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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로드리고

(마태복음 26:69~75) 베드로가 안뜰 바깥쪽에 앉아 있었는데, 한 하녀가 그에게 다가와서 말하였다. "당신도 저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다닌 사람이네요."

베드로는 여러 사람 앞에서 부인하였다.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서 베드로가 대문 있는 데로 나갔을 때에, 다른 하녀가 그를 보고, 거기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다니던 사람입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맹세하고 다시 부인하였다.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조금 뒤에 거기에 서 있는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다가와서 베드로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틀림없이 그들과 한패요. 당신의 말씨를 보니, 당신이 누군지 분명히 드러나오."

그 때에 베드로는 저주하며 맹세하여 말하였다.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그러자 곧 닭이 울었다.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다" 하신 예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바깥으로 나가서 몹시 울었다.

 

엔도 슈사쿠의 <침묵>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이 소설은 일본에서 기독교를 금지하고 핍박하던 17세기를 배경으로 합니다. 일본에 최초로 기독교가 들어간 것은 1549년 예수회 공동 창립자인 수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선교를 통해서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기독교 인구는 급격히 늘었습니다. 16세기 말에는 약 40~60만의 그리스도인이 있었다고 합니다. 일본 인구의 약 10분의 1에 해당하는 숫자입니다. 이런 일본 기독교인들 중에는 우리가 잘 아는 사람도 있습니다. 바로 임진왜란 때 선봉장으로 조선을 쳐들어왔던 고니시 유키나가가 기독교인입니다. 그래서 고니시 유키나가군의 가몬을 보면 십자가 형상이 그려져 있습니다. 고니시가 가토 기요마사와 숙적이 된 이유도 종교에 있습니다. 가토 기요마사는 불교인으로써 자기 영지에 살던 기독교인들을 박해했습니다. 그래서 가토의 영지에 살던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인접해 있던 고니시의 영지로 대거 도망갔습니다. 가토는 그들을 처벌할 수 있도록 내 놓으라고 종용했지만 같은 고니시는 기독교인으로써 그들을 내어줄 수 없었습니다. 이 사건이 발단이 되어 둘은 앙숙이 되었습니다. 결국 고니시는 세키가하라 전투 패배 후 사형당하고 그의 영지는 가토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의 양녀 오타 주리아가 유배지에서 평생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원래 오타 주리아는 평양에 살던 한국인이었는데 임진왜란 당시 고니시군에 의해 납치되었다가 고니시가 양녀로 받아들여 애지중지 키웠다고 합니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 가문이 다스리는 에도시대에 대대적인 기독교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바로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것이 엔도 슈사쿠의 침묵입니다. 흔히들 책 제목의 침묵이 하나님의 침묵이라 이해됩니다. 기독교의 박해에서 하나님께서 침묵하신 것을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소설이 말하는 침묵이 하나님의 침묵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엔도 슈사쿠가 그의 책 “엔도 슈사쿠의 문학 강의”에서 해명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엔도 슈사쿠가 말하는 침묵은 무엇인지 이 책을 이야기하며 알아보겠습니다.

이 책에 처음 등장하는 주요 인물은 포르투갈 출신의 페레이라 신부입니다. 그는 도쿠가와 가문의 박해속에서도 농촌에 숨어서 오랜 기간 선교를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도 잡혀서 고문을 당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당시 기독교인들을 고문하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구덩이를 파서 오물을 가득 채워 넣고 사람을 구덩이 위에 거꾸로 매달아 놓는 것입니다. 그렇게 매달려 있으면 온갖 악취와 벌레가 머리를 타고 스멀스멀 기어 다니게 됩니다. 그리고 피가 머리에 몰려 일찍 죽는 것을 막기 위해서 귀 뒤에 상처를 내어 오랫동안 고통을 받을 수 있게 고안한 것입니다. 이런 형벌을 고안한 것도 배교한 일본인 기독교인입니다. 이들이 쉽게 순교할 수 있도록 하면 기독교도들은 더욱 신앙심이 깊어지고, 퍼져 나갈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것보다는 사람들 앞에서 발부둥치고 배교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기독교인들의 사기도 꺾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이런 방법은 페레이라 신부에게도 통했던 것입니다.

