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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24: 15) 주님을 섬기고 싶지 않거든, 조상들이 강 저쪽의 메소포타미아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아니면 당신들이 살고 있는 땅 아모리 사람들의 신들이든지, 당신들이 어떤 신들을 섬길 것인지를 오늘 선택하십시오. 나와 나의 집안은 주님을 섬길 것입니다."

(전도서 7:15-18) 헛된 세월을 사는 동안에, 나는 두 가지를 다 보았다. 의롭게 살다가 망하는 의인이 있는가 하면, 악한 채로 오래 사는 악인도 있더라.  그러니 너무 의롭게 살지도 말고, 너무 슬기롭게 살지도 말아라. 왜 스스로를 망치려 하는가?  너무 악하게 살지도 말고, 너무 어리석게 살지도 말아라. 왜 제 명도 다 못 채우고, 죽으려고 하는가?  하나를 붙잡되, 다른 것도 놓치지 않는 것이 좋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극단을 피한다.

1. 이것이냐 저것이냐

인생에는 이것이냐 저것이냐 양단간에 선택하고 결단해야 될 때가 있습니다. 얼마전 이진식 목사님이 인생은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라는 사르트르의 말을 인용한 적이 있습니다. 키에르케고르도 이것이냐 저것이냐라는 책에서 선택과 결단을 강조합니다. 물론 선택과 결단이 그리 단순한 일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 아니면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집단의 선택을 반성없이 수용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스스로의 선택과 결단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오늘 첫번째 본문은 여호수아가 은퇴를 앞두고 세겜에서 백성들에게 하는 연설 중 마지막 대목입니다. 오늘 자신의 집안은 주님을 선택했다고 말합니다. 백성들도 그냥 따르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이방신을 따를 것인지 여호와를 따를 것인지 선택하고 결단하라고 촉구합니다. 한 개인뿐만 아니라 공동체도 건강하고 결속력 있는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자발적으로 선택하고 결단한 개인들이 모여 이룬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힘과 권위로 유지되는 공동체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선택과 결단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하다가 시간을 허비하고 나면 남는 것은 후회뿐입니다. 물론 스스로 선택과 결단을 했다고 해서 후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키에르케고르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결혼을 하라. 그러면 너는 후회할 것이다. 그렇다면 결혼을 하지마라. 그래도 너는 후회할 것이다.” 선택과 결단은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결과에 대한 책임도 무겁습니다. 또한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한 미련도 따르게 마련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 혹은 집단이 선택한 것을 따르는 것은 더더욱 큰 후회와 미련을 남깁니다. 그리고 원망이 생깁니다. 결국 선택과 결단, 책임은 주체로써 가져야할 권리이자 의무입니다. 자유인으로 살고자 한다면 선택과 결단의 순간을 피하면 안됩니다. 용감하고 지혜롭게 선택하고 결단하고 묵묵히 책임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자유인입니다.

 

2.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선택과 결단을 강조하다 보면 부작용이 생깁니다. 바른 선택과 결단을 강조하는 것은 더욱 그렇습니다. 바른 선택이란 말에는 바르지 못한 선택도 있다는 전제가 붙습니다. 물론 정의롭지만 고난의 길을 선택할 것인가 불의하지만 출세의 길을 선택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예수님도 그러한 시험을 거치시고 정의롭지만 고난의 길을 가셨습니다. 반면 이분법으로 나누어 선택할 수 없는 문제,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것들이 현실 삶에는 많이 있습니다. 전도서 본문과 함께 그런 이야기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전도서 본문은 창 이상합니다. 의롭게 살다가 망하는 사람도 있고, 악하게 살지만 오래 사는 사람이 있다고 말합니다. 불의한 현실에 대한 묘사는 누구나 동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구절은 쉽게 납득하기 힘듭니다. 앞에서 말한 불의한 현실을 이유로 너무 의롭게, 슬기롭게 살지 말라고 합니다. 꼭 군대에서 너무 튀지 말고 중간만 해야 편하게 산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모난 돌이 정 맞는 다는 말을 하면서 개인보다 조직을 우선시하며 집단적으로 불인을 용인하는 논리를 보는 것 같기도 합니다. 성경이라면 정의롭게 살다가 고난을 당하는 것이 복이 있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한때 이 말씀은 제가 위에서 말한 논리로 악용되기도 했습니다. 군사독재시절에 민주화를 외치며 시위하던 대학생들을 두고 노회한 목사들이 이 말씀을 인용하여 타이르기도 했습니다. 성경에는 왜 이런 구절이 있는 것일까요?

