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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사람을 찾아서

(누가복음 19: 1~10) 예수께서 여리고에 들어가 지나가고 계셨다.

삭개오라고 하는 사람이 거기에 있었다. 그는 세관장이고, 부자였다.

삭개오는 예수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려고 애썼으나, 무리에게 가려서, 예수를 볼 수 없었다. 그가 키가 작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보려고 앞서 달려가서, 뽕나무에 올라갔다. 예수께서 거기를 지나가실 것이기 때문이었다.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러서 쳐다보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삭개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서 묵어야 하겠다."

그러자 삭개오는 얼른 내려와서, 기뻐하면서 예수를 모셔 들였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서, 모두 수군거리며 말하였다. "그가 죄인의 집에 묵으려고 들어갔다."

삭개오가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주님, 보십시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서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하여 갚아 주겠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인자는 잃은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1. 마음에 악마를 품은 아이 제제

제가 어릴 적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책이 바스콘셀로스의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입니다. 주인공은 브라질 빈민가에 사는 여섯 살 먹은 말썽꾸러기 제제입니다. 제제는 크리스마스에 태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날로 기리고 있지만 예수님 말고 이 날 태어난 아이는 악마라는 속설도 있습니다. 장난꾸러기 제제는 장난을 칠 때마다 아버지에게 호되게 맞았습니다. 맞는 것 보다 제제를 더욱 아프게 했던 것은 아버지의 독설입니다. 주위 사람들도 망나니, 사고뭉치라고 욕을 했습니다. 형도 누나도 제제를 때렸습니다. 제제는 욕과 매를 맞으며 스스로도 자신 속에 악마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가장 재수 없는 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제제의 아버지가 정말 나쁜 사람은 아닙니다. 오랜 실직, 팍팍한 가정환경으로 인해 제제의 장난을 너그럽게 받아줄 마음의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제제도 마찬가집니다. 형제 많은 가난한 집에서 관심과 사랑을 받지 못하다 보니 주목받고 인정받기 위해 장난이 심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제를 잘 아는 사람들은 제제가 마음이 따뜻한 소년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그는 자기 동생 루이스를 왕자처럼 사랑으로 돌봅니다. 배가 고픈 제제에게 선생님이 빵을 주자 제제는 자신보다 더 가난하고 어려운 친구에게 빵을 줍니다.

이런 제제에게 구세주처럼 나타난 사람이 뽀르뚜까 아저씹니다. 처음에는 악연으로 시작했습니다. 제제가 달리는 뽀르뚜까 아저씨 차에 매달려 장난을 친 것이 인연의 시작입니다. 뽀르뚜까 아저씨는 이 악동 녀석의 볼기를 때립니다. 그리고는 며칠이 지나서 뽀르뚜까 아저씨는 발을 다친 제제가 절뚝거리면서 학교를 가는 모습을 봅니다. 그는 제제가 안스러워 차를 태워줍니다. 이 일을 계기로 뽀르뚜까 아저씨는 제제에게 둘도 없는 친구가 됩니다. 자신의 비밀과 슬픔을 뽀르뚜까 아저씨에게 털어 놓습니다. 그동안은 작은 라임 오렌지 나무 한 그루가 유일한 친구라 할 수 있었는데 사람 친구가 생긴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 있던 제제에게 비보가 날아듭니다. 뽀르뚜까 아저씨가 망가라띠바 기차에 치여 죽었다는 것입니다. 제제는 세상 전부를 잃은 슬픔으로 식음을 전폐합니다. 제제가 삼일을 앓아 누워 있는 동안 저도 같은 심정으로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납니다.

어릴 때 이 책이 제 마음에 가장 깊이 남아 있었던 이유는 저의 처지가 제제와 비슷했다고 생각생각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제가 맞는 장면에서는 제가 억울하게 맞는 것만큼 화가 나고 제제가 슬퍼하는 장면에서는 제가 세상을 잃은 것처럼 슬퍼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무도 저를 보지 않을 때 이 책을 여러 번 읽으면서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저를 돌아보면 저는 제제보다도 못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항상 저를 못마땅해하고 나무라는 아버지, 생활고와 불화로 우울과 화병을 가지신 어머니의 모습이 저의 유년시절의 기억입니다. 학교에서도 말썽꾸러기라 저를 좋아하는 선생님이 없었습니다. 저에게 선생님은 딱 두 부류였습니다. 저를 미워하거나, 저에게 무관심하거나입니다. 제제에게는 그나마 뽀르뚜까 아저씨가 있었지만 저는 저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적대적인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순응하느냐, 저항하느냐입니다. 저는 저항하는 쪽으로 마음먹었습니다. 학교에서 말썽을 피워 선생님에게 맞을 때도 빌거나 사정하지 않았습니다. 아파도 아픈척하지 않았습니다. 절대 다른 사람들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피도 눈물도 없는 독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습니다. 함부로 저에게 시비 걸지 못하게 하고 싶었습니다. 저의 약한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들킨다면 위로해주고 격려해줄 꺼라 생각하기 보다는 하이에나처럼 달려와 상처를 물어뜯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마음에 두꺼운 갑옷과 투구를 쓰고 다니다 보니 제 본연의 모습을 한 어린 아이는 어린 시절 어딘 가에서 잊어버린 것 같습니다.