한편 포르투갈 본국에서는 페레이라 신부가 배교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페레이라 신부의 제자들이자 젊은 신부들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토록 신앙심 깊고 존경하는 인물이 배교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이 책의 주인공인 로드리고 신부도 페레이라 신부에게 가르침을 받은 젊은 신부 중 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로드리고 신부와 동료 신부가 함께 일본으로 떠납니다. 그곳에서 숨어서 비참하게 신앙생활을 이어나가는 신자들, 배교를 했지만 신자들 주변에서 기웃거리는 군상들을 봅니다. 그리고 드디어 페레이라 신부를 만나게 됩니다. 로드리고는 페레이라에게 왜 배교를 했는지 따지듯 묻습니다. 페레이라는 대답합니다.

“내가 배교한 것은 구덩이에 매달렸기 때문이 아니야. 사흘간…나는 오물이 잔뜩 들어 있는 구덩이 속에 매달려 있었어. 그러나 한 마디도 주님을 배반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어… 내가 배교한 것은 말이야. 듣고 있나? 들어 주게나. 구덩이에 넣어진 뒤 들렸던 저 소리에… 어려운 고통을 당하는 신도들의 저 신음소리에, 하나님이 무엇 하나 하시지 않았기 때문이야. 나는 필사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하나님은 아무것도 하시지 않았기 때문이야.”

페레이라의 말에 로드리고는 귀를 막으면서 절규합니다.

“제발 잠자코 있으세요. 그만해 주시오… 주여, 지금이야말로 당신은 침묵을 깨 버리셔야 합니다. 더 이상 침묵하고 계셔서는 안됩니다. 당신은 올바름이며 선이며 사랑의 존재임을 증명하고 당신이 엄연히 존재함을 이 지상과 인간들에게 나타내기 위해서라도 뭔가를 말씀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페레이라 신부를 주인공으로 본다면 이 책의 제목 ‘침묵’이 하나님의 침묵일 것입니다. 그러나 페레이라의 말을 가만히 들어 보시면 자신의 나약함을 변명하고 싶고, 면죄를 받고 싶은 심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로드리고에게 “듣고 있나? 들어 주게나.” 하며 재차 확인했던 것은 아닐까요? 결국 이 책의 말미에서 로드리고 신부도 페레이라 신부와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로드리고가 무엇보다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자신이 보는 앞에서 자신을 따르던 무고한 신자들이 고문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정부관료는 이들을 살리려면 배교를 하라고 종용합니다. 배교의 상징적 의미로 후미에라는 예수님 성화가 그려진 동판을 밝고 지나가라는 것이었습니다. 로드리고는 후미에 앞에서 머뭇거립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그때, 밟아도 좋다고 동판에 새겨진 그 분이 신부에게 말했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 신부가 성화에 발을 올려 놓았을 때 아침이 왔다. 멀리서 닭이 울었다.”

로르리고에게 주님은 침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에게 대답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후미에를 밟았습니다. 그때 아침이 오고 멀리서 닭이 울었습니다. 로드리고가 성화에 발을 올리며 배교하는 장면은 성경의 어떤 장면과 유사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자 닭이 울었다는 장면과 비슷합니다. 베드로가 세번째 부인할 때는 저주하고 맹세하며 예수를 모른다고 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그리스도인으로써 첫 배교자는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미 베드로에게 말씀해 놓으셨습니다. 네가 닭이 울기전에 세번 자신을 부인할 것이라고 말이죠.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자신의 전부, 어떨 때는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을 배반하는 겁쟁이가 되었을 때의 심정은 얼마나 참담할까요?