저는 이 말씀을 좀 다르게 해석을 해보려고 합니다.

아래 본문의 마지막 구절에 그 답이 있습니다.  

“하나를 붙잡되, 다른 것도 놓치지 않는 것이 좋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극단을 피한다.

하나를 붙잡지만 다른 것도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극단을 피해야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앞에서 말한 바로 치면 너무 정의로운 것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곧 정의이신데 너무 정의로운 것이 어떻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될까요?

오늘 우리의 일상을 가만히 살펴보면 양단간에 선택하고 결단해야 하는 일보다 그렇지 않은 일들이 더 많습니다. 정의와 불의, 선과 악, 옳은 것과 그른 것으로 나누어지지 않는 것들이 더 많습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인간’이 그렇습니다. 온전히 선한 인간과 온전히 악한 인간은 없습니다. 악함과 선함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볼 때도 이분법적 사고로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친구 아니면 적, 착한 사람 아니면 나쁜 사람, 똑똑한 사람 아니면 멍청한 사람과 같이요. 그러나 다수의 사람은 그 중간 어디쯤 있습니다. 사람들의 스펙트럼은 다양하고 넓게 분포되어 있는데 나의 이분법적 사고구조가 그 사람들을 선인과 악인으로 둘로 갈라 놓습니다. 그 동안 교회에서도 이런 우를 많이 범했습니다. 지금까지 일어난 많은 종교전쟁들이 잔혹했던 것도 우리 편 아니면 악이라는 논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성경해석에 있어서도 완벽하게 옳은 해석이라 확신할 수 있는 것들이 얼마나 될까요? 그러나 나와 우리의 해석은 옳고 나머지의 해석은 이단이라는 논리가 수 많은 정쟁과 분열을 낳았습니다.

구교의 부패에 반대해서 나온 종교 혁명가들도 사소한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서로 나뉘었습니다. 개신교는 초기에 구교의 핍박을 받았지만 개신교에서도 재세례파를 핍박했습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양단간에 옮음과 그름이 나뉜다는 사고가 세상을 극적으로 만듭니다.

 

3. 극단의 사람들

대표적으로는 프랑스 대혁명과 함께 등장한 로베스피에르가 있습니다. 자코뱅 당의 당수인 그는 앙시앙 레짐(구태)이라 불리는 왕정을 무너뜨리고 수구세력을 철저히 숙청했습니다. 수구세력에게 오랜 기간 수탈을 당해온 시민들은 온건한 개혁을 주장하는 지롱드당 보다 급진적인 개혁을 추구하는 자코뱅 당을 열렬히 지지했습니다. 그리고 로베스피에르는 철저한 개혁을 추진하는데 최적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사리사욕이 없어서 철저히 검소하게 살았고 국가를 위해 투신한 사람이었습니다. 시민들의 열렬한 지지로 대혁명 이후 실권을 장악한 로베스피에르는 피의 숙청을 시작했습니다. 루이16세와 그 가족들을 비롯해 왕가와 관련되어 돕고 일한 많은 사람들이 길로틴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지방에서는 사람들을 구덩이에 모아두고 포탄을 날려 집단으로 학살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로베스피에르는 바른 국가를 위해 구태의 악습은 뿌리까지 근절해야 된다는 확고한 신념으로 이런 일들을 감행했습니다. 그래서 구태 세력뿐 만 아니라 좀도둑과 같은 범죄자들도 사형에 처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죽은 사람이 수십만명에 이릅니다.

