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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不足), 만족(滿足), 자족(自足)

(출애굽기 16:31) 이스라엘 사람은 그것을 만나라고 하였다. 그것은 고수 씨처럼 하얗고, 그 맛은 꿀 섞은 과자와 같다.

(민수기 11: 7) 만나의 모양은 깟씨와 같고, 그 빛깔은 브돌라와 같았다.

백성이 두루 다니면서 그것을 거두어다가, 맷돌에 갈거나 절구에 찧고, 냄비에 구워 과자를 만들었다. 그 맛은 기름에 반죽하여 만든 과자 맛과 같았다.

(전도서 5:10) 돈 좋아하는 사람은, 돈이 아무리 많아도 만족하지 못하고, 부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리 많이 벌어도 만족하지 못하니, 돈을 많이 버는 것도 헛되다.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 4:11~13) 내 처지가 어려워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자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비천하게 살 줄도 알며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에게 힘입어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1. 부족과 만족의 역설

중학교 1학년 때 이진식 목사 옆집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 동네에는 당시 동네사람들에게 꽤 잘나가는 치킨집이 있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간판도 없는 그런 집이었습니다. 그 집에서 유명한 것이 양념치킨인데 후라이드로 튀긴 닭을 붓으로 하나하나 골고루 양념을 발라줍니다. 지금은 양념치킨이 흔하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쉽게 볼 수 없는 메뉴였습니다. 주로 치킨을 사러 제가 갔습니다. 주문하고 치킨을 받을 때 가지 얼마나 시간이 긴지 모릅니다. 그래도 누런 종이 봉투에 치킨을 받아 가지고 집으로 오는 길은 매우 신났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저, 여동생 네 식구가 둘러 앉아서 닭 한 마리를 순식간에 먹어 치웠습니다. 그때의 닭은 지금처럼 작지 않았습니다. 한 마리면 두툼한 종이봉투에 가득했습니다. 그래도 워낙 먹성이 좋았던 터라 한조각이라도 더 먹을 일념으로 열심히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도 치킨은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입니다. 오죽하면 친구가 말하길 제가 죽으면 치킨나라 지옥에 1순위로 떨어질 거라고 했습니다. 중학교 때 먹었던 치킨 이후로 수많은 종류의 치킨을 먹었지만 제 기억에서 가장 맛있었던 치킨은 중학교 때 먹었던 치킨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정말 그때의 치킨이 객관적으로 최고의 치킨이었을까요? 아마도 아닐 것입니다. 그 치킨이 가장 맛있었던 이유는 당시만 하더라도 치킨을 마음껏 먹지 못해서가 아닐까 합니다. 당시 치킨 한 마리는 우리집에 모처럼 있는 외식과 같은 개념이었습니다. 지금은 마음만 먹으면 제 돈으로 사 먹을 수 있습니다. 언제든 먹을 수 있으니 예전만큼 맛이 없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생선 중에 은어 또는 도로묵이라 불리는 생선이 있습니다. 이 생선 이름이 도로묵이 된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 선조는 급하게 피란을 가게 되었습니다. 피란길이라 먹을 것이 마땅하지 않았습니다. 매일 먹던 진수성찬을 먹지 못 한지 오래고 초라한 밥상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던 중 지역의 어부가 진상해서 올린 묵이라는 생선을 먹게 되었습니다. 선조는 너무 맛있어서 신하들에게 생선의 이름을 물어보았습니다. 신하들은 이 생선이 ‘묵’이라는 생선이라고 했습니다. 선조는 이렇게 맛있는 생선의 이름이 너무 초라하다고 생각하고 ‘은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답니다. 왜란이 끝나고 다시 진수성찬을 먹게 되었지만 피란길에 먹었던 은어만큼 맛있지 않았습니다. 선조는 다시 은어를 찾았습니다. 잔뜩 기대하고 먹었는데 피란길에 먹었을 때만큼 맛있지 않았습니다. 선조가 말했습니다. “도로 묵이라 해라.”

이 이야기의 출처는 정확하지 않습니다만 내용은 매우 과학적인 이야기입니다. 앞에서 말한 치킨이야기처럼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맛은 없습니다. 상황과 환경, 먹는 사람의 주관적 태도에 따라 맛이 다르게 느껴집니다. 오늘 첫 본문에는 ‘만나’ 이야기가 나옵니다. 시간 순서상으로 앞인 출애굽기에는 만나의 맛을 ‘꿀을 섞은 과자’와 같은 맛이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배를 곯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만나는 아주 맛있는 음식이었을 것입니다. 반면 민수기에는 ‘기름에 반죽하여 만든 과자’의 맛이라고 표현합니다. 만나를 매일 먹다 보니 꿀 섞은 과자가 기름에 반죽한 과자의 맛으로 떨어져 버렸습니다. 같은 만나도 상황에 따라 맛이 다릅니다.

