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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은 골치 아픈 글일지도 모르는데, 제가 갖는 생각과 비슷해서 퍼왔습니다. <동이>라는 드라마를 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구요. 이야기를 끌어나간다는 것은 배타적입니다. 하나의 이야기가 전개되기 위해서는 배경도 한정되어야 하며, 인물도 제한되어야 하며, 또한 이야기의 속의 시간도 각 플롯이 잇는 필연성 대문에 자유롭지 못합니다. 이야기속에 등장할 인물이나 배경은 작가의 무한한 상상력 속에 전개되지만 사실은 그 이야기의 틀에 메일 수 밖에 없습니다.

삶도 그런 것이겠죠. 우리의 만남은 무한할 수 있지만, 우리가 만나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의 드라마도 무한하지만, 기실 매우 제한적이죠. 우리가 많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우연한 만남은 새로운 만남의 발전으로 나갈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우연한 만남으로 생각한 것이 실은 나의 생각, 관심, 활동의 영역 속에 들어온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삶 역시 드라마입니다. 우연성이 아니라 필연성으로 이어진 이야기를 좋은 글이라 하지요. 우리가 그 만나의 울타리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다면 행운입니다. 저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교우 여러분과 함께 제 삶의 이야기를 엮어 나가고 있으니까요. --마틴


<동이>가 <대장금>을 못 넘는 진짜 이유는…
[철학자의 서재] <드라마, 시학을 만나다>
기사입력 2010-05-22 오전 10:04:26

오랜만에 지인과 모여 수다를 떨면 꼭 물어본다. "근래에 재밌게 본 영화나 드라마가 뭐야?" 혹은 "너 요즘은 드라마 뭐 봐?", "어제 그 드라마는 봤어?"

대답에 따라 그 사람이 요즘 어떤 것에 관심이 있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대강의 윤곽을 그려보고 나랑 맞춰볼 수도 있는, 일종의 테스트용 질문이다. 그런데 만약 상대방에게서 요즘 시청각 매체와 전혀 '관계가 없었다'는 대답이 들려온다면? 아마도 모두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어깨를 토닥여주며 말할 것이다. "너도 참 사는 게 빡빡했구나."

우리가 드라마를 대하는 태도

들뢰즈, 지젝 등 많은 철학자들이 영화를 통해 철학하는 것을 시도했고, 국내에서도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아직 텔레비전 드라마에 대한 철학적 연구는 많지 않을 뿐 아니라 그 결과물은 거의 없다고도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크게 세 가지 정도로 정리되지 않을까 싶다. 우선, 두 장르가 모두 종합 예술로 불리지만 영화가 당당히 '감독의 예술 작품'으로 대우를 받고 있는 반면, 드라마는 예술적 책임의 주체가 불분명한 팀 오퍼레이션 결과물 혹은 '방송 편성에 따른 부속물'로 취급받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또 텔레비전은 우리 사회에서 아직도 위험한 '바보상자'이며, 특히 그 '바보상자' 안에서도 지배 엘리트들이 시청자를 우민화시키는 도구로는 드라마만한 것이 없다는 의견도 그 입지가 견고하기 때문이다.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기획 드라마, 즉 쉽게 말해 방송사 사장이 새로 부임하면 그 입맛에 맞춰 대규모로 기획되는 드라마는 황금시간대에 배치되고 대대적인 홍보와 지원을 받는 것이 현실이기에, 이러한 상업주의 메커니즘의 첨단에 서 있는 드라마 '따위'가 예술성을 지니는 것은 소원한 것으로 여겨왔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드라마는 영화나 연극 등의 다른 극 텍스트에 비해 구조적 완결성에 대한 신뢰가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특히나 '사전 제작제'가 정착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시청률이 저조하면 조기 종영되거나 시청자의 의견에 의해 결말이 바뀌는 경우도 많다. 이는 드라마 제작진의 작가주의를 한층 더 약화시킨다.

