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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body or somebody

(창세기 23:3, 4) 아브라함 은 죽은 아내 옆에서 물러나와서, 헷사람에게로 가서 말하였다. “나는 여러분 가운데서 나그네로, 떠돌이로 살고 있습니다. 죽은 나의 아내를 묻으려고 하는데, 무덤으로 쓸 땅을 여러분들에게서 좀 살 수 있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창세기 47:8, 9) 바로가 야곱에게 묻되 네 연세가 얼마뇨 야곱이 바로에게 고하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예레미야 35:6, 7)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우리는 포도주를 마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조상 레갑의 아들 요나답께서 우리에게 분부하셨습니다. '너희는 포도주를 마시지 말아라. 너희뿐만 아니라 너희 자손도 절대로 마셔서는 안 된다.

너희는 집도 짓지 말고, 곡식의 씨도 뿌리지 말고, 포도나무도 심지 말고, 포도원도 소유하지 말아라. 너희는 언제까지나 장막에서만 살아라. 그래야 너희가 나그네로 사는 그 땅에서 오래오래 살 것이다.'

 

1. Somebody 오디세우스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는 주인공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집으로 돌아가는 가운데 만나는 위기와 역경을 극복하는 내용입니다. 피상적으로 보면 오디세이아는 지혜롭고 용맹한 사람입니다. 아킬레우스가 그리스 연합군에 참전하게 만들었고, 트로이 목마 아이디어를 내고 직접 만든 장본인이며, 아킬레우스가 죽은 후 총사령관 아가멤논에게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헌사받기도 했습니다.

풍운아 오디세우스는 아름다운 아네 페넬로페가 기다리는 자신의 영지 이타카로 돌아갈 일만 남았습니다. 오디세우스 일행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무인도에 정박하게 되었습니다. 안전하게 정박할 포구가 있고, 철 따라 풍성하게 열매 맺는 포도나무가 지천이며, 식수로 쓸 수 있는 맑은 샘물이 있는 섬입니다.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먼 길을 대비해 식량을 충분히 적재하고 좋은 바람이 불 때 출발하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디세우스는 그 섬에서 그리 가깝지도 그렇다고 멀지도 않은 곳에 외눈박이 거인 키클롭스들이 사는 섬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디세우스는 만류하는 부하들을 데리고 키클롭스의 섬으로 갑니다. 섬에 정박하고는 어떤 동굴에 들어서자 누군가가 기르는 양들과 염소, 치즈, 음식들이 있었습니다. 부하들은 이것들을 얼른 챙겨서 달아나자고 애원하는데 오디세우스는 이를 뿌리칩니다. 키클롭스를 직접 만나서 그가 자신에게 선물을 주고 친교 할 것인지 확인해 보겠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주인도 없는 동굴에서 음식을 마음대로 음식을 먹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거인 키클롭스가 들어왔습니다.

키클롭스는 오디세우스 일행에게 교역을 하러 온 것인지 도적질을 하러 온 것인지 묻습니다. 도적이냐 묻는 질문에 발끈한 오디세우스는 자신을 장황하게 설명합니다. 그리스의 총사령관 아가멤논의 백성이며, 이타카의 군주, 제우스의 보호를 받는 자라고 소개합니다. 이 말은 모두 틀린 말이 아닙니다. 오디세우스는 이타카의 군주로써 이타카에서는 요즘 우리 말로 핵인싸입니다. 트로이 전쟁에서도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최고의 전쟁영웅으로 핵인싸입니다. 그러나 낯선 귀향길에서 그리고 키클롭스에게 오디세우스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키클롭스는 대답대신 오디세우스의 부하 두 명을 잡아서 땅바닥에 내리친 다음 토막 쳐서 남김 없이 먹어 치웁니다. 그리고는 매 끼니때마다 한 명씩 잡아먹습니다.

오디세우스는 자신이 가져온 귀한 포도주를 키클롭스에게 주어서 먹고 취하게 합니다. 키클롭스는 술에 취해 잠들면서 오디세우스에게 너는 제일 마지막에 잡아먹을 것이라 말하고는 이름을 묻습니다. 오디세우스는 이때 자신의 이름을 “아무도안” 이라고 합니다. (실제로는 오디세우스가 “우티스 (outis)”라고 말했고 이는 영어로는 nobody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키클롭스가 잠들고 난 후 오디세우스와 남은 일행은 막대기를 뾰족하게 깎아서 키클롭스의 하나뿐 인 눈을 찌릅니다. 키클롭스가 비명을 지르자 동료들이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동료들이 묻습니다.