오늘 이 소설에 등장하는 페레이라는 실제 인물입니다. 그리고 로드리고 또한 실존했던 주세페 키아라 신부를 모델로 하고 있습니다. 저자 엔도가 이 소설을 구상하게 된 것은 그가 나가사키에 있는 한 역사박물관에 들렀을 때라고 합니다. 거기에서 기독교 박해시대의 후미에가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후미에 속의 예수님 형상은 사람들이 하도 많이 밟아서 움푹 패이고 그 형상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그 후미에를 보면서 엔도는 이 소설을 구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기독교 안에서 계속 말하고 있는 것은 순교자들과 성인들입니다. 그들의 놀라운 희생과 믿음은 후대에도 여전히 칭송됩니다. 그들이 남긴 말들은 세대를 거쳐 말해집니다.

반면 극한 상황에서 배교했던 사람들, 그리고 배교자라 낙인 찍히고 숨어서 죄책감에 시달렸던 사람들의 침묵을 엔도는 주목한 것입니다. 소설에서도 배교를 하고 난 이후에도 양심의 가책 때문에 고통을 받으면서 끝까지 믿음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엔도는 이들에게도 하나님의 자비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 것입니다. 물론 배교자 모두를 일반화해서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배교를 하고 자신의 형제들을 밀고하고 팔아 넘겨서 출세를 꿈꾸었던 악인들도 있습니다. 일제 치하 때 신사참배를 정당화하고 황국식민으로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 영광임을 설교했던 목사들도 있습니다. 이들 중 다수는 회개하지도 않고 해방된 고국에서 떵떵거리며 잘 살았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엔도가 말하는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신앙을 지키고 싶지만 고문의 고통과 두려움을 이기지 못한 사람들, 이웃과 가족이 고통받고 죽어나가는 것을 차마 지켜볼 수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 한때는 후미에가 무엇보다 성스럽고 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후미에 보다 후미에가 밟히는 것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살리는 것을 원하셨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후미에는 무엇일까요? 예수를 믿는 다는 사실 때문에 고문당하고 죽임당하는 시절에 살고 있지 않는 우리에게 후미에는 어떤 것일까요? 여러분께서 신성시하고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후미에는 여러분의 자존심일수도 있고, 여러분의 종교 신념일수도 있고, 도덕적, 윤리적 기준과 철칙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오늘을 살아가면서도 우리는 종종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서 후미에를 밟고 지나가는 경험들이 있을 것입니다. 의지가 약해서, 두려워서, 남들이 보지 않으니까 후미에를 밟고 지나가는 경우들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들을 쉽게 비난하고 믿음이 연약함을 조롱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살다 보면 자신이 후미에를 밟고 지나가는 경우를 겪습니다. 밟고 지나갔으면서도 완전히 신앙을 버리지 못하고 교회 주변에서 서성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가끔이지만 어떤 경우는 후미에를 밟아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후미에가 상징이 아닌 우상이 되버릴 때 그렇습니다. 그럴때는 밟고 지나가야 하는 용기가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이런 말들이 습관처럼 죄를 짓거나 의도적으로 악한 행위를 하는 사람들에게 면죄부를 주려는 말로 오용되어서는 안됩니다. 나약한 인간과 그것을 잘 아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도 로드리고와 닮아 있을 때가 있습니다. 일본으로 떠나기 전 로드리고의 하나님은 후광이 번쩍이며 영광 속에 빛나는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자신 또한 철두철미한 신앙관으로 주름 없이 날카롭고 반듯한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반면 그가 일본에서 많은 고난을 당하고 산을 헤메이고 이웃의 고통을 바라보면서 예수의 얼굴은 점점 더 초라하고 고통가운데 있는 얼굴로 바뀌어 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고통과 연민에 찬 그 얼굴이 자신을 밟으라고 말합니다. 자신만만하고 당당하던 로드리고의 얼굴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인생의 고난 가운데 침묵하고 계시는 것 같은 하나님에 대해 고민과 회의를 느껴본 분이라면 오늘의 로드리고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젊을 때는 단순한 신앙의 열정과 반듯한 원칙이 후미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삶의 격랑 속에 후미에를 밝고 지나가면서 보다 생각이 깊어집니다. 겸손해집니다. 타인을 품을 수 있고 이해하게 됩니다. 로드리고가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여러분이 이 소설과 로드리고를 충분히 이해하신다면 여러분도 오늘을 사는 로드리고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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