이 쌓여 있습니다. 차선은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런 길을 가끔씩 산만한 트레일러가 쌩쌩 달려갑니다. 트레일러가 제 차를 스칠 때 마다 얼마나 오싹한지 모릅니다. 만약 실수로 내 차를 살짝이라도 들이 받는다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이 막 떠오릅니다.

그렇게 긴장을 하고 달려가는데 산 정상쯤 되어서 차창위로 불빛들이 어른거리는 것이 보입니다. 가로등도 없는데 무슨 불빛일까 싶어 올려다보니 형형색색의 별들이 반짝이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차를 갓길에 대고 내려서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캐나다 로키 산 정상에서 바라보았던 밤하늘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형형색색의 크고 작은 별들이 광활한 밤하늘을 가득 수놓고 있었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생각 났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올려다 보라고 한 하늘이 바로 저런 하늘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광야에서 하나님께 약속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한밤중에 불러내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보아라. 네 자손이 저렇게 많이 불어날 것이다."

그 동안 이 구절을 머리로만 이해하다가 한밤중에 캐나다 록키산에서 밤하늘을 보며 이 말씀을 실감했습니다.

 

2. 이데아와 창세기

위의 시처럼, 저의 경험처럼 압도적인 자연의 경관 앞에서 경외감을 느낀 경험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이런 감정들을 느끼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런 경험은 매우 독특한 경험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지능이 뛰어나서 그런 것일까요? 지금 우리보다 훨씬 연산속도가 빠른 인공지능 로봇이 밤하늘을 바라본다고 생각해 봅시다. 아마 이 로봇은 순식간에 그 많은 별의 개수와 종류를 파악하고 각 별들의 이름이나 특성을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각각 별들의 색깔과 온도, 거리도 측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 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느꼈던 경외감을 인공지능이 느낄 수 있을까요? 물론 더욱 먼 미래에는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가까운 미래에는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철학자 칸트는 압도적인 자연을 보며 느끼는 경외감을, 혹은 숭고함은 두려움만이 아니라 황홀함도 동시에 느끼는 감정이라고 말합니다. 다른 생물과 달리 인간이 이런 감정을 느끼는 이유는 압도적인 자연을 통해 순간이지만 무한에 대한 경험을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자연을 보며 무한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것은 사람의 내면에 무한에 대한 개념이 있기 때문이라 말합니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에 대한을 안다는 것이 가능한걸까요?

플라톤은 인간에게는 마치 불변의 진리인 ‘선의 이데아’가 분유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데아란 현상세계 너머에 있는 본질의 세계입니다. 모든 사물의 참된 형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영혼은 원래 궁극의 이데아인 선의 이데아에서 난 것이라 이데아를 잘 압니다. 그러나 육체로 태어날 때 망각의 강인 레테의 강을 건너오면서 이데아의 기억을 잊어버린 채 태어났다고 합니다. 이데아가 영어로는 바로 아이디어(idea)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고 말하는 것은 없던 무엇인가가 생각난 것이 아니라 그 동안 잊고 있었던 이데아 세계의 어떤 형상을 기억해 낸 것, 발견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한편으로 육신에 속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데아에 속해 있는 존재입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목적은 육신에서 자유로워져서 이데아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봅시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창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창세기 1장에는 인간을 만들 때 신의 형상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창세기 2장에는 흙으로 빚어서 생기를 불어넣어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영적인 존재지만 또 한편으로는 흙으로 빗어진 육적인 존재입니다. 이렇게 보면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성경의 창세기는 인간 기원에 대해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때 기독교가 로마의 지성인들에게 말씀을 전할 때 플라톤의 철학을 많이 인용했습니다. 기독교 사상의 근간을 새웠다고 할 수 있는 아우구스티누스도 플라톤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창세기의 인간관과 플라톤의 인간관에는 큰 차이점도 있습니다. 플라톤의 인간에서 이데아적인 측면은 선하고 고상하지만 육체적인 측면은 악하고 천한 것으로 봅니다. 그러다 보니 플라톤의 사상을 계승했다는 유파들 중에는 세상과 육체를 경시하는 풍조가 강합니다. 기독교에서도 영지주의자들에게서 그런 모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반면 창세기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영적인 인간과 흙에 생기를 불어 만들어진 육적인 인간 모두 신의 의지와 뜻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인간은 매우 독특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신처럼 자연을 초월한 존재도 아니면서 자연처럼 본능적인 존재만도 아닙니다. 사이에 홀로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의 존재 자체가 불안이라고 본 것입니다.