 

2. 삭개오는 왜 뽕나무에 올라갔을까?

오늘 본문에서 삭개오는 예수님께서 자기가 사는 여리고 성으로 오신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마을에 들어오시니 예수님을 보려고 사람들이 몰려 듭니다. 삭개오 또한 예수님을 보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했나 봅니다. 키가 작고 왜소해서 많은 인파들 사이에서 예수님을 보기 어렵게 되자 뽕나무에 올라갔습니다. 그렇게라도 해서 예수님을 보고 싶었나 봅니다. 

삭개오는 부자입니다. 세리장으로 돈을 많이 모았습니다. 당시 예수님을 열성적으로 따르던 사람들은 사회에서 소외된 자들, 가난한 사람들, 병자들, 로마의 압제를 못마땅해하며 혁명을 꿈꾸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로마의 지배하에 세금을 걷어 돈을 번 사람입니다. 질병이 있거나 가난하지 않습니다. 뭐 하나 부족한 게 없는데 삭개오는 왜 예수님을 보고자 하는 열망이 컸을까요?

그는 돈은 많았지만 이웃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인정을 받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미움의 대상이었고 죄인 취급을 받았다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세리장이란 직업은 동족의 고혈을 쥐어짜서 자신들을 지배하는 로마에 돈을 바치고 그 떡고물을 받아먹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자신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나 거래처의 사람들도 돈 때문에 당장은 굽신거리고 웃을지 몰라도 뒤에 가서는 욕을 할 것입니다. 키도 작고 볼 품 없어서 인간적인 매력도 없어 보입니다.

자신에게 적대적인 세상에서 삭개오는 더욱 악착같이 돈을 모으고 사람들에게 표독스럽게 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해서 돈을 벌고 부자가 되었지만 그 누구도 그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삭개오가 예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아픈 자, 고통받는 자를 치유하고 가난하고 소외된 자, 고아와 과부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 분이라면 자신 같이 못난 사람도 사랑받을 수 있을까? 용서받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요? 과거 어딘 가에서 잃어버린 순수한 자신을 되찾고 구원받고 싶은 열망이 뽕나무로 오르게 하지 않았을까요?

예수님을 구경만이라도 해보고 싶은 마음에 뽕나무에 올라갔던 삭개오를 예수님이 부르셨습니다. 삭개오야.”

처음 보는 예수님께서 많은 무리들 가운데 계신 그분이 자신의 이름을 불렀을 때 삭개오의 기분은 어땠을까요? 김춘수의 꽃처럼 그 분이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까지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분이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하나의 의미로, 꽃으로 화하지 않았을까요?

더더구나 그분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셨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집으로 오셔서 하루를 묵겠다고 하십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모시기 위해 얼른 내려왔습니다. 주변에서는 사람들이 수군거립니다. “예수님이 죄인의 집에 묵으러 들어가신다.” 이 말뿐이었겠습니까? “역시 예수도 어쩔 수 없구나.”, “선지자라고 하면서 돈 많고 좋은 집이 좋긴 좋은가보지?” 하고 비아냥 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삭개오는 자신의 재산 절반을 내어놓고, 자신이 부당하게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갚겠다고 합니다.

삭개오의 말에 이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인자는 잃은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단순히 삭개오가 많은 재산을 기부하겠다고 해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일까요? 중심을 보시는 예수님께서는 그가 잃어버렸던 자신을 찾았다는 것을 아셨을 것입니다. 자신을 잃어버리고 그 보상으로 돈에 집착한 삭개오였습니다. 그렇게 번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내 놓는다는 것은 돈 보다 더 귀한 것을 얻었다는 반증입니다.

 

3. 신 앞에 선 단독자는 온전한 자기여야 한다.

