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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7 18:25

[설교요약] 정 때문에

조회 수 576 추천 수 1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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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때문에 (츤데레 예수님)

(요한복음 2:1~5) 사흘째 되는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 잔치가 있었다. 예수의 어머니가 거기에 계셨고, 예수와 그의 제자들도 그 잔치에 초대를 받았다.

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지니,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말하기를 "포도주가 떨어졌다" 하였다.

예수께서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그것이 나와 당신에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직도 내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 어머니가 일꾼들에게 이르기를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세요" 하였다.

(마가복음 7: 24~29) 예수께서 거기에서 일어나셔서, 두로 지역으로 가셨다. 그리고 어떤 집에 들어가셨는데, 아무도 그것을 모르기를 바라셨으나, 숨어 계실 수가 없었다.

악한 귀신 들린 딸을 둔 여자가 곧바로 예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의 발 앞에 엎드렸다.

그 여자는 그리스 사람으로서, 시로페니키아 출생인데,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달라고 예수께 간청하였다.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자녀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나 그 여자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개들도 자녀들이 흘리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돌아가거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다."

 

1. 사랑 보다 정

“사랑하다 헤어지면 그만인 줄 나는 알았는데, 헤어지고 남는 것은 눈물 보다 정이었네

이제는 그 누구를 다시 사랑하더라도 정 주지 않으리라 정 주지 않으리라

사랑보다 깊은 정은 두 번 다시 주지 않으리”

“정 주지 않으리” 라는 제목의 트로트 가사입니다. 가사가 단순하지만 이 노래가 오랜 시간 인기를 누렸던 것은 공감가는 가사라 그럴 것입니다. 노래에서는 사랑보다 깊은 것이 정이라 이야기합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좁은 의미로 남녀 간의 감정적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젊은 시절 불타는 사랑을 경험하게 되면 세상에 이보다 더 강력하고 소중한 것은 없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사랑을 위해 목숨도 내어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그렇게도 인기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불꽃 같은 사랑은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위의 노래가사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정이 사랑보다 깊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2. 츤데레 예수님 1

그렇게 보면 예수님은 참 정 많으신 분이십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까운 친척의 혼인 잔치였습니다. 지극히 사적인 영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상징과 비유를 많이 사용하는 요한복음의 특성상 가나의 혼인잔치도 유대교 시대가 끝나고 기독교 시대가 올 것이라는 상징적 해석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냥 본문중심으로 따라가 보겠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지극히 사적인 영역인 친족의 혼인잔치 직전에 예수님은 어떤 일들을 하셨을까요? 먼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습니다. 본격적인 공생에 준비에 들어가신 첫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언급되고 있지 않지만 세례 후 예수님은 광야에 나가서 40일간 금식을 하시며 세 가지 시험을 이겨 내십니다. 그리고 하나 둘 제자들을 불러 모으십니다. 한참 공생애를 준비하는 중에 혼인잔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그 자리에 참석하십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술이 일찍 동나고 맙니다.

이때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에게 이 사실을 알리며 은근히 도와주기를 바랍니다. 제가 감정이입을 해 본다면 어머니의 말을 들은 예수님은 짜증이 났을 듯합니다. 공동번역에서는 점잖게 “어머니”라고 의역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여자여”가 맞는 번역입니다. 물론 낮추거나 비하해서 부르는 ‘여자’가 아니라 불어로 ‘마담’ 혹은 “부인”이라는 뜻에 가깝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아들이 어머니에게 부르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단어입니다. 좀 거리를 두는 느낌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이 저에게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러십니까? 아직 제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이 말은 공동번역에서 가져왔습니다. 오늘 본문인 새번역에는 “나와 당신에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고 나와 있습니다. 여기서 원문의 느낌과 좀 더 가까운 것은 공동번역입니다. 어머니 마리아에게는 친족의 혼인잔치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술이 떨어진 것을 걱정하고 하인을 시키는 모습을 봤을때 마리아와 매우 가까운 친척이며 잔치를 치르는데 마리아가 깊이 관여하고 있음을 알수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공생애 준비에 여념이 없을 때입니다. 혼인잔치는 자리에도 이제 막 따르기 시작한 제자들과 함께 왔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들을 보면 육적이고 사적인 관계보다 영적으로 공적인 관계를 더 중요시하시는 것 같습니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와 자매이며 어머니이다” (마태복음 12:50)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아버지나 어머니나 자식이나 땅을 버린 사람은, 백 배나 받을 것이요, 또 영원한 생명을 물려받을 것이다.“ (마태복음서 19:29)

