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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28 21:08

[설교요약] 나와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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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우리

(에스겔 18: 20) 죄를 지은 영혼 바로 그 사람이 죽을 것이며, 아들은 아버지의 죄에 대한 벌을 받지 않을 것이며, 아버지가 아들의 죄에 대한 벌도 받지 않을 것이다. 의인의 의도 자신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신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민수기 14: 18) '나 주는 노하기를 더디하고, 사랑이 넘치어서 죄와 허물을 용서한다. 그러나 나는 죄를 벌하지 않은 채 그냥 넘기지는 아니한다. 나는, 아버지가 죄를 지으면 본인뿐만 아니라 자손 삼사 대까지 벌을 내린다' 하고 말씀하셨으니,

(신명기 24: 16) 자식이 지은 죄 때문에 부모를 죽일 수 없고, 부모의 죄 때문에 자식을 죽일 수 없습니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가 지은 죄 때문에만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역대하 25: 4) 처형받은 신하의 자녀는 죽이지 않았으니, 그것은 그가 모세의 책, 곧 율법에 기록된 말씀을 따른 것이었다. 거기에는 "아버지가 자녀 대신에 처형받아서는 안 되고, 또 자녀가 아버지 대신에 처형받아서도 안 된다. 오직 각 사람은 자신이 지은 죄에 따라 처형받아야 한다" 하고 말씀하신 주님의 명령이 있다.

(예레미야 31: 29~30) 그 때가 오면, 사람들이 더 이상 '아버지가 신포도를 먹었기 때문에, 자식들의 이가 시게 되었다'는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오직 각자가 자기의 죄악 때문에 죽을 것이다. 신포도를 먹는 그 사람의 이만 실 것이다."

(요한복음 9:1~3) 예수께서 가시다가,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다. "선생님,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이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요,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

(로마서 8: 1, 2)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당신을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하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1. 타자가 기준이 되는 Somebody

지난 주 설교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somebody가 되고자 한다는 것을 이야기한 적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스쳐 지나가는 하나의 몸짓, nobody에서 하나의 의미, 꽃, somebody가 되고자 하는 열망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여기서 somebody와 nobody의 기준은 자신이나 신이 아닌 이웃과 타자입니다. 그러다 보니 나의 행불행이 나에게나 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인정에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면 행복하고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불행합니다. 결국 우리는 자크 라캉의 말처럼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사람들”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러한 인정욕구와 인정투쟁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무게로 다가 오지는 않습니다. 사회와 문화에 따라서도 차이가 납니다.

남 눈치 많이 보는 사회, 개인 보다 공동체를 더욱 중시하는 사회일수록 인정욕구는 크고 인정투쟁은 치열합니다. 오늘 날 한국이나 일본과 같은 동북아 국가들은 다른 나라에 비해 아주 심한 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캐나다나 북유럽과 같은 국가들은 인정욕구가 상대적으로 작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집단주의 대한민국

되돌아보면 우리는 공동체를 매우 중시하는 문화권에서 살아왔습니다. 나의 어머니도 ‘우리' 어머니라 부릅니다. 영화 친구에서처럼 내가 잘못했을 때 선생님은 “너희 아버지 뭐하시노?” 라고 묻습니다. 우리는 이름을 부르기 보다 그 사람의 서열이나 위치를 호칭으로 부릅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에 태어난 우리는 그냥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띄고 태어났다고 합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보통 ‘우리'는 있고 ‘나'는 없습니다. 한국에서는 진보나 보수할 것 없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나는 ‘우리'안에서 인정 받을때만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반면 ‘우리'안에서 인정받지 못한다면 존재해도 존재하지 않는 nobody가 되버립니다.

집단주의 문화는 그 뿌리가 깊습니다. 연대책임이나 연좌죄는 집단주의의 산물입니다. 사극에서 보면 대역죄인의 경우 본인만 사형당하는 것이 아니라 삼대를 멸족시킵니다. 이와 비슷한 내용이 성경에도 나옵니다.

 

3. 성경에서의 나와 우리

두번째 본문인 민수기를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노하기를 더디하시지만 죄를 지은 사람에게는 당사자뿐 만 아니라 삼사대까지 벌을 내리신다고 하십니다. 민수기뿐 만 아니라 출애굽기와 신명기에도 비슷한 구절들이 있습니다. 지금은 대부분의 나라에서 연좌죄가 사라졌지만 반대로 오래전에는 대부분의 나라들이 연좌제를 시행하고 있었습니다. 성경이 쓰일 당시로 볼 때는 이 구절이 걸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인의 도덕감정으로 볼 때는 거슬리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위의 다른 본문을 보시면 민수기 본문과 반대되는 본문들이 상당히 있습니다. 먼저 가장 명확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곳이 에스겔서입니다.

