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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 2: 11~15) 여자는 조용히, 언제나 순종하는 가운데 배워야 합니다.

여자가 가르치거나 남자를 지배하는 것을 나는 허락하지 않습니다. 여자는 조용해야 합니다.

사실, 아담이 먼저 지으심을 받고, 그 다음에 하와가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아담이 속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 여자가 속임을 당하고 죄에 빠진 것입니다.

그러나 여자가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을 지니고, 정숙하게 살면, 아이를 낳는 일로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4: 34, 35) 여자들은 교회에서는 잠자코 있어야 합니다. 여자에게는 말하는 것이 허락되어 있지 않습니다. 율법에서도 말한 대로 여자들은 복종해야 합니다.

배우고 싶은 것이 있으면,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으십시오.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자기에게 부끄러운 일입니다.

(갈라디아서 3: 28)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1. 세번째 하는 여성 설교

제가 여기서 설교를 시작한지 어느덧 2년반이 지났습니다. 그 동안 여성을 주제로 한 설교를 두 번 했습니다. 처음 했던 설교가 미갈에 대한 설교였습니다. 보통 교회에서 상식적으로 아는 미갈의 이미지는 좋지 않습니다. 다윗은 예루살렘으로 언약궤를 옮겨오는 과정에서 기쁜 나머지 옷이 벗겨주는 줄도 모르고 춤을 추었습니다. 미갈은 야훼 하나님에 대한 다윗의 믿음과 사랑은 이해하지 못하고 왕으로서 품위없이 행동하는 다윗을 나무라다가 저주를 받아 아이 없이 죽은 여인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미갈의 불행이 본인의 잘못이 아니라 아버지 사울과, 남편 다윗의 이기심으로 인한 것이라 말씀드렸습니다.

아버지 사울은 미갈이 다윗을 사랑하는 것을 알고 다윗을 죽이기 위한 목적으로 미갈과 다윗의 혼사를 이용하려고 했습니다. 반면 다윗은 미갈을 사랑했다기 보다 왕의 부마가 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여 결혼을 결심합니다. 사울의 계획이 실패하고 결혼하고 나서도 사위인 다윗을 죽이려하는 사울의 손에서 구원해준 사람이 미갈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달아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두명의 여인과 결혼합니다. 그리고 사울은 미갈을 발디엘에게 다시 시집 보냅니다. 사울과 세 아들이 전쟁에서 전사하고 다윗은 승승장구합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여섯 명의 아내와 많은 자식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잘 살고 있는 미갈을 발디엘에게 빼앗아 옵니다. 미갈의 남편 발디엘은 울면서 바후림까지 쫓아왔다고 합니다. 오랫동안 사랑을 받고 살고 있는 미갈을 강제로 데려와 생면부지 여섯 명의 다른 여인과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온 미갈은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옷이 벗겨지는 줄도 모르고 춤을 춘 다윗을 지적하는 일이 지혜로운 일은 아니라 하더라도 이 후 다윗의 말은 매우 악의적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부친과 그의 가족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셔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셨소.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면 계속 춤을 출 것이오.

저는 성경의 해석 마저도 남성중심으로 이해되고 여성의 몰이해가 당연시되는 것을 꼬집어 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두번째 설교는 성경에서 보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역할을 감당하는 여성들의 이야기였습니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여자 사도 유니아와 남편보다 이름이 먼저 언급되는 브리스길라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여자는 남자에게 종속된 존재로 생각하는 당시에 유니아는 “사도 중에 뛰어난 사도”로 불림을 받았습니다. 초대교회 시절에는 여성의 역할이 컸습니다.

오늘날 여성신학, 페미니스트 신학자들은 성경 속의 여성들, 하나님의 여성성을 강조하면서 자기 주장들을 펼칩니다. 그러나 성경의 큰 흐름을 본다면 남녀가 평등하지는 않습니다. 여자는 남자를 ‘돕는 배필’로 남자 이후에 남자의 갈빗대를 가지고 만든 존재입니다. 물론 여성신학에서는 앞에서 말한 창세기 2장 보다 여섯째날 남성과 여성을 함께 만든 것처럼 보이는 창세기 1장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약의 기록들을 보면 당시 사람들은 창세기 2장을 1장의 구체적인 부연설명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1장과 2장을 모순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2장에서 나오는 것처럼 여자가 남자로부터 지음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었습니다. 제가 여성을 주제로 한 두번째 설교에서 언급되는 유니아나 브리스길라, 뵈뵈 같은 여성들은 바울이 언급한 여성들입니다. 바울은 이들을 동역자로서 칭찬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바울은 성별에 상관없이 평등하게 생각하는 것도 같습니다.