“도대체 누가 너를 해치려고 하느냐?”

“나를 헤치려고 하는 자는 아무도안이다.” (발음으로는 “아무도아니다”라 들리죠?)

동료들은 아무도 아니라는 말에 그냥 돌아가 버리고 오디세우스는 달아날 수 있는 기회를 가집니다. 자신의 기지로 또 한번 위기에서 탈출하게 된 오디세우스는 우쭐한 마음에 키클롭스에게 자신의 진짜 이름을 말하고 맙니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아들이었던 키클롭스는 자신이 당한 일들을 포세이돈에게 아뢰고 포세이돈의 저주가 오디세우스에게 내리도록 합니다. 이 일로 말미암아 오디세우스의 귀향길은 고난의 행군이 됩니다.

이천 육백 년이 넘도록 이 책이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시대와 지역의 특색을 초월하는 보편적인 인간의 내면을 통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영웅을 좋아합니다. 마블이나 DC코믹스의 수많은 영웅 이야기들은 호메로스의 그리스 신들이나 북유럽의 전설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케릭터들이 많습니다. 한마디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인싸가 되고 싶어합니다. 영어로 한다면 somebody가 되고 싶은 것입니다. 반면 아웃싸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있어도 없는 것처럼 취급되는 nobody가 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의 소설 “그림자를 판 사나이”를 보면 주인공 슐레밀이 어떤 파티에서 이상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 사람은 슐레밀에게 그림자를 팔라고 합니다. 그 대가로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꺼낼 수 있는 마법의 자루를 주겠다고 합니다. 슐레밀은 그림자란 것이 평소에 필요성을 한번도 느끼지 못한 것이라 쉽게 팔아버립니다. 마법의 자루를 가진 슐레밀은 엄청난 부자가 되었습니다. 소유하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림자가 없어진 이후로 사람들은 그와 상종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결혼을 하려고 해도 그가 그림자가 없다는 것을 알고는 파혼을 당합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철저한 nobody가 된 것입니다. 아무리 재산이 많아도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는 삶은 불행합니다.

오디세우스도 마찬가집니다. 그리스의 영웅이자 이타카의 군주라는 핵인싸의 삶을 살다가 여행자가 되어서 겪는 아웃싸의 느낌을 견뎌내기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상황판단도 제대로 못하고 키클롭스에게 찾아가 자신이 얼마다 대단한 사람인지 떠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사람들이 죽고 자신마저 생명이 위태롭게 되자 그는 “우티스”즉 “nobody임을 자처합니다. Nobody가 되면서 살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키클롭스의 동굴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디세우스는 인정욕구를 온전히 포기하지 못했습니다. 양의 배에 매달려 도망가는 와중에 자신의 이름을 키클롭스에게 말합니다. 키클롭스는 그 이름 제대로 안 덕분에 오디세우스를 제대로 저주할 수 있게 됩니다.

 

2. Somebody가 되기 위한 인정투쟁

이렇게 본다면 인정욕구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에 주목한 철철학자이 있습니다. 헤겔은 사람들이 무엇을 소유하기 위해 투쟁하기보다 인정받기 위해 투쟁한다고 보았습니다. 이후에 악셀 호네트는 <인정투쟁>이라는 저서를 통해 개인의 심리적 차원을 너머 사회문제의 근원에 인정투쟁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가만히 보면 태어나서 한동안은 부모의 인정을 바라며 자라고 청소년기에는 친구 사이에 인정을 중요시하며, 성인이 되어서는 사회의 인정과 가족의 인정을 위해 살아간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인정받기 위해 산다는 것은 사랑 받기위해 살아간다고 할 수도 있겠네요. 부모의 사랑으로 자라다가 친구들 사이에서 인정을 받고, 사회에서 인정받으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참 이상적입니다. 이런 인정과 사랑이 충분할 때 사람들은 편안함을 느끼고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김춘수의 시 꽃을 보면 사람들의 인정욕구를 잘 담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아니면 내가 누군가를 부르기 전에 그 사람은 하나의 몸짓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 사람은 그제서야 꽃이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도 누군가의 부름으로 하나의 꽃이 되고 싶다고 말합니다. 나와 너 그리고 우리들 모두 잊혀 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고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언제나 결핍된 채로 살아갑니다. 부모의 사랑이든, 친구의 인정이나 사회의 인정이든 모든 것이 충분하기 쉽지 않습니다. 더욱 큰 문제는 인정과 사랑이 순수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인정과 사랑에 욕망이 섞여서 부담으로 다가옵니다. 조건부 인정과 사랑이 됩니다. 그리고 먹이사슬처럼 서로 얽혀 버립니다. “네가 사회에서 인정받는 다면 부모로서 너를 자랑스러운 자녀로 인정하겠다.” 아니면 “네가 부모의 사랑과 인정을 충분히 받은 사람이라면 난 너를 내 배우자로 받아들일 수 있어.” 하는 식입니다.