그러다 보니 온건한 인물들은 로베스피에르를 반대하고 그를 멀리 했습니다. 로베스피에르는 그들 또한 반혁명파 세력으로 몰아 처단했습니다. 로베스피에르 주변에는 점점 극단적인 사람들만 모였습니다. 말기에는 아이러니하게도 극단주의자들과 온건파들의 신임을 모두 잃었습니다. 극단주의자들은 지롱드당을 비롯해서 반대파를 남김없이 숙청하지 않는데 불만을 품었고, 온건주의자는 당연히 그의 공포정치에 치를 떨었습니다.

결국 로베스피에르는 그의 반대파들에게 실각하고 자신이 무수히 죽인 길로틴에 사형을 당했습니다. 그의 측근과 가족을 비롯해 백명이 넘는 사람이 사형을 당했습니다. 극단의 인물들은 자신의 정의를 사회와 하나님의 정의로 착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불의한 사람으로 몰아세워 죽이기까지 합니다.

지금까지 세계에 있었던 많은 독재자들에게 물어보세요. 대체로 많은 독재자들이 자신은 정의를 수호하기 위해 희생을 감수한 용감한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정의의 기준이 철저히 자신이라는 것이 문제죠.

 

4. 중용의 사람들

반면 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중용의 지혜를 발휘한 인물들도 있습니다. 저는 성경의 인물 중에서는 바울이 빠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유대기독교인이 여전히 지키고 있던 성결법과 할례 문제에 대해 이방인들에게도 적용을 해야 하는 것인지의 문제에 대해 중용의 도를 보여주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유대 율법을 지키는 것을 반대하지 않으면서도 이방인들이 유대 율법에서 자유롭도록 유연하게 대처했습니다. 바울의 노력이 없었다면 기독교는 이스라엘 민족의 군소종파로 끝났을지도 모릅니다.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아울렀습니다. 현재 한인연합교회가 속한 캐나다연합교단이 에큐메니컬 운동을 지지하는 것도 중용의 덕이 있으므로 가능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중용은 기계적인 중립이나 중간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황과 때에 가장 적당한 점을 말하는 것입니다. 드립커피를 내릴 때는 95~90도에서 내리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그때가 향이 가장 잘 나는 때라고 합니다. 반면 콜드브루를 추출할 때는 실내온도와 비슷한 24~26도가 적당합니다. 기계적인 중립으로 보면 물이 녹는 4도와 물이 끓는 100도의 중간인 52도가 중용이겠지만 그냥 52도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상황과 때를 읽고 이해하는 지혜가 중요합니다. 이것은 제가 오래전에 전도서 3장을 인용하여 설교한 ‘기한과 때’에 나온 내용이기도 합니다. 이 부분은 다음 주에 다시 좀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무튼 오늘 전도서 본문의 마지막절에서 말하는 이것도 잡지만 저것도 놓치지 말라는 것은 현실세계를 사는 우리에게 실천적인 지혜가 되는 말씀입니다. 특히 교회에서는 다양한 사람들, 다양한 개성들이 모입니다. 다양한 사람들을 하나의 교회로 아우를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다양함의 문제를 선악 간의 문제로 판단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됩니다. 또한 부족한 점을 비난하고 정죄하는 쪽으로 가서도 안됩니다. 그러나 반대극단에 치우쳐서 선악 간의 구별 없이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중용의 도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극단을 피합니다. 좌파든 우파든 극단으로 가면 독재가 됩니다. 극단은 자기만 옳고 남은 틀렸다는 생각이 너무 강해서 대화나 타협이 불가능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곧 하나님이며 하나님의 뜻이 곧 자신의 뜻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극단에 빠진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는 옳고 그름의 문제 이상으로 다양함의 문제가 공존합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선택해야 될 문제가 아니라 모두를 포용해야 될 때가 더 많습니다. 사람이란 존재가 특히 그렇습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시간과 상황에 따라도 다릅니다. 세상을 사는 지혜를 얻는 것이 쉽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부분은 다음 주에 함께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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