 

2. 성경 속의 남녀는 불평등하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보시면 바울이 여성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디모데 전서나 고린도 전서 모두 여자는 교회에서 잠자코 있으라고 가르칩니다. 율법을 인용해 여성들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남성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창세기를 끌어와 자신의 논지를 주장합니다. 남자보다 여자가 먼저 뱀의 유혹을 받아서 죄를 지었고, 여자보다 남자가 먼저 지어졌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여자는 아이를 낳음으로써 구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만약 오늘날 누군가가 방송에 나와서 바울과 똑같이 말한다면 여성들로부터 융단폭격을 당할 것입니다. 시대착오적인 마초, 꼰대남으로 낙인 찍힐 것입니다.

바울의 예는 수많은 사례들 중 하나일 뿐입니다. 여성신학, 페미니스트 신학자들이 성경에서 여성의 역할과 평등을 찾는 것보다 불평등과 남성 중심적인 사례를 찾는 것이 훨씬 쉽고 많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 성경은 남녀평등을 반대하는 것일까요? 성경에 그대로 나와 있는 것처럼 여자는 남자에게 종속된 열등한 존재로써 고분고분 남성에게 복종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보는 것일가요? 다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실 때부터 남녀을 불평등하고 종속적인 관계로 만드신 것일까요?

 

3. 성경저자의 말보다 성경저자의 정신을

성경을 기계론적 축자영감으로 받아들인다면 하나님께서는 남녀를 차별하시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여성 기독교인이라면 자신들이 남성에게 종속된 존재로써 교회와 남성 앞에서 고분고분하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여성이 남성을 가르치는 일도 없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성경을 문자적으로 잘 지키는 사람들을 우리는 오늘날에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근본주의 무슬림들입니다. 이들을 보면 참 성경적입니다. 성경에서 표현하는 것처럼 여성들은 머리를 가립니다. 고린도 전서 11장에서 바울은 여성에게 머리를 가릴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만약 머리를 가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수치스러운 것이라고 합니다. 요즘은 천주교에서도 머리에 미사보를 쓰는 것이 의무가 아닙니다. 젊은 사람들은 쓰지 않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러나 무슬림들은 이것을 철저히 지킵니다.

그리고 무슬림 여성은 그 신분이 결혼하기 전에는 아버지, 결혼한 후에는 남편에게 종속됩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성경의 율법에서 기록된 대로 돼지고기도 먹지 않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기계론적인 축자 영감설은 잘못된 이론이라 생각합니다. 그들은 성경의 권위를 절대적인 반열에 올리기 위해 하나님 마저도 오류를 저지를 수 있는 분으로 만든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사실 성경에는 많은 오류들이 발견됩니다. 같은 사안을 두고도 숫자, 이름, 내용이 다른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대착오적이고 오류가 있는 성경은 더 이상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권위가 없는 것인가요? 역사가 오래된 신앙서적 정도로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요?

저는 성경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과 그분의 뜻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성경저자들 조차도 하나님의 뜻을 완벽하게 이해했다고 보지 않습니다. 성경의 저자들이 하나님을 알아 나가는 과정이 서술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저자들이 살던 시대의 가치와 문화 속에서 볼 때는 파격적이고 진보적입니다.

구약에서는 사람을 종으로 부리는 것에 대해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에 보면 주인이 종을 때려서 그 자리에서 죽으면 주인이 형벌을 받지만 하루나 이틀을 더 살다가 죽으면 형벌을 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종은 그 주인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같으면 있을 수 없는 말이지만 당장 죽여도 상관없는 종에 대해 이 정도나마 율법으로 제한하고 있는 당시에는 파격적인 것입니다.

신약에서 바울은 주인인 빌레몬에게 그의 종 오네시모를 형제로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안에서 한 형제로 생각하라고 권고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생각은 구약에 비추어 볼 때는 파격적이지만 여전히 노예제를 받아들이는 점에서는 오늘보다 뒤떨어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성에 대해서도 여자이름을 의도적으로 남편보다 먼저 쓰거나 공식문서에 여자 사도를 칭송하는 점에서는 구약에 비해 혁신적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남녀 관계를 종속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은 오늘 날에 볼 때 뒤떨어져 있습니다.