 

3. 절망

키에르케고르는 사람들이 불안을 모면하고자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을 ‘절망’이라고 보았습니다. 영적인 인간에만 치우쳐 있는 영지주의자들도 키에르케고르가 보기에는 절망상태에 있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반대로 육체적인 인간에만 치우쳐서 육체적 본능 아니면 물질적 재화를 추구하는 사람들도 절망의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어떤 절망에 빠져 사는 사람들이 많을까요? 제가 보기에는 육체적인 인간에 치우쳐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저뿐 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된 이유를 세 가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는 인공적인 환경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서른이 한참 넘고서야 밤하늘의 무수한 별과 은하수를 처음 보았습니다. 대도시에서 자라다 보니 밤이 되면 불야성을 이루는 인공조명들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창마다 환하게 빛나는 높은 빌딩들, 빈틈없이 거리를 환하게 밝히는 가로등, 살아있는 듯 현란하게 춤을 추는 광고등들 너머 하늘은 까맣기만 합니다. 대도시의 밤하늘은 죽은 하늘이나 다름없습니다.

2003년에 토론토를 비롯해 북미 북동부 지역에 정전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했지만 그때 대도심에서도 무수한 별과 은하수를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지나치게 밝은 인공조명이 자연생태계를 교란할 뿐만 아니라 사람의 건강에도 좋지 않다는 연구결과들이 최근 들어 쏟아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 콜로라도 주 포트 콜린스 시에서는 밤하늘을 어둡게 유지하기 위한 법적 조치를 마련 중이라고 합니다.

밤하늘뿐 만 아니라 불타는 석양, 커튼처럼 푸른 빛으로 일렁이는 오로라, 거대한 폭포 들 속에서도 무한에 대한 경외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일상은 이런 자연들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둘째로 모든 것의 계량화를 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수치로 말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수치로 말하면 불안하지 않습니다. 큰 태풍이 온다는 말보다 A급 태풍, 혹은 몇 헥토파스칼급 태풍이라고 말해주면 어느 정도 불안하지 않습니다. 

정이 많은 사람, 사랑이 많은 사람이란 말은 잘 와 닿지 않습니다. 나에게 1억을 준 사람, 아프리카 BJ의 입장에서 본다면 별풍선 만개를 날린 사람이라는 말이 더 와 닿습니다. 사실 시간도 엄밀히 말하면 계량이 되지 않는 것인데 우리는 인위적으로 마디를 나눠서 계량합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과 자연물을 계량하려고 합니다. 이런 계량화 욕망에는 존재를 존재로 받아들이지 않고 소유화 하려는 욕망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서구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땅에 와서 한 것이 토지를 계량한 것입니다. 일본군이 한국을 침략하고 한 것이 토지, 재산, 사람을 계량한 것입니다. 계량은 도구화를 위한 준비과정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계량을 통해 소유하고 도구로 사용합니다.

자연이든 사람이든 계량을 함으로써 무한의 속성을 잃어버립니다. 무한이란 말 그대로 계량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무한함과 유한함을 모두 가지고 있는 사람은 계량함으로써 유한함만 남게 됩니다.

셋째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입니다. 신은 유일한 무한자입니다. 무한자의 피조물이 바로 자연과 인간입니다. 그래서 자연과 인간을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연과 인간뿐만 아니라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알고 만날 수 있습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자신안에 있는 무한함을 일깨웁니다. 이런 것들이 모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고 한탄합니다. 그리고 호세아서 6장에서 사람들에게 촉구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알자. 애써 주님을 알자. 새벽마다 여명이 오듯이 주님께서도 그처럼 어김없이 오시고, 해마다 쏟아지는 가을비처럼 오시고,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오신다.

내가 바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랑이지, 제사가 아니다. 불살라 바치는 제사보다는 너희가 나 하나님을 알기를 더 바란다. ( 호세아 6: 3, 6)

이렇게 보면 절망에 빠져 있지 않고 온전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참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영적인 부분과 흙으로 지음 받은 육적인 부분 모두 의식하면서 조화롭게 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이 둘 사이에 항상 긴장과 불안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안에서 달아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어느 한쪽으로 달아나도 그것은 절망일 뿐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은 불안을 안고 용감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참 인간이자 참 신으로 사셨다는 것은 예수의 독특한 위치를 설명한다고도 할 수 있지만 인간 일반의 상징성을 대표하는 말이기도 하고 본래 인간의 참된 모습을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지금 여러분은 예수님을 따라 육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부족함 없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계신가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느 쪽에 치우쳐 절망하고 계신가요? 이 말씀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다시 한번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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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중이 2019.12.07 09:39
    육신을 영혼의 옷으로 본다면 그 옷은 당연, 땅에 묻혀 썩어 없어질 것이기에 흙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틀림이 없는 것 같습니다. 원자 구조로 보아 사실 99.999999999999999999999999 % 이상의 공간이 비어있어야 할 존재들이 우리 눈에 보인다는 것은, "전자기"라는 과학적 개념을 제쳐 놓고 볼 때, 물질이란 결국 환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과학이 발전하면 할수록 아주 먼 옛날 성현들이 간파했던 진리들이 새삼스럽게 불쑥 다가오는 느낌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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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에르 2019.12.23 21:40
    아주 먼 옛날 성현들은 과학적 지식은 부족했을지 몰라도 고도의 직관력을 통해 사물과 그 너머의 본절을 꿰뚫는 힘이 있었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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