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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26: 13, 22: 13) 게으른 사람은 핑계 대기를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한다.

게으른 사람은 핑계 대기를 "바깥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나가면 찢겨 죽는다" 한다.

(잠언 26: 14) 문짝이 돌쩌귀에 붙어서 돌아가듯이, 게으른 사람은 침대에만 붙어서 뒹군다.

(잠언 26: 16) 게으른 사람은 재치 있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가 더 지혜롭다고 생각한다.

 

1. 근면성실의 역사

근면 성실은 한때 한국에서 가장 중요한 미덕이었습니다. 전쟁의 폐허속에서 국가를 재건해야 하고 굶주림과 가난을 벗어나야 할 과제를 안고 살아갔던 많은 분들이 게으르게 살아 갈 엄두조차 낼 수 없었습니다. 이런 근면, 성실은 개신교의 중요한 덕목이기도 합니다.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그의 주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개신교 중산층이 역사의 무대 전면에 등장할 수 있는 배경을 그들이 가진 직업관과 윤리관으로 보았습니다. 개신교인들은 직업과 일을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라 여기고, 근면과 성실을 미덕으로 하며,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계획적으로 움직이며, 쾌락, 행복, 즐거움은 자제하고 게으름을 물리치며, 돈을 모으기 위해 근검절약한다고 말합니다.

한국은 서구에서 받아들여 급속도로 발전한 두 가지 물결이 있습니다. 하나가 자본주의고 다른 하나가 개신교입니다. 이 둘의 공통점이 막스 베버가 말한 개신교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입니다. 한국은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면서 기적적인 성장을 이루어 왔습니다. 근면성실을 미덕으로 보고 반대로 게으름을 죄악시하는 문화는 몇몇 나라나 시대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농경사회에서 시작해서 산업사회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전역사에서 나타납니다. 농경사회와 산업사회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노동력입니다. 노동력이 모든 생산의 근간이 되는 사회에서 근면성실을 미덕으로 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게으름에 대해서 훈계하고 근면성실을 칭송하는 구절들이 많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런 구절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근면성실의 음모, 게으름이라는 이름으로 하는 마녀사냥

막스 베버는 유럽의 변방인 영국이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가 된 것도 근면성실을 기본으로 하는 개신교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덕분이라고 주장합니다. 미국의 발전도 청교도 윤리와 자본주의의 발전을 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의 많은 목사들이 영국이나 미국을 칭송하며 이런 말들을 합니다. “하나님 잘 믿어서 복 받은거다. 개신교의 직업소명에 따라 근면성실하게 일해서 이룬 업적들이다.”

그러나 이들 나라들이 막강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것이 단순히 근면 성실하게 노동해서 얻은 결과일까요? 아니면 하나님께서 예쁘게 보시고 축복해 주셔서 그런 걸까요?

영국은 근면 성실하게 전세계를 누비며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식민지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매우 성실하게 영토, 자원, 노동력을 착취했습니다. 한때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자부할 정도로 세계 전역에 식민지를 만들어서 관리하고 약탈하려면 얼마나 성실해야 되겠습니다. 게을러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미국은 근면성 실하게 인디언들의 땅을 빼앗고 죽였습니다. 사기를 치기도 하고, 군대를 동원하기도 하면서 다양한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그리고 아프리카인들을 노예로 데려와서 대농장을 운영하고 값싼 중국인들을 데려와서 위험한 광산, 터널, 다리를 놓는데 썼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매일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몸이 작은 10대초반의 아이들을 광산 인부로 쓰기도 하고 공장 근로자로 자는 시간을 빼고 노동을 시켰습니다. 얼마나 부지런하고 성실한지 모릅니다. 이렇게 성실 하다 보니 하나님께서도 이들을 예쁘게 보시고 축복을 더하신 것일까요?

미하엘 엔데의 소설 모모를 보면 회색 신사들이 나옵니다. 그들은 시간저축은행의 직원을 가장하고서 사람들에게 접근합니다. 한 사람의 평생 시간을 초단위로 나누어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재산으로 가지고 있는지 보여준 다음 현재 그 시간을 얼마나 낭비하는지 대비시켜주죠. 책에서는 주인공 모모가 사는 마을의 이발사 푸지씨에게 시간도둑이 찾아옵니다. 도둑은 푸지씨에게 얼마나 많은 시간을 잃어버리고 있는지 이야기합니다. 잠 자는 시간, 식사하는 시간, 어머니를 돌보는 시간, 키우고 있는 앵무새에게 들이는 시간, 친구들과 잡담하고 떠드는 시간, 매일 창가에서 하루의 일을 되돌아보는 시간 등등 낭비되는 시간을 다 모으니 인생의 절반이 허비되고 있다고 겁을 줍니다. 그리고 시간도둑은 그 시간을 절약하고 아껴서 자신들에게 저축하면 이자까지 쳐서 돌려준다고 합니다. 그렇게 푸지씨는 시간은행원과 계약을 맺습니다.