신약은 구약을 갱신할 뿐만 아니라 혁신하고 있습니다. 구약은 구약 나름대로 중근동 시대에서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모습을 보였다면 신약은 다시 구약을 혁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새 술을 새부대에 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일관적이지 않습니다. 다만 끊임없이 하나님을 알아가는 발전의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의 저자들은 자기가 살던 시대의 가치관과 문화를 뛰어 넘어 보다 진보적인 윤리관과 생명존중과 사랑의 정신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시대의 한계는 분명히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계승해야 할 것은 그 시대를 살았던 성경저자들의 말 그 자체보다 그 시대를 살면서도 그 시대를 뛰어넘으려 했던 성경 저자들의 정신이 아닐까요?

 

4. 백래시 (Backlash)

과거로부터 오늘까지 윤리와 도덕은 독점적 권력을 가진 소수로부터 힘 없고 소외된 소수자들을 포함해 모든 사람의 인권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데까지 나아왔습니다. 아울러 인간이라는 종을 너머 자연 전체로 윤리적 대상 범주를 확대해가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생각합니다. 각 사람의 자유와 개성을 존중하고 평등하게 대하는 것을 너머서 자연을 함부로 대하지 않고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과 부합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시대에 남녀평등문제는 진부하기까지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마다 진보적인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과거로 회귀하려는 사람들이 있어왔습니다.

성경에서는 애굽 노예시절을 그리워하며 모세를 원망하던 이스라엘 민족들이 그랬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그랬습니다.

역사에서는 프랑스의 혁명기에 있었던 왕정복고가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근대 러시아도 볼셰비키 혁명이 있기 전 이러한 사례가 있습니다. 오늘날 이란, 터키, 브라질과 같은 나라들이 시대의 발전을 역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한국에서는 일제 치하때가 좋았다고 외치는 친일파들이 사회의 진보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저널리스트 수전 팔루디는 자신의 저서 백래시 (Backlash)를 통해 여성의 인권역사에서도 발전의 기로 앞에서 백래시 즉 반동을 겪어서 퇴보하는 일들을 겪었다고 주장합니다.

한국에서 여성의 역사도 그렇습니다. 고려시대만 하더라도 여성은 남성과 대체로 동등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여성이 제사를 지내고 족보에도 올랐으며 재산 상속도 받았습니다. 고려 충렬왕 시대에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당시 박유라는 관리가 몽골과의 오랜 전쟁으로 남성의 수가 모자라자 첩제를 시행하자고 상소를 올립니다. 이 소식을 들은 여성들은 박유가 연등회에 참석할 때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고 합니다. “저 늙은이가 첩을 두자고 한 놈이다!” 당시 다른 대신들도 부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박유를 지지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오면 상황이 바뀝니다. 성종 때 조선의 기본철학으로 성리학이 자리잡게 되는데 이 시기에 여러분도 들어 아시는 어우동 사건이 터집니다. 좋은 집안 자제인 어우동은 왕족인 이동이라는 남자와 결혼합니다. 그러나 이동은 기생에게 빠져서 어우동과 이혼하려고 합니다. 성리학을 금과옥조처럼 여긴 성종은 이동의 이혼을 만류합니다. 그러나 결국 이동은 어우동을 내쫓습니다. 생과부가 된 어우동은 이후 17명과 간통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조정이 발칵 뒤집힙니다. 어우동은 이 일로 사형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동을 비롯해 고관대작들 비롯한 17명은 가벼운 처벌을 받거나 처벌을 받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성종의 어머니 인수대비는 여성이 지켜야 할 규범을 담은 ‘내훈’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은 조선시대 사대부집 여자들이 시집을 갈 때 반드시 숙지해야 할 교과서 같은 책입니다. 그런데 그 책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만일 남편이 몹시 화를 낼 경우에는 기다렸다가 기분이 풀렸을 때 다시 간하며, 비록 채찍질을 당한다 하여도 어찌 감히 원망하거나 한탄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중종때는 병자호란으로 북방에 끌려갔던 여자들이 돌아오자 그 남편들이 이혼하게 해달라고 상소를 올립니다. 한 지아비만을 섬겨야 하는 여자가 정조를 잃고도 죽지도 않고 돌아왔다는 것이 이유입니다. 15세기 성종 때 시행된 재가금지법이 19세기까지 여성의 족쇄가 되었습니다. 19세기에 와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면서 재가금지법을 폐지하라는 주장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여성에 대한 불평등은 최근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여성 스스로 평등과 자유를 위해 싸운 여성들이 20세기 초에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1927년 종로의 한 기독교회관에서 천명이 넘는 여성이 모여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단체인 근우회를 조직합니다. 근우회는 처음으로 아래와 같은 성명을 발표합니다.