(에스겔 18: 20) 죄를 지은 영혼 바로 그 사람이 죽을 것이며, 아들은 아버지의 죄에 대한 벌을 받지 않을 것이며, 아버지가 아들의 죄에 대한 벌도 받지 않을 것이다. 의인의 의도 자신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신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에스겔서에는 죄를 지은 사람만 벌을 받고 그 아들에게는 벌을 받지 않는다고 명확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역대 하에서는 죄를 지은 신하의 아들이 대신 사형을 당해도 안되고 아들 되신 아버지가 사형을 당해도 안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각자의 죄는 각자에게만 책임이 있다고 말하면서 근거를 모세의 율법에 나와 있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세오경에는 삼사대에까지 죄의 책임을 묻겠다는 내용과 죄를 지은 본인에게만 죄의 책임을 묻겠다는 상반되는 내용들이 모두 있지만 에스겔서의 저자는 본인에게만 책임을 묻는 것을 모세율법이 정한 원칙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서로 모순되는 이 구절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여기에도 이미 다양한 해석이 있습니다마는 저는 에스겔과 마찬가지고 자기의 죄를 자기에게만 묻는 것이 기본 원칙이라 생각합니다. 성경에서 나오는 삼사대의 저주는 간략하게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죄의 영향이 후대에 미치는 것을 뜻한다고 봅니다. 죄의 책임 자체가 전가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세대의 죄 짓는 습관과 관성이 그것을 보고 자라는 아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역사적인 해석입니다. 유대인들은 남유다가 멸망하고 바벨론으로 잡혀 가서 70년 동안 포로생활을 합니다. 70년의 포로생활에 대한 이유로 아버지의 죄로 말미암아 후손들 삼사대가 죄값을 치룬다고 해석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신약시대에 넘어와서도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 연대책임 의식은 여전히 있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날 때부터 눈 먼 자를 보고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선생님,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지금 우리들에게는 이런 질문 자체가 황당하겠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상식적이고 일반적인 물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히려 당시의 상식을 초월한 대답을 하십니다.

"이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요,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예수님 안에서 성령의 법으로 우리들이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었음을 선언합니다. 한때 한국교회에서는 “가계저주”라는 말들이 나돌았습니다. “가계의 저주를 끊어라”는 책이 많이 팔리기도 했습니다. 이런 터무니없는 말들이 유행할 수 있었던 것도 한국사람들 특유의 연대의식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4. 개인의 등장

사실 역사속에서 개인이 등장한 것은 오래지 않습니다. 보통 계몽주의 시대가 시작되면서 개인의 인권이 등장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개인의 인권은 귀족과 부르주아를 너머서 만인에게로 확대되어 왔습니다. 실존철학에서는 특히 개인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성경속에 하나님께서 한 개인인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와 일대 일로 관계하시는 것에 주목합니다. 역사와 정치속에서 개인은 근대에 들어서나 등장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오래전부터 한 사람을 주목하시고 그의 이름을 부르시고 관계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있는 집단주의 의식들이 한 개인의 고유한 개성을 말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개인주의를 이기주의로 매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집단주의를 공동체의 미덕으로 포장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국가, 교회, 민족 등이 있고 내가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저는 내가 있고 국가도, 교회도, 민족도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5. 성숙한 개인주의

그리고 성숙한 개인주의는 공동체에 반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유한 개성들이 서로 존중을 받고 유대하면서 건전한 공동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의 지체론과도 같습니다. 각 지체는 고유의 능력과 기능이 있어서 그 우열을 가릴 수 없고 모두 각자의 역할이 있으며 이것들이 서로 잘 연결될 때 하나의 온전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성숙한 개인주의에서 개인은 세포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세포는 그 자체로 독립된 개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세포가 하나일 때는 단세포 동물이고 이 세포가 모이면 사람처럼 다세포 동물이 됩니다. 반면 이기주의는 암세포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오직 자기 세포의 증식을 위해 다른 세포를 죽이고 고유한 기능을 마비시킵니다. 이러한 이기주의는 반대극단에 있는 집단주의와도 맥을 같이 합니다. 하나의 암세포가 자라서 거대한 암세포덩어리가 되듯이 하나의 뜻을 지닌 이기주의가 모여서 집단 이기주의가 됩니다.

성숙한 개인주의는 앞에서 말한 지체 혹은 세포와 몸의 관계처럼 건전한 공동체와 연결이 됩니다. 성숙한 개인주의는 자신이 하나의 고유한 개성으로 존중받는 사회가 당연히 그리고 우연히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의 희생과 헌신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압니다. 역사적으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민주화를 위해, 자유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선조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처럼 개인의 자유를 누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각 영역에서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는 사람들 때문에 우리는 한 개인으로 온전히 서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한 개인으로 권리를 누리는 것처럼 아직도 그 권리를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연대해야 합니다. 이런 뜻을 잘 담고 있는 명연설이 있어서 소개하고 마치고자 합니다.