“나는, 사람이 자기 아버지와 맞서게 하고, 딸이 자기 어머니와 맞서게 하고, 며느리가 자기 시어머니와 맞서게 하려고 왔다. “(마태복음서 10:35)

이런 말씀들만 본다면 가족이나 사적관계가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차원이 아니라 거추장스러운 방해물이라고까지 여겨집니다. 그러니 잔치에 술이 없다고 부탁을 하는 어머니의 말이 짜증스러울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아들의 큰뜻을 헤아려 주지는 못할 망정 이런 소소한 일로 성가시게 한다고 생각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굽힐 생각이 없습니다. 오히려 일꾼들에게 예수가 시키는대로 하라고 당부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아니 도대체 왜 이러세요. 제가 이 일이 저와 상관없을 뿐만 아니라 아직 제 때가 아니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라고 말 할 만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처음 말과는 달리 일꾼들에게 그 집에 있는 여섯개의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게 하고 포도주로 변한 물을 사람들에게 가져다주라고 합니다. 처음 말은 퉁명스러웠지만 잔치관리를 맡은 어머니가 곤란하실까 아들로써 걱정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마리아는 누구보다 먼저 자신의 아들 예수가 메시아임을 믿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에 앞서 자신의 아들이 정이 많은 사람임을 잘 아셨을 것입니다. 때에 이르지도 않았고 사적인 일에 이적을 베푸셨는데 제자들은 그런 모습을 보고 예수를 믿고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3. 츤데레 예수님 2

두번째 본문에는 시로페니키아에 사는 여성이 나옵니다. 시로 페니키아는 마리아와 페니키아의 합성어입니다. 그리고 그 여성은 가나안 여성이며 그리스 여성으로 나옵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시로페니키아라는 가나안 동네에 사는 그리스계 여성입니다. 사는 지역과 출신을 통해 여러가지 정보를 알 수 있습니다. 일단은 유대인들이 개처럼 취급했던 가나안 지역 사람이며, 둘째로 가나안 지역에 사는 그리스 인들은 대체로 유력가 집안이거나 부유한 집안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가나안 지역에서 중산층으로 사는 여성에게 유대인들은 어떤 존재일까요? 한마디로 재수 없는 놈들입니다. 로마의 압제를 받는 식민지 백성이며 대체로 가난한 놈들인데 신에게 선택받았다는 자존심 하나로 주변의 다른 민족들을 무시하는 거만하고 재수없는 사람들로 여겨집니다.

이런 배경을 가진 여성의 딸이 귀신이 들린 것입니다. 지금으로 보자면 열병일수도 있고, 정신질환일수도 있을것 같습니다. 당시의 의료기술로는 불치병이라 할 수 있는 병을 앓고 있는 딸을 보는 어머니의 마음이 어떨까요? 그는 자존심을 내버리고 예수님에게 매달립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간 시점이 좋지 않습니다. 정결법 문제로 바리새인, 율법학자들과 격한 논쟁을 하고 그들을 피해 두로로 숨어들던 때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위협에 두려움을 느끼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깊은 실망과 좌절, 분노도 느끼셨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는 예루살렘과 자신의 고향을 중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의 사역 대상이 자신의 동족인 유대인 중심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가르침이 같은 동족의 종교지도자들에 배척당하는 상황이 생겼으니 좌절과 실망이 컸을 것으로 보입니다.

얼마나 화가 나셨으면 바리새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을 내버려 두어라. 그들은 눈 먼 사람이면서 눈 먼 사람을 인도하는 길잡이들이다. 눈 먼 사람이 눈 먼 사람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것이다.”(마태복음서 15: 14)

큰 좌절감에 빠져서 두로에 있는 외딴집에 조용히 숨어들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시던 차에 이 여성이 나타난 것입니다. 여인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 떠 받들면서 자신의 딸을 고쳐 달라고 애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른 체하시고 한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다. 오죽했으면 곁에 있던 제자들이 저 여성이 평안히 돌아갈수 있도록 부탁을 합니다. 그런 부탁에도 예수님은 여성에게 눈길도 주지 않으시고 제자들에게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의 길을 잃은 양들에게 보내심을 받았을 따름이다.” (마태복음서 15: 24)

이 말에도 가나안 여성은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님께 자신의 딸을 고쳐달라고 간청합니다. 그거니까 예수님께서 이번에는 직접 여성에게 모질게 말합니다.