푸지씨는 어머니를 값 싸지만 나름 괜찮은 양로원에 모시고 한달에 한번만 찾아 갑니다. 손님들과 한담을 나누며 30분 동안 이발했던 것을 말없이 20분에 마무리합니다. 친구를 만나는 시간, 짝사랑하던 여인에게 정기적으로 꽃을 주던 시간도 아낍니다. 푸지씨는 점점 부자가 되었습니다. 부자가 될수록 시간을 더욱 절약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잠도 줄이고, 사람을 써서 일하면서 종업원들이 시간을 낭비하지 않도록 철저히 감시합니다. 더 이상 양로원도 찾아가지 않습니다. 친구들과의 관계도 수원해지고 짝사랑하던 여인은 더 이상 찾아가지 않습니다. 그렇게 시간을 절약하면 더욱 풍족해야 하는데 시간을 절약하면서 살수록 더 바빠지고 마음의 여유는 없어집니다. 이제 시내 곳곳에서 회색 양복을 입은 시간은행 직원들이 영업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시간을 절약하고 바쁘게 살수록 돈이 늘어나고 차가 늘어나고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대도시가 됩니다. 그러나 예전처럼 웃는 사람이 없습니다. 나중에 주인공 모모가 밝혀낸 것은 회색 신사들이 시간을 저축해주는 시간은행원이 아니라 시간도둑이었다는 것입니다. 시간도둑들은 사람들의 시간을 훔쳐서 그것을 담뱃잎처럼 말아 피워서 생명을 유지합니다. 많은 사람들의 시간을 훔칠수록 시간도둑의 개체수도 많아지고 영향력도 커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실함을 가장해서 분주하게 살지는 않고 있나요? 분주하게 살다 보니 왜 분주하게 살게 되었는지 이유도 기억 못하고 있지는 않나요?

반면 가족과 이웃을 돌아보는 여유, 자신을 돌아보는 여유, 친구를 돌아보는 여유를 게으름이라는 이름으로 내쫓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3. 부지런한 게으름

그렇다고 해서 저는 게으름을 찬양하고 근면성실이 시대착오적인 덕목이라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 진짜 성실함이 무엇인지, 진짜 게으름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시면 게으름에 대한 속성들이 잘 나와 있습니다.

첫째로 게으름은 타성에 젖는 것입니다.

 (잠언 26: 14) 문짝이 돌쩌귀에 붙어서 돌아가듯이, 게으른 사람은 침대에만 붙어서 뒹군다.

이 본문에서 보면 게으름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문짝이 둘쩌귀에 붙어서 돌아가듯이 같은 반경 안에서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을 게으름이라 말합니다. 이 본문에 따른다면 문을 하루에 백 번 천 번 열었다 닫았다 하더라도 게으른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부지런한 게으름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앞에서 우리는 가지 않은 길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순례자라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항상 갔던 길만 평생 오고 간다면 그것은 순례자가 아니라 짐꾼입니다. 평생을 새벽기도 하고 십일조를 하고 주일성수를 한다고 하더라도 날마다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이 없고 새로운 것에 대한 모험을 주저한다면 몸은 분주하나 영은 게으른 것입니다.

인간이란 동물은 원래 게으릅니다. 한번 시도했던 것이 크게 틀린 것이 아니면 반복하는 것이 편합니다.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하는 두뇌는 에너지 절약을 위해 새로운 시도를 싫어 합니다. 항상 갔던 길로 가고, 항상 해왔던 방식을 고수하는 것이 편합니다. 익숙한 길은 뇌의 세계에서도 고속도로와 마찬가지로 뉴런들이 촘촘히 잘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쓰지 않는 영역은 점점 퇴화되고 끊어집니다. 뇌는 엄청난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만 본능적으로는 게으릅니다. 게으른 본능을 따라 살다 보면 성장이 없습니다. 마치 자라지 않는 아이와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목표는 믿음이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러 하나님께 보다 가까이 나아가는 것입니다.

둘째로 게으름에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잠언 26: 13, 22: 13) 게으른 사람은 핑계 대기를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한다.

게으른 사람은 핑계 대기를 "바깥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나가면 찢겨 죽는다" 한다.

게으른 사람은 집 밖을 나가면 사자가 자신을 죽일 것이라 핑계 된다고 합니다. 저는 단순한 핑계가 아니라 생각합니다. 집 밖은 낮 선 세계입니다. 바깥은 언제나 두려운 곳입니다. 제가 지난주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는 하나님께 한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 천로역정과 같은 순례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라 말씀드렸습니다. 평생을 알아가도 다 모르고 죽겠지만 태어날 때 보다 죽을 때 하나님을 보다 더 알기를 원합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을 통해 우리의 이웃과 세계와 자연을 보다 더 알기를 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순례의 길을 떠나야 합니다. 울타리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교회들이 울타리를 더 높게 치고 교인들에게 말합니다. 그리고 신학생들에게 말합니다. 우리 교단 울타리 밖에는 사자와 늑대들이 우글거린다. 우리 교단과 교회 안이 안전하다. 우리가 하는 말 이외에는 읽지 말고 듣지도 말라. 지금 빨갱이와 동성애자들과 사탄의 무리들이 너희들을 잡아먹으려고 우는 사자처럼 노리고 있다.