▲ <드라마, 시학을 만나다 : 텔레비전 드라마의 미학>(박노현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 ⓒ프레시안

하지만 <드라마, 시학을 만나다 : 텔레비전 드라마의 미학>(박노현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에서 저자는 텔레비전 드라마에 대한 지금까지의 학술적 호명에는 본질적인 것이 결여되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우선, 드라마가 창조되는 형성 원리 자체에 대한 무관심 때문이다. 드라마는 "문학, 연극, 영화의 혼종의 산물"인데도 그들에게 학술적으로 외면 받았으며, 이 외면의 심저(心底)에는 동류가 되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 없다는 완고함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전통'과 '정통'으로 무장한 예술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 최근 학계의 가장 핫(hot)한 화두 중에 하나가 바로 '소통'이라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정치판의 가장 큰 화두다.) 소통. 그것은 "선천적으로 선한 것"이며 따라서 모두가 지향하는 것이다.

그런데 저자가 불쑥 묻는다. 대체 "누구와 무엇을 소통하고자 하는가?" 상상 속의 무지한 '대중'을 만들어내서 그들을 진정한 예술의 세계로 이끌어가는 계몽의 책무를 꿈꾸는 것이 진정한 소통인가? "정작 동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이 보고 들으며 울고 웃는 텍스트"는 외면하고, 정답이라면서 "생경한 텍스트"를 들이대며 "쉽게 얘기해줄 테니 잘 들어"라고 선심을 쓰듯 강요하는 것은 소통이 아니다. 또 다른 엘리트의 폭력일 뿐이다.

이제 우리는 드라마를 단순히 "수명 짧은 유희"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시대의 징후를 읽을 수 있는 중요한 문화적 텍스트로 보아야 하는 것 아닌가?

대중에게 더 열린 매체

'텔레비전 드라마의 미학'이라는 부제(副題)는 불온하기 그지없다. 그도 그럴 것이 아직 이 땅에선 텔레비전 드라마 '따위'에 감히 '미학'이라는 단어를 나란히 사용하는 것 자체가 금기이기 때문이다. 특히 그것이 엄정한 '학문'의 장에서라면 정독(精讀)과 경청(傾聽)의 필요조차 소멸되어 버리는 것처럼 보인다. 텔레비전이라는 위험한 매체에 드라마와 같은 유구한 예술이 결합된 것부터가 미적 타락 정도로 여겨지는 듯하다. 하지만 고매한 학문적 품위를 잠시 유보하고 세상을 바라보면 무언가 미심쩍다.

사람은 매일같이 텔레비전 드라마를 본다. '틀면 나오니까' 또는 '할 게 없으니까' 보는 정도의 수준이 아니다. (…) 덧붙여 말하면 사람들은 텔레비전 드라마를 '광적으로' 본다. 도대체 무엇인가? 미적으로 타락한 텔레비전 드라마에 열광하는 이 미적으로 타락한 압도적 다수의 정체는.

2000년을 기준으로 우리나라 사람의 텔레비전 시청 시간은 하루 평균 3시간 29분, 주중 시청 시간 3시간 4분, 주말은 4시간 32분이라고 한다. 이제는 텔레비전을 컴퓨터와 PMP 등을 이용해 보고 있다. 확실히 연극이나 영화보다 드라마가 더 광범하고 대중적이고 서민적인, 열린 매체이다. "틈만 나면 망막을 파고드는 '일상'"이면서도, 바쁜 생활 속에 매몰되어 있는 대중과 서민들에게는 문화생활에 대한 자기위안이기도 하다.

따라서 드라마에는 동시대성, 트렌드, 더 나아가 대중의 욕구 혹은 필요(public wants or needs)가 가장 직접적으로, 적나라하게 담겨 있다. 이는 드라마가 그 시대의 대중문화를 가늠할 수 있는 유력한 지표임을 말하며, 또한 우리가 드라마를 주목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특정 시기에 특정 빈도로 등장하는 텔레비전 드라마의 플롯이나 인물의 유형은 그 시기의 사회적 관심거리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텔레비전 드라마가 화면 안에 반복적으로 담고 있는 시간과 공간은 그 시기의 심상지리(心象地理)를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 뿐만 아니라 텔레비전 드라마를 통해 재현되는 온갖 소소한 오브제(object)는 그 시기의 문화적 도상(icon)이 될 정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텔레비전 드라마는 한 사회의 문화적 총합을 드러내는 표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표상은 때론 시대극의 거대서사 속에서, 때론 시트콤의 에피소드 속에서도 튀어나온다. 대중이 영화보다 드라마에 더욱 공감할 수 있는 것은 그 안에서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켜주고 기대를 투영하는 인물들, 사건들을 더 많이 보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사회의 욕구와 갈등이 무엇인지를 보려면 영화보다는 드라마를 먼저 봐야 한다.