우리는 삭개오를 비난한 사람처럼 누군가를 쉽게 비난할 수 있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먼저 비난할 희생양을 찾습니다. 그리고 모든 책임을 그에게 전가시킵니다.

2015년에 난민 4,000명이 고무보트를 타고 유럽으로 가려다가 지중해에 빠져 익사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사실 이러한 사건은 계속 있어왔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그렇게 빠져 죽은 시체들 중 어린 아이의 시체가 어느 지중해 휴양지 해변에 떠밀려온 것입니다. 유럽 사람들은 그 사진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엄청난 관심이 쏟아지자 이 아이의 죽음에는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가? 묻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비난의 대상을 찾아 냈습니다. 절박한 난민들을 상대로 1인당 1,000유로를 받고 고무보트에 태운 브로커들입니다. 이 어린이들과 난민의 죽음이 모두 이 브로커의 양심 없는 욕심 때문이라고 사람들은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분노와 비난이 난민의 처지를 바꾸었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문제가 소수 사람들의 이기심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 난민들은 제네바 협약을 준수할 의무를 가진 유럽으로 갈 수 있는 자격이 있습니다. 원론적으로는 1,000유로나 들여서 위험한 고무보트를 탈 필요가 없습니다. 터키나 리비아 공항에서 50유로 밖에 하지 않는 비행기를 타고 안전하게 가면 됩니다. 그러나 유럽회원국들은 이들 난민을 막기 위해 불법이민과 난민을 엄격히 구분하여서 난민이 될 수 있는 충분한 서류와 자격요건이 있을 시에만 받아들인다고 명시합니다. 만약 항공사에서 이런 자격요건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입국시킬 경우 항공사에 그 책임을 묻겠다고 합니다. 실제로 난민자격 심사만 하더라도 최소 몇 달이 걸리는데 항공사가 티켓팅하는 고객을 대상으로 짧은 시간안에 그 자격요건을 어떻게 확인합니까? 불가능합니다. 그러다 보니 난민들은 밀입국을 시도하게 되고 브로커가 생기는 것입니다.

어떤 문제가 발생할 때 특정 소수를 희생양으로 만들어 비난하고 처벌하면 속이야 시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영웅이 혼자의 힘으로 영웅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악인 또한 한 사람의 자유의지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쉽게 악동 제제를 비난할 수 있습니다. 어린 아들을 때리고 욕하는 제제의 아버지를 비난할 수 있습니다. 동족의 고혈을 쥐어짜는 삭개오를 비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제가 악동이 되는 데는 애정결핍이라는 문제가 배후에 있습니다. 부모가 제제에게 사랑과 관심을 충분히 쏟지 못하는데는 가난이라는 사회적 요인이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제제에게 화풀이하는 것도 아버지가 원래 폭군으로 태어나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환경이 더 큰 문제였습니다. 삭개오가 돈 밖에 모르는 세리장이 된 것도 다양한 배경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악인을 비난하고 처벌하는 것만으로는 악인도 사회도 바꾸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삭개오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은 정치보다 사랑을 하셨습니다. 한 사람을 그 사람 그대로 이해하시고 받아 주셨습니다. 이것이 교회가 할 일이고 종교가 할 일이라 생각합니다.

정치는 자신의 세력을 정당화하고 상대의 세력과 정책을 비판하는 것이 정당화되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그런 세력다툼이 곧 정치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 혹은 자기 세력은 영웅신화로 덧입히고 상대와 상대세력은 악마로 만드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는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종교는 각자가 온전한 자신이 되도록 돕는 것이 종교의 일입니다. 각자의 삶과 그 역사를 인정하고 이해하며 보듬는 일을 해야 합니다. 종교는 각 사람들이 이 사회 속에서 또는 불우한 과거 속 어딘 가에서 잃어버린 자신을 찾는데 도움을 주는 등불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제제가 뽀르뚜까 아저씨를 만나서 자신을 찾을 수 있었던 것처럼, 저와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 자신을 찾을 수 있었던 것처럼, 저마다 어둡고 힘들었던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 잃어버린 자신을 찾을 수 있도록 이웃을 돌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에 앞서 주님의 부르심 앞에서 자신을 찾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온전한 자신이 신 앞에 단독자로 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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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중이 2019.09.22 21:11
    예수님의 잃어버린 존재에 대한 사랑은 정말 각별한것 같습니다. 복음서에 자주 등장하는 주제인데 소위 성실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선뜻 실행하지 못하는 가르침 중 하나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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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에르 2019.11.12 09:47
    성실함도 미덕인데 성실하게만 살다보면 탕자의 형과 같이 되기 쉬운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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