"자녀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예수님은 거만하고 재수없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러나 다른 유대인들처럼 대놓고 무시한 것은 아닙니다. 유대인의 정결법으로는 개는 부정한 동물이라 사람들이 사는 집안에서 키우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 사람들은 집안에서 개를 키웁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유대인의 기준이 아닌 가나안 여성의 기준에서 개를 말한 것입니다. 유대인에게 개는 부정하고 천한 동물이라고 한다면 그리스인에게 개는 사람들과 친밀한 반려견으로서의 의미를 가집니다. 그래서 자녀들이 먹고 남는 것을 그들에게 던져준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재미있게도 공동번역에서는 반려견의 느낌이 강한 “강아지”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여인에게는 상처가 될만합니다. 그러나 여인은 예수님의 말에 보다 지혜롭게 다양합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개들도 자녀들이 흘리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이 여인의 딸을 고쳐주십니다. 그리고 믿음이 크다고 칭찬하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가나안 여인을 만나기에 앞서 로마인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는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방인을 차별하셨다기 보다 자신의 사명에 우선 순위가 있다는게 맞을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사랑하는 사람, 불쌍한 사람의 간절한 간구를 뿌리치지 못하시고 자신의 계획을 수정하는 모습을 봅니다.

 

4. 하늘 보좌를 움직이는 게 아니야

보통 이런 이야기가 있고 나서는 간절히 기도하면 하늘 보좌도 움직일수 있다고 희망을 주며 끝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무 뿌리가 뽑히도록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신다는 믿음을 가지신 분도 많습니다. 사실 나무가 무슨 잘못입니까마는 이런 믿음도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고 생각합니다. 욕망에 가득찬 사람들의 생떼를 들어주실 하나님은 아닙니다. 램프를 열심히 닦기만 하면 나타나서 그 사람이 말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는 램프의 지니도 아닙니다. 이런 생각은 지극히 인간 중심적인 생각입니다.

 

5. 그렇다고 하나님의 부동의 원동자도 아니야

반대로 성숙한 신앙인은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를 깨닫고 수용하고 따르는 것을 올바른 믿음, 성숙한 믿음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무지한 존재가 무한한 창조주의 섭리를 어떻게 다 알겠습니까? 더더구나 어리석은 우리의 생각과 주장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인다는게 말이나 됩니까? 다만 기도를 통해 나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나의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가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바람직한 믿음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말은 매우 그럴 듯합니다마는 부작용도 있습니다. 모든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고 수동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 안에 있으니 나의 의지나 노력은 무용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오히려 기도도 잘 안됩니다. 내가 기도를 하든 하지 않든 결과는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부동의 원동자”로 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은 중세신학의 잔재라 할 수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운동이 근원을 설명할 때 나온 말입니다. 모든 운동에는 그 운동을 있게하는 원인이 있습니다. 그렇게 소급해 올라가다보면 제1원인에까지 소급될 것이고 제 1원인은 다른 운동의 근원이 되지만 자신은 움직임이 없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만약 제 1원인이 운동이 있다면 그 운동의 원인을 다시 소급할 수 있으므로 제 1원인이 아니게 됩니다. 이런 부동의 원동자 개념은 스콜라 시대를 거치면서 하나님을 설명하는 신관 중 하나로 자리잡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부동이라기보다 오직 스스로 운동하시는 자로 바뀌게 됩니다. 이런 신관은 예정설의 강력한 이론적 뒷받침이 됩니다.

 

6. 서로 소통하는 하나님과 나

저는 우리의 요구를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믿음이나, 하나님의 예정을 일방적으로 주입하는 믿음 둘 다 반쪽짜리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인격으로 만드시고 소통하십니다. 소통을 통해 날마다 새로운 창조가 일어난다고 믿습니다. 물론 서로소통 한다고 해서 50대 50의 기계적인 중립적 소통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뭐라고 하나님께 절반의 몫을 요구할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때로는 100을 가져가시기도 하지만 100을 온전히 내어주시기도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이며 사랑이라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계신가요? 당신에게 어떤 분이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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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포소 2019.11.01 14:25
    칼빈의 예정론에 대한 인정은 아직도 내겐 숙제 입니다.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면서도, 온세상의 모든 영혼들이 구원 받기를 원하실 것으로 생각되는 하나님의 큰 은혜를 감히 어림잡아 볼 때에 쉽지 않은 질문으로 다가옵니다. 인간적인 사고력과 상상력으로 절대자의 섭리를 논한다는 것이 어찌보면 무의미해 보이기도 하지만 최소한 가장 가까운 곳까지라도 가고 싶은 그 바램이 남일 같지는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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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에르 2019.11.12 09:43
    예정은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에게 평안을 주기 위해 이야기 된 것인데 양날의 검이 되어 선택받지 못한 자에 대한 정죄에 까지 적용되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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