고 노회찬 의원이 2012년 정당대표가 되면서 했던 수락연설입니다.

6411번 버스라고 있습니다. 서울시 구로구 가로수 공원에서 출발해서 강남을 거쳐서 개포동 주공 2단지까지 대략 2시간 정도 걸리는 노선버스입니다.

내일 아침에도 이 버스는 새벽 4시 정각에 출발합니다. 새벽 4시에 출발하는 그 버스와 4시 5분 경에 출발하는 그 두 번째 버스는 출발한 지 15분만에 신도림과 구로 시장을 거칠 때쯤이면 좌석은 만석이 되고 버스 사이 그 복도 길까지 사람들이 한 명 한 명 바닥에 다 앉는 진풍경이 매일 벌어집니다.

새로운 사람이 타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매일 같은 사람이 탑니다. 그래서, 시내버스인데도 마치, 고정석이 있는 것처럼 어느 정류소에서 누가 타고, 강남 어느 정류소에서 누가 내리는지, 모두가 알고 있는 매우 특이한 버스입니다.

이 버스에 타시는 분들은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새벽 5시 반이면, 직장인 강남의 빌딩에 출근을 해야 하는 분들입니다. 지하철이 다니지 않는 시각이기 때문에 매일 이 버스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한 분이 어쩌다가 결근을 하면 누가 어디서 안 탔는지 모두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좀 흘러서, 아침 출근시간이 되고, 낮에도 이 버스를 이용하는 사람이 있고, 퇴근길에도 이 버스를 이용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 누구도 새벽 4시와 새벽 4시 5분에 출발하는 6411번 버스가 출발점부터 거의 만석이 되어서 강남의 여러 정류장에서 5·60대 아주머니들을 다 내려준 후에 종점으로 향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분들이 아침에 출근하는 직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들딸과 같은 수많은 직장인들이 그 빌딩을 드나들지만, 그 빌딩에 새벽 5시 반에 출근하는 아주머니들에 의해서, 청소되고 정비되고 있는 줄 의식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분들은 태어날 때부터 이름이 있었지만, 그 이름으로 불리지 않습니다. 그냥 아주머니입니다. 그냥 청소하는 미화원일 뿐입니다. 한 달에 85만원 받는 이분들이야말로 투명인간입니다. 존재하되, 그 존재를 우리가 느끼지 못하고 함께 살아가는 분들입니다.

지금 현대자동차, 그 고압선 철탑 위에 올라가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스물 세 명씩 죽어나간 쌍용자동차 노동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저 용산에서, 지금은 몇 년째 허허벌판으로 방치되고 있는 저 남일당 그 건물에서 사라져간 그 다섯 분도 역시 마찬가지 투명인간입니다.

저는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이들은 아홉시 뉴스도 보지 못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 분들입니다. 그래서 이 분들이 유시민을 모르고, 심상정을 모르고, 이 노회찬을 모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분들의 삶이 고단하지 않았던 순간이 있었겠습니까. 이분들이 그 어려움 속에서 우리 같은 사람을 찾을 때 우리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들 눈앞에 있었습니까. 그들의 손이 닿는 곳에 있었습니까. 그들의 소리가 들리는 곳에 과연 있었습니까.

그 누구 탓도 하지 않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만들어 나가는 이 진보정당, 대한민국을 실제로 움직여온 수많은 투명인간들을 위해 존재할 때, 그 일말의 의의를 우리는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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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중이 2019.07.29 20:11
    집단주의가 필요한 때가 있었던 것을 부정하기는 어려울듯 합니다. 역사적으로 볼때도 늘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살아야했던 한민족이 명맥을 유지하면서 단결할 수 있었던 원천이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성숙한 개인주의 라는 단어가 참 매력적이면서 하지만 왠지 한국 사회와는 아직 거리가 있어 보이는 그런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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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 2019.07.30 03:00
    저도 공감합니다. 기초질서, 정치제도 등이 확립되지 못한 약소국의 경우는 강력한 리더쉽과 공동체 우선의 정책이 차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한국은 더 이상 약소국도 아니고, 한 민족이라는 단어도 쓰기 어려운 국제적인 도시와 국가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보다 성숙한 개인주의를 토대로 건강한 공동체를 도모해야 할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경제가 급속도로 발전한만큼 의식수준의 변화가 따라주지는 못하는 것 같네요.
    더디다고 느껴지지만 그래도 긍정적으로 바뀌어 나가고 있다고 믿고 또 앞으로도 더욱 그러리라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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