그리고 연예인들과 같은 유명인들은 더욱 심합니다. 그들은 팬들이 상상하고 그리는 이상향에 꼭 맞는 사람이 되기 위해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합니다. 연애도 함부로 할 수 없고 언제나 대중을 의식해서 항상 웃고, 친절하고, 예의 바르게 행동해야 합니다.

인정을 하는 입장도 인정을 받는 입장도 있는 그대로의 인정과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모두들 사람들의 욕망에 부합하는 가면을 쓰고 살아갑니다. 사람들을 만날 때 가장 중요한 준비물이 자신의 본 모습을 가리는 가면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은 인정 때문에 살아가기도 하지만 인정 때문에 죽기도 합니다. 사랑받기 위해 증오하고 미워하고 투쟁합니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사랑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할까 봐 두려워합니다. Somebody도 nobody도 모두 사람을 괴롭게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3. 세상에서 nobody로 살기

오늘 성경의 주인공들은 nobody로 살아간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nobody와 다른 점은 자발적인 nobody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인싸 중에서도 핵인싸라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부를 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 부를 정도입니다. 그러나 정작 이들은 세상에서 아웃싸로 nobody로 살아가기를 자처합니다.

첫째 본문은 지난번에도 한번 인용한 본문이라 기억하실 지 모르겠습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내 사라를 장사 지내려고 햇사람에게 하는 말입니다. 사라가 죽을 당시 아브라함은 이미 많은 것을 이룬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 스스로를 나그네, 떠돌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의 삶을 보면 나그네로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롯이 풍요로운 대도시 소돔으로 향할 때 아브라함은 반대편 광야로 나아갔습니다. 롯을 구하기 위해 거병해서 큰 승리를 얻었을 때 그는 그 전리물들을 다른 왕들에게 대부분 줘버립니다. 그리고 그 승리를 위하여 땅을 차지하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이삭은 자주 등장하지는 않지만 자신이 판 우물을 빼앗는 사람들을 피해 계속 돌아다녔습니다.

야곱은 바로가 자신에게 나이를 물을 때 자신의 나그네 길이 130년이었고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레갑 자손들은 자신의 선조 레갑의 아들 요나답 명령에 따라 “집도 짓지 않고, 곡식의 씨도 뿌리지 않고, 포도나무도 심지 않고, 포도원도 소유하지 않았으며 장막에서만 살았습니다. 철저히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요나답은 나그네로 사는 이 땅에서 이렇게 살아야 평탄하게 오래오래 살 수 있을 것이라 말합니다.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신 예수님께서도 떠돌이처럼 사셨고, 천막장인 바울도 그렇게 살았습니다.

이들은 이집트, 바벨론, 로마라는 대제국 속에서 자발적으로 아웃싸를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에 의해 nobody가 되는 것과 스스로 nobody가 되는 것은 천지차이입니다. 자발적인 순례자, 우티스, nobody들은 기존의 욕망체계와 서열에 노예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그물망처럼 얽혀서 우리를 옥죄는 욕망의 사슬에서 자유로운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자크 라캉의 강력한 격언처럼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인정욕구가 없는 사람들일까요? 아닙니다. 자발적인 nobody들은 이미 인정욕구에 대한 결핍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인정욕구를 해소한 사람립니다. 그들은 세상에서는 아웃싸일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인정받은 인싸들입니다. 사랑의 본체이시고 만물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인정받은 사람들이 무엇이 부족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 이름으로 부르시고 자녀삼아 주셨다는 믿음안에서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이 세상은 순례의 길입니다. 천상병 시인의 말처럼 소풍입니다.

여러분은 욕망으로 왜곡된 인정욕구와 투쟁속에서 자유를 누리고 계십니까? 하나님 안에서 somebody라는 믿음이 있습니까? 그래서 세상에서 자발적으로 nobody로 살아갈 용기가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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