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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12 15:13

[설교요약] 나와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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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예수

(빌립보서 3:10-12) 내가 원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며 그분의 고난에 참여하고 그분의 죽음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 나도 부활하는 것입니다.  내가 모든 것을 이미 얻었다는 것도 아니며 완전해졌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리스도 예수님이 나를 위해 마련하신 상을 받으려고 계속 달려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매년 이른 봄이면 사순절이 시작 됩니다. 그리고 사순절의 마지막인 고난주간을 지나 부활절을 맞이합니다. 사순절, 고난주간, 부활절은 그리스도인에게 성탄절 이상으로 중요한 절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그리스도는 제일가는 믿음의 대상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핵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입니다. 여러분에게 지난 고난주간에 예수의 죽음이 어떤 의미로 다가왔습니까? 그리고 오늘 부활주일에 예수의 부활은 여러분에게 어떤 의미입니까? 토끼나 달걀 모양의 초콜릿을 선물하고 먹는 날입니까? 아니면 그냥 공휴일 중 하루입니까? 사실 아무리 중요한 말이라 하더라도 계속 반복 되다보면 무감각해질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세 편의 그림을 통해 나와 이 시대에 예수의 의미가 무엇인지 되새겨볼까 합니다.

그림1전능하신하나님.jpg

그림1) Pantocrator(전능하신 하나님)

이 그림은 이집트 시나이산에 있는 성 카타리나 수도원에 있는 그림입니다. 카타콤(동굴무덤)에 숨어서 예배드리던 초기 기독교인들은 무덤 벽에다 예수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그림에는 수염이 없는 젊은 예수가 그려져 있습니다. 밖에서는 직접적인 표현이 위험하기 때문에 물고기 모양의 그림으로 대신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우리의 구주이심을 믿습니다.” 라는 뜻의 헬라어 문장에서 각 단어의 맨 앞 알파벳을 모으면 이크쑤스’가 되는데 곧 물고기라는 뜻입니다.

이후 유대인들보다 로마인들에게 복음이 널리 전파되면서 한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당시 로마에서 십자가형은 반역자, 극악무도한 범죄자, 중형을 지은 노예들을 처형할 때 십자가형을 진행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 로마의 극형을 받아 돌아가셨다는 것이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처럼 바울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설명하는 데 많은 정성을 들입니다. 이후 기독교가 로마의 국가가 되면서 예수의 신성에 대한 강조, 삼위일체에 대한 교리가 더욱 강화됩니다. 제국을 통일하고 통일한 제국의 정신적인 명분을 제공하는 당시 기독교에서는 이런 강력한 기독론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런 철학이 담긴 그림이 바로 위 그림과 같은 중세의 예수상입니다. 이 그림을 ‘이콘’이라고 하는데요. 후에 영어 아이콘의 어원이 되기도 합니다. 이 이콘의 제목은 판토크레이토”라고 하는데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위 그림을 보면 한 손에는 성경을 가지고 있고 다른 한 손은 독특한 손 모양을 하고 있는데요. 맞닿아 있는 엄지와 약지는 예수의 신성과 인성을 뜻하고 펴 있는 검지, 중지, 소지는 삼위일체를 뜻합니다. 그리고 예수는 무표정하고 위엄 있는 중년 남성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빠질 수 없는 것이 머리 뒤의 후광입니다. 이러한 특징들을 가진 판토크레이토 이콘은 중세에 등장한 가장 흔한 이콘
입니다.

사진2렘브란트예수초상.jpg

그림2) 렘브란트, 예수의 초상(1648~56년경)

이 그림은 르네상스 시절 네델란드의 렘브란트가 그린 예수의 초상입니다. 르네상스 이후 교회의 절대적인 권위는 위협을 받고 있었습니다. 학문, 예술계에서도 관심이 신에게서 인간으로 옮겨갑니다. 이러한 변화를 렘브란트의 예수의 초상이 잘 보여줍니다. 먼저 신적이고 성스러운 표식인 후광이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리고 시선과 표정이 바뀌었습니다. 무표정한 얼굴로 정면을 응시하던 중세 이콘과 달리 렘브란트의 예수는 고뇌와 우수가 깃든 표정을 하고는 정면이 아닌 다른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신으로서 예수가 아닌 인간 예수가 보드러납니다.