저는 이들이 하는 말이 꼭 잠언서가 지적하는 게으른 자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봅니다.

셋째로 게으름은 자만에 기인합니다.

(잠언 26: 16) 게으른 사람은 재치 있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가 더 지혜롭다고 생각한다.

게으름의 원인은 두려움과 함께 자만이 있습니다. 본문에서 말하듯이 자신이 가장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더 이상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가르치려고만 듭니다. 이들에게 어떤 발전이 있을까요? 그가 평생을 떠들고 가르친다 더라도 그 사람은 게으른 사람입니다.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격언으로 알려진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은 누구나 아실 것입니다. 원래 델포이 신전에 적혀 있던 문구를 가져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알았을까요? 그는 자신의 무지를 안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아고라 광장에 가서 당시 지혜롭다는 소피스트들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답을 구합니다. 그러나 델포이 신탁에 의하면 아테네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는 소크라테스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지혜는 무지의 자각에 있습니다. 배움이라는 것도 무지의 자각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게으름은 단지 몸을 적게 움직이느냐 많이 움직이느냐가 아닙니다. 자신이 가장 잘 안다는 교만,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에 대한 두려움들로 했던 것, 아는 것만을 답습하려고 하고 더 나은 것을 배우려 하지 않는 것이 바로 게으름입니다.

 

4. 여전히 근면성실은 미덕

빈부격차가 개인의 노력으로 극복하기 어려울 만큼 어려운 시기입니다. 노동보다 자본이 더 큰 돈을 버는 시대입니다. 그 말은 아무리 노력해도 돈 굴리는 사람 못 따라 간다는 말입니다. 세계적으로 불황의 늪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20대와 10대들은 그들의 부모세대들보다 못삽니다.

이러다 보니 젊은이들은 소소한 즐거움, 소확행을 추구합니다. 꼰대들이 말하는 노오력을 멸시합니다.

그러나 노력만으로 안되는 세상이라고 해서 노력 없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노력은 자유의지가 있는 사람만이 가능합니다. 노력은 저절로 되지 않는 것을 되도록 만드는 의지적인 행위입니다. 앞에서 말한 바 있듯이 노력은 같은 일을 아무런 생각 없이 무한 반복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어떤 분들은 반복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이의를 제기할지 모릅니다. 말콤 글레드웰의 책 아웃 라이어에는 일만시간의 법칙이 나옵니다. 한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을 보니 최소한 일만시간을 꾸준히 연습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기술전문 분야를 생각하면 많은 반복학습을 통해 장인의 경지에 이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반복학습도 아무 생각없이 하는 반복학습이 아닙니다. 실재로 일만시간의 법칙에 대해 논문을 쓴 사람은 앤더스 에릭슨이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논문을 너무 가볍게 인용한 말콤을 비판합니다. 자신이 말한 일만시간이 양적인 시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의도적이고 반성적인 일만시간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논문 제목도 “전문역량 습득에 의도적 연습의 역할”입니다.

같은 것을 반복하면서 연습하더라도 의도적인 반성을 통해 항상 지난 연습과 또 다른 시도를 하는 것입니다. 생각 없이 하는 반복학습은 인공지능과 로봇의 시대를 앞두고 있는 현재를 생각해봐도 시대착오적입니다. 이런 분주함은 결국 도태될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근면 성실은 지금도 미덕이 될 수 있습니다. 단 육체적인 반복 노동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신적이고 영적인 근면 성실을 말합니다. 항상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적응하는 정신적 용기와 노력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근면 성실입니다. 그리스도인도 말로만 세상을 선도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인 차원, 윤리적인 차원, 실천적인 차원 모두에서 보다 진일보하기 위해 근면 성실해야 합니다.

그러나 육체의 게으름 보다 정신적, 영적 게으름을 물리치기가 더욱 어렵습니다. 이전에 들어보지 못한 예수의 말씀을 영적으로 게으른 종교 지도자들은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스데반의 설교와 바울의 강론에도 귀를 막고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새로운 세계를 위해 도전한 것처럼 현재에 머물러 있지 않고 앞으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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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중이 2019.08.30 22:37
    평소 게으르다고 생각하는데 일을 하면 또 정신 없이 하는 편이라 저도 자신을 잘 모르겠네요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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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에르 2019.09.02 09:40
    때에 따라 적당히 부지런하고 적당히 여유를 누리는 것이 지혜겠지요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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