“조선에 있어서는 여성의 지위가 한층 저열하다. (중략) 우리의 앞길이 여하히 험악할지라도 우리는 일천만 자매의 힘으로 우리의 역사적 임무를 수행하려 한다. 여성은 벌써 약자가 아니다. 여성은 스스로 해방하는 날 세계가 해방될 것이다. 조선 자매들아 단결하라!”(근우 선언문 중에서)

이 보다 앞서서 여성의 해방을 외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나혜석입니다. 미술과 글에서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던 신여성 나혜석은 여성이 겪고 있는 명절의 고단함, 결혼제도의 불평등함, 모성애 강요, 여성 개인들의 성취 욕구 억압을 비판했습니다. 당시 나혜석의 외도로 남편인 김우영에게 이혼을 당하자 언론들은 나혜석을 마녀 사냥하듯 비판했습니다. 나혜석이 최린이라는 남성과 외도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전에 남편 김우영에게도 다른 여자와 외도 중이었습니다. 그리고 나혜석은 최린도 자신을 성폭행했다고 고발합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이혼고백서’를 발표합니다.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디다.

조선 남성들 보시오.

조선의 남성이란 인간들은 참으로 이상하고, 잘나건 못나건 간에

그네들은 적실, 후실에 몇 집 살림을 하면서도 여성에게는 정조를 요구하고 있구려.

하지만, 여자도 사람이외다!

한순간 분출하는 감정에 흩뜨려지기도 하고 실수도 하는 그런 사람이외다.

남편의 아내가 되기 전에, 내 자식의 어미이기 전에 첫째로 나는 사람인 것이오.

내가 만일 당신네 같은 남성이었다면 오히려 호탕한 성품으로 여겨졌을 거외다.

조선의 남성들아, 그대들은 인형을 원하는가, 늙지도 않고 화내지도 않고

당신들이 원할 때만 안아주어도 항상 방긋방긋 웃기만 하는 인형 말이오.

나는 그대들의 노리개를 거부하오.

내 몸이 불꽃으로 타올라 한 줌 재가 될지언정

언젠가 먼 훗날 나의 피와 외침이 이 땅에 뿌려져

우리 후손 여성들은 좀 더 인간다운 삶을 살면서 내 이름을 기억할 것이라.

「이혼고백서」 중에서

 

5. 돌아가지 말고 앞으로 가라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돌아가지 말고 앞으로 가라. 광야의 백성들처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처럼, 일부 근본주의 종교지도자들처럼 과거로 돌아가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과거를 교훈삼아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겪어본 적이 있는 과거로 회귀하는 것은 쉽고 빠르지만 퇴보하는 길입니다. 반면 앞으로 나아가는 길은 험난할 수 있습니다. 소란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저자들이 그들의 시대를 앞서 선취했던 선지자들이었던 것처럼 우리도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여전히 교회는 남녀평등의 문제에 소극적입니다. 천주교도 그렇고 개신교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 성경 저자들의 정신을 계승한다면 오히려 기독교인들이 이런 문제에 더 앞서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 있듯이 우리는 물리적으로 점점 더 많은 것을 알아가는 시대를 살고 있고, 소수자를 위한 인권에서 모든 사람을 위한 인권으로 발전하는 과정 중에 있습니다. 일부 근본주의 종교지도자들은 이런 시대의 흐름을 거부하고 과거로 회귀하는 것이 신의 뜻이라 주장하지만 저는 퇴행이라 생각합니다. 예수의 정신에 반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 남자 중심의 사회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시고, 어린이와 여성들을 가까이하셨습니다. 반면 오늘 기독교인들은 오히려 시대를 역행하고 있습니다. 더 좁고 저급한 윤리관을 고수합니다. 남녀평등 문제를 쉬쉬하면서 교회의 주요자리와 권력을 남성들이 독점합니다. 성소수자들을 억압하고 정죄하는 데 앞장섭니다.

예수의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더욱 알기 원하는 사람이라면 저는 앞으로 나아가기를 주저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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