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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을 아는 사람만의 여유

(로마서 8:35-39)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 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곤고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협입니까, 또는 칼입니까? 성경에 기록한 바  “우리는 종일 주님을 위하여 죽임을 당합니다. 우리는 도살당할 양과 같이 여김을 받았습니다” 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일에서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그분을 힘입어서, 이기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1. 결말을 알고 보는 공포영화는 덜 무섭다.

공포영화나 스릴러영화는 결말을 알고 보는 것과 모르고 보는 것이 천지차입니다. 해피앤딩으로 끝나는 영화는 더욱 그렇습니다. 영화 중간중간 주인공이 곧 죽을 것 같은 곤경에 빠져도 결국은 살아 남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 긴장감이 떨어집니다. 오래 전에 식스센스라는 영화를 보러 간 적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멀티플렉스가 없었고 단관개봉이라 유명한 영화는 줄을 서서 들어가야 했습니다. 한참 극장 앞에서 줄을 서고 있는데 한 사람이 지나가며 큰 소리로 “브루스 윌리스가 귀신이다!”라고 외치고 가는 겁니다. 저는 영화를 보기 전이라 도대체 무슨 소린지 하고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영화에서 가장 충격적인 반전이 스스로 살아있는 사람이라 믿었던 브루스 윌리스가 알고 보니 죽은 사람의 영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그렇게 떠들고 가는 바람에 저는 짜릿한 반전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영화로 치자면 공포영화나 스릴러적 요소가 있습니다. 마냥 아름다운 멜로물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겪었던 많은 고통과 시련을 다시 떠올려보고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칠지 알 수 없는 공포영화, 반전이 있는 스릴러 영화 같습니다.

우리의 미래도 마찬가집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장밋빛 미래를 꿈꾸지만 어떤 사고와 불행이 닥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영화 데스티네이션을 보면 죽음에 이르게 하는 치명적인 사고가 주인공을 따라다닙니다. 가까운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지닌 주인공은 다가올 재앙을 아슬아슬하게 피합니다. 그러나 운명처럼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는 마치 범죄를 쫓는 형사처럼 그들을 뒤따라 다닙니다. 그리고 결국 끔찍한 사고로 죽음이 승리합니다.

이와같이 우리의 낙관적인 기대와는 상관 없이 사람들에게 도둑처럼 불행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2. 불교에서 보는 인간, 기독교에서 보는 인간

그래서 불교에서는 인생을 ‘고(苦)’라고 합니다. 사람의 삶이 곧 고통이라는 것입니다. 원래 세상은 제행무상 즉 고정된 실체가 없고, 제법무아 즉 고정된 이치도 없고, 나 조차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체개고 즉 무상과 무아를 깨닫지 못하고 집착하는 인간은 고통 속에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종종 “상을 짓지 말라”고 말합니다. 상이란 것은 고정된 개념을 가지고 무엇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자고로 남편은 이러이러해야 해. 부인은 이러이러해야 해. 내 아이만큼은 이러이러해야 해. 라고 생각하고 고집스럽게 그에 맞추려고 하는 것이 상을 짓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상이란 것이 원래 없습니다. 무상무념이지요. 없는 상을 자꾸 짓는 것은 모래성을 쌓는 일과 같습니다. 고정불변하는 실체란 없다는 것입니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의 근원을 불로 봅니다. 불은 하나의 연소과정일 뿐 실체가 없지요. 바람이 없는 곳에서 촛불을 보면 고정된 상이 있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촛불은 끊임없는 연소과정일 뿐입니다. 그래서 헤라클에이토스는 만물이 유전한다고 말합니다. 불교의 연기설이 같은 이치입니다.

이런 부분은 기독교에도 있습니다. 전도서의 전도자는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고 고백합니다. 이사야서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을 뿐이다. 주님께서 그 위에 입김을 부시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그렇다. 이 백성은 풀에 지나지 않는다.”(이사야서 40: 6, 7) 이런 성경 저자들의 고백은 불교의 연기설 보다 더욱 부정적입니다. 불교에서는 생로병사와 함께 윤회를 이야기함으로써 끊임없는 변화를 상정합니다. 이 변화는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이지 않습니다. 반면 위 성경의 고백을 본다면 모든 것이 엔트로피가 증가의 법칙에 따라 늙고 시들고 쓸모 없고 무질서한 곳으로 나아가는 것 같습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을 향해 노화하는 존재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적 변화와 다른 원리가 있습니다. 기독교에는 불교와 달리 영원불멸하는 실체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변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이사야서에는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원 하시니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사랑도 영원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육체는 시들지만 하나님의 숨결로 지음 받은 우리의 영혼은 영원합니다. 이런 믿음이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 중 하나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인생이 고난의 연속이란 점은 불교나 기독교나 같습니다. 불교는 모든 것에 실체가 없다는 것을 깨우치고 해탈, 열반에 드는 것이 최고의 경지라 할 수 있습니다. 반면 기독교에서는 실체가 없는 세상의 욕심을 버리고 영원하신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위해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숨결로 지음 받은 우리의 영혼도 불멸한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육체는 마르고 쇠하나 영혼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집니다.” (고린도후서 4:16)

 

3.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변함 없으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또한 그의 숨결로 지으신 사람의 영혼을 믿습니다. 옛날부터 기독교에서뿐 만 아니라 많은 종교들이 인간을 신과 자연 사이의 존재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다윈의 진화론과 마르크스의 유물론이 세계를 지배하면서 인간은 동물보다 조금 더 복잡한 뇌를 가진 생물이 되어버렸습니다. 우리가 영혼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것처럼 무신론자들이 영혼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도 없습니다. 모르는 것은 없는 것과 동의어가 아닙니다.

아무튼 우리는 앎의 차원이 아니라 믿음의 차원으로 영혼의 존재를 믿습니다. 또 한가지는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영원하시고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니 그 사랑도 변하지 않습니다. 다만 변하는 것은 육신을 가진 우리 마음이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그 어떤 것도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환난도, 곤고도, 박해도, 굶주림도, 헐벗음도, 위협도, 칼도,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이미 듣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게 인생은 결말을 이미 본 공포영화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말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랑이 승리하는 해피엔딩입니다.

다만 필요한 것은 여러분의 믿음입니다. 환란과 시련 중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육체의 결실은 눈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영혼의 결실은 믿음의 눈으로만 보입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세상이 주는 시험이 닥쳐올 때 종교적 평안으로 달아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미래의 불안, 세상의 어려움을 회피하고자 종교로 달아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런 사람들은 종교의 노예가 됩니다. 저는 그 반대를 말하고 싶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죽음을 이긴 성도들은 세상에서 더욱 당당히 싸울 수 있습니다. 종종 인생의 어떤 전투에서는 깨지고 박살 날 지라도 결국 전쟁에서는 최종 승리하리라는 것을 믿고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말한 것은,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복음 16: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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