따라서 <모래시계>와 <허준>, <대장금> 등의 경이적인 신드롬의 주역들은 그 시대가 만든 것으로 읽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요즘은 드라마 신드롬의 시대가 아니라 서서히 마니아 드라마 시대로 변모하고 있다는 점도 이런 면에서 흥미롭다. 마니아 작가나 PD의 출현으로 작가주의가 강화되고 있는 것도, 영화 제작진이 드라마로 유입되면서 장르가 다양화되는 것도, 결국 지금 시대 대중의 욕구에 따른 것이다.

지금 <동이>가 <대장금>만큼의 신드롬을 일으키지 못하는 것도 착하고 올곧은 주인공이 성공해서 행복해진다는 따뜻한 이야기가 이제 더 이상 대중의 욕구를 반영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셈일 수도 있다. 대중은 이제 권선징악이 판치는 허구의 허풍에 지쳤고, 혁명은 모두 좌절하는 이야기에도 지쳤을지 모른다.

그래서인지 한동안은 플롯의 세련됨이나 새로움도 없고, 개연성이나 상징성은 배제된 채 자극적이고 충격적인 사건의 연속으로 극을 이끌어 갔던 일명 '막장' 드라마가 전국을 휩쓸었다. 대중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복수하고, 내면의 갈등과 고민은 생략된 채 대립만 남은 인물들에게서 일탈과 통쾌함을 느꼈다.

하지만 결국 이 현실성 없는 인물은 안팎의 공격으로 휘청거릴 수밖에 없다. 점점 견강부회(牽强附會)인 스토리텔링에 지쳐가는 대중과 심지어 창작자 그룹 내부에서도 자정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들리며 점차 힘을 잃어간다. 기본적으로 드라마는 사람의 이야기이고, 따라서 휴머니티(humanity)가 녹아있어야 한다. 하지만 '막장'에는 그것이 없다. 힘을 잃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 "지금 <동이>가 <대장금>만큼의 신드롬을 일으키지 못하는 것도 착하고 올곧은 주인공이 성공해서 행복해진다는 따뜻한 이야기가 이제 더 이상 대중의 욕구를 반영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셈일 수도 있다." ⓒMBC

드라마의 미학?

폴 리쾨르는 <시간과 이야기>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의 미메시스(mimèsis·재현) 개념을 통해 창작자(미메시스Ⅰ)와 창작물(미메시스 Ⅱ), 그리고 독자(미메시스 Ⅲ)의 관계를 설명하며 '이야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드라마의 경우로 설명하자면, 창작자(Ⅰ)가 만든 드라마(Ⅱ)를 보고 독자 혹은 시청자(Ⅲ)가 활발한 비평과 의견을 교환하며 자신의 삶을 반성한다. 그 과정에서 창작자는 또 다시 시청자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건전한 순환'을 겪는다. 혹은 독자 스스로도 또 다시 하나의 이야기꾼(Ⅰ)이 되어간다. 예를 들어, 블로그나 커뮤니티 게시판을 통해 시청에 대한 감상, 비평 글을 쓰는 것도 순환을 이어가는 방법이다. (아니면 앞서 말했듯 기존의 이야기에 지친 독자들이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하는 과정을 시작할 수도 있겠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미메시스 Ⅱ와 Ⅲ 사이의 활발한 내러티브 작용이 있어야만 이 세 가지 미메시스 사이에 건전한 순환 작용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그 순환 작용으로 인간은 '인간의 시간', 즉 역사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 인간의 이야기하는 능력, 창조하는 능력이야말로 가장 강력하고 고귀한 능력이라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책, 영화, 드라마 등의 예술 작품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드라마는 특히 라디오 드라마를 바탕으로 발전해온 장르로 스토리텔링이 가장 강한 대중 예술 장르이다. 드라마의 위상을 다시 한 번 상향 조정해보자. 지금까지 한국 텔레비전 드라마의 '미학'에 대한 연구가 없었으며, 이전의 연구는 모두 '미디어'를 강조한 채 이루어져 왔지만, 저자는 이제 텔레비전이라는 미디어에 가 있는 방점을 드라마라는 장르로 끌어올 때라고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드라마가-고대 사회의 연극으로부터 출발하여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 가운데 가장 큰 수혜자인 영화에 이르는-면면한 극예술의 선분 위에서 대등한 자리를 차지하고, 독자적 극예술로서의 입지 또한 세우기 위해서는, 텔레비전 드라마에 대한 고유한 미학적 패러다임의 설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한다.