신의 뜻이라는 명목으로 종교권력에게 착취당하고 억압당하던 사람들은 신이 아닌 인간에게서 희망을 찾고자 했습니다. 사람들이 버린 신은 권력자들과 종교지도자들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명분을 제공하는 신이었습니다. 편협한 잣대로 심판하고 징벌하고 지옥에 보내는 신이었습니다. 그런 신을 버리고 인간 본연의 모습에서 신을 찾고자 했습니다. 초월자로서의 신이 아니라 사람의 이성과 감성속에 녹아 있는 신성을 발견하고자 했습니다. 이런 시대정신이 인간 예수를 부활시킨 것입니다.

사진3황색예수.jpg

그림3) 폴 고갱의 황색 그리스도(1889)

이 후 기독교는 서구의 종교가 아닌 세계의 종교로 거듭납니다. 유대인들에게서 시작한 종교가 한국인인 저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이천년전 팔레스타인에서 살던 한 유대인의 삶과 죽음이 이천년 후 한국인인 저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그리고 점점 세속화되고 있는 시대, 교회와 세상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는 시대에 예수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될 수 있을까요?

이런 생각 가운데 폴 고갱의 황색 그리스도를 보시면 참 재미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계시지만 표정이 비장하지만은 않습니다. 십자가 아래 앉아있는 여인들은 검게 그을린 시골 아낙들입니다. 이들은 유대인이 아니라 프랑스 시골 브르타뉴의 여성들입니다. 그들의 표정도 어둡지 않습니다. 그리고 뒷배경을 보시면 붉은 단풍나무들이 보이고 한 남자가 담을 넘어가고 있습니다. 담장 너머에는 십자가 아래에 있는 여인들과 같은 복장을 한 시골여인 두 사람이 서 있습니다.

고갱은 이스라엘 성지순례가 아니라 프랑스 시골에서 예수를 부활시킵니다. 그리고 시골아낙들이 막달라 마리아가 되고, 살로메가 되고, 어머니 마리아가 됩니다. 고갱에게 예수는 더 이상 이천년 전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역만리의 외국인도 아닙니다.

또한 한 남자가 넘어가고 있는 담은 교회와 세상의 경계가 할수 있습니다. 만약 고전적인 시각으로 그렸다면 담 너머와 담안의 색이나 밝기를 선명하게 대비해서 그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갱의 세계에는 교회 밖과 안의 차이는 작은 담 하나뿐이고 밝은 노란색 풍경은 똑같습니다. 교회와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지 않는 고갱의 생각을 엿볼 수 있습니다.

위의 그림들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시대와 지역, 사람에 따라 예수는 재해석되어 왔습니다. 일부 진지한 분들은 초대교회를 너무 사모한 나머지 21세기 한국교회나 이민교회도 이천년 전의 모습과 똑같아 지는 것이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이라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천년전에 돌아가신 고인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면, 지금도 살아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지금 우리 시대, 우리 사회, 우리 교회, 그리고 나에게 저마다의 의미로 새롭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어야합니다.

일부 사람들은 바울이 예수의 뜻을 왜곡했다고 비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체험한 예수, 베드로가 체험한 예수, 마리아가 체험한 예수는 저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다르다는 것은 틀렸다기 보다 각자의 삶 가운데 예수를 체험한 경험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오늘 본문 말씀처럼 바로 알아가고자 하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개인의 경험을 모든 사람들에게 절대화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고백처럼 사는 동안 우리의 믿음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머물러 있지 않고 보다 더 깊어지고 새로워져야 합니다.

바울은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며 그분의 고난에 참여하고 그분의 죽음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 자신도 부활하는 것”자신의 소망이라 고백합니다. 지금 여러분은 여러분이 있는 자리에서 어떻게 그분의 고난에 참여하실 것인가요? 여러분은 여러분의 무엇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박아 죽일 것인가요? 그리고 여러분은 어떤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소원하십니까? 물음이 자신에게 있을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가 우리안에 살아서 역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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