"드라마가 시학을 만난다는 것은 전혀 새로울 것 없는 사실"이지만 저자가 <시학> 가운데 모방 대상으로서의 플롯, 인물, 사상과 수단으로서의 언어라는 네 가지 형성소를 가져와서 살피는 것은 현대의 텔레비전 드라마가 어떻게 '참조'하고 어떻게 '창조'하는지 읽어내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그는 드라마 텍스트를 <시학>을 통해 세밀하게 분석하며 드라마의 미학은 참조와 창조의 접점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영화, 연극, 드라마를 포함한 극예술 장에서 구현되는 보편적 동질성과 드라마의 특수한 이질성의 총합으로 미학이 성립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텔레비전 드라마는 예술의 영역에서 연극 및 영화와 같은 자리를 점유하고 있음과 동시에 일상과 예술, 현실과 상상의 삼투(渗透)를 특징으로 하는 경계에 존재하는 예술이라는 점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특히 저자는 미니시리즈를 중점적으로 분석하며, 이것이 텔레비전이라는 미디어가 드라마라는 장르와 빚어내는 예술성과 대중성의 실체를 확인시키는 장르라고 설명한다. 그것은 결코 예술성을 도외시하거나 대중성에만 매몰되어 있지 않고 오히려 예술성과 대중성의 결합을 통해 연극과 영화에 못지않은 고유의 미감을 창출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설령 그것이 미적인 것 혹은 예술적인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다다를지언정 그에 대한 심도 깊은 사유가 더 이상 지체되어서는 곤란하다. 현대 사회의 텔레비전 드라마는 극예술의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대단한 위력을 지닌 채 일상과 상상 혹은 현실과 예술의 경계를 뒤흔들며 배회하는 또 하나의 문제적 유령이기 때문"이라고 자신의 연구에 대해 마지막까지 변호하고 있다.

나는 그 변호에 '한 표' 던진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드라마를 연구해줄, 더 정확히는 철학으로 드라마를 읽어줄 사람을 기다릴 것이다. 그것이 미드(미국 드라마)든 일드(일본 드라마)든 영드(영국 드라마)든! 모두 좋다. 분명 모두 그 사회에 대한 이해의 통로가 되어줄 터이고 또한 한국 사회가 그들 사회와는 어떤 차이와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것도 재미있을 터이기 때문이다.

드라마와 현실의 오버랩(overlap)

이 책 머리말에서 저자는 <다모>의 장성백이 좌절된 혁명 앞에 일갈하는 모습이 마치 1980년 광주도청을 사수하던 시민군의 목소리로 들렸다고 했다. 하지만 <선덕여왕>의 덕만과 미실이 말하던 서로의 꿈, 덕만이 마지막까지 스스로에게 던진 '견뎌내라'는 말, <추노>의 노비당 사람들이 혁명을 통해 바란 세상, <지붕 뚫고 하이킥> 식모로 살아왔던 세경의 급작스러운 죽음은 대중들에게 어떻게 다가갔을까? 88만 원 세대에게는 그 목소리가 어떻게 다가가고 있는 것일까?

드라마와 현실의 오버랩(overlap)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오늘도 드라마는 자신 안에 '시대'를 담아내기 위해 그 나름의 투쟁을 시작하고 있다. 우리는 이제 그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지인들에게 한 번씩 물어보자. "당신은 요즘 어떤 드라마를 보십니까?"

'철학자의 서재'는 <프레시안>과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서평 연재입니다. 매주 주말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철학자들이 심사숙고해 선정한 책을, 철학자가 직접 심혈을 기울여 쓴 서평으로 소개합니다. <편집자>
/한유미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100522094312§ion=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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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CP 2010.05.25 23:29
    한유미씨 머릿 속에는 뭐가 있는지 궁금함. 근데 어느 때부턴가 젊은 여배우들 구분하기가 참 어려워진건 저만 그런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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