그래서 옛 말에 시장이 반찬이다 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것을 경제 용어로 하면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효용은 쾌락의 전문용어입니다. 쾌락의 한계를 체감한다는 것인데요. 아무리 좋아하는 음식도 먹는 양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쾌락의 수치가 점점 떨어져서 나중에는 불쾌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군대에서는 이것을 이용하여 신참들을 괴롭히기도 합니다. 군대에서는 일요일에 초코파이 하나, 행군 중에 마시는 물 한모금이 어느때 보다 달지만 고참이 강제로 먹이는 냉동만두 10봉지는 괴로움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아이러니 하게도 우리의 만족은 부족에서 기인합니다. 언제나 풍요로운 사람은 자신의 풍요로움을 잘 못 느낍니다. 부족하다고 느끼던 것이 채워졌을 때 우리는 풍요함을 느낍니다. 이미 성경의 저자를 비롯해 지혜로운 선조들이 삶과 통찰력으로 깨닫고 있던 이 지혜를 심리학에서 실험을 통해 증명해 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시험이 복권에 당첨된 사람들을 오랫동안 관찰하는 것입니다. 처음 복권이 당첨되었을 때는 당연히 기쁨이 하늘을 찌릅니다. 그러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오래가지 않아 행복도가 평균으로 돌아옵니다. 심리학자들은 모든 생물에게 생존을 위해 있는 적응(adaptation)능력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감당하지 못할 시험이 오면 당장은 죽을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 적응합니다. 반면 행복한 순간도 금방 적응해서 일상처럼 됩니다. 저희가 캐나다에 와서 유나가 생기기 전까지 차 없이 지냈습니다. 슈퍼스토어에 버스를 타고 장보러 가면 가는 데 한 시간, 오는 데 한 시간 해서 잠깐 장보는 데도 반나절이 날아가는 것 같았습니다. 한 겨울에는 버스정류장까지 가서 버스를 기다리는 일이 고된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어려운 줄 모르고 살았습니다. 유나가 생기고 차를 마련했습니다. 차가 생기고 장 보러 가니 얼마나 편 한지 모릅니다. 시간을 절약할 뿐만 아니라 한번에 원하는 만큼 많이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차를 사고 나서의 즐거움이 지금까지 있지 않습니다. 차를 가진 삶에 적응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이 전도서에서 말했던 것처럼 세상을 다 가진 왕의 영화가 이름 모를 꽃 한송이의 영광만 못하다는 고백이 나오는 이유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만족을 위해 부족을 추구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럴 수도 없을 것입니다. 이미 가진 것을 내다 버릴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부족이 없는 삶은 곧 만족이 없는 삶이 되는 것이므로 저주일까요? 여기에 지혜가 필요합니다.



2. 만족이 아닌 자족

만족은 내가 느끼는 것이지만 느끼게 하는 무엇에 따라 결정됩니다. 만족이라는 말 자체를 풀어보면 ‘가득 찰 만(滿)’에 ‘발 족(足)’자를 씁니다. 부족은 ‘아니 불(不)’에 ‘발 족’을 씁니다. 특히 가득 찰 만자는 물 수자를 부수로 쓰고 평평할 만자가 붙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울퉁불퉁한 땅에 물이 가득차서 평평해진 상태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반면 부족은 이런 물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족과 만족은 내면보다 외면의 요소가 크게 작용합니다. 만족할 만한 물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부족한 가운데 있다가 만족한 수준에 이르러도 금방 적응하기 때문에 만족이 더 이상 만족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끊임없이 물을 부어서 더욱 채워야 하는 걸까요? 백만원에 만족한 사람은 새로운 만족을 얻으려면 이백만원, 천만원 점점 더 큰 만족의 외적 요건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복권에 당첨된 사람들이 행복하지 않은 것입니다. 복권을 통해 얻은 큰 자극도 결국 적응 돼버렸는데 이제 복권보다 더 큰 자극을 찾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번째 전도서 본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돈 좋아하는 사람은, 돈이 아무리 많아도 만족하지 못하고, 부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리 많이 벌어도 만족하지 못하니, 돈을 많이 버는 것도 헛되다.”

만족의 또 다른 단점은 자만과 나태를 낳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애플의 스티브 잡스는 만족이란 감정을 극도로 꺼려했습니다. 오죽하면 그는 stay hungry stay foolish라는 말을 했을까요? 부족하다고 느낄 때 사람들은 만족을 위해 움직입니다. 반면 모든 것이 만족하다고 느낄 때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더 이상 필요를 느끼지 않는데 불편하게 무엇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존 스튜어트 밀은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 중에는 배부른 돼지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만족과 부족의 원리는 단순히 물질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국의 민주화 과정을 생각해보세요. 당시 대학생들은 발전하는 경제와 나아지는 살림살이에만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자유와 평등, 국민을 섬기는 참 정부에 대한 결핍감이 있었습니다. 결국 이들이 변화를 일으키는 민주화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반면 먹고사는 것이 개선되는 것에만 만족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지금도 박정희 시대를 찬양합니다. 독재를 했더라도 국민을 먹고 살기 좋게 만들었으니 그 공이 더 크다는 논리입니다. 이들의 만족은 자만과 나태를 낳아서 더 이상 합리적이고 반성적인 사고를 무디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부족과 만족의 문제는 모든 동물에게 공통되게 적용되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다른 동물과 다른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자족입니다. 자는 ‘스스로 자’를 씁니다. 만족과 달리 외부의 요건보다 내가 기억하고 이해하고 해석하는 차원에 따라서 만족의 기쁨을 누릴 수도 있고, 부족의 괴로움을 느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마지막 본문에는 바울이 자족하는 법을 배웠다고 합니다. 여기서 자족은 헬라어로 ‘아우타르케스(αὐτάρκης)’를 씁니다. 아우타르케스는 아우타스(자신)와 아르케오(충분하다)의 합성어입니다. 즉 스스로 충분하다는 뜻입니다. 아우타스는 영어 오토의 어원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족은 만족과 달리 자율성, 주체성이 있는 단어입니다. 자율과 주체는 인간의 영역입니다. 그래서 자족은 만족과 달리 나태와 자만이 따라오지 않습니다. 자족의 비결을 배웠다는 바울을 보세요. 누가 바울을 게으르다 하겠습니까? 자만하다 하겠습니까? 자족은 주어진 삶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도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살고 계십니까?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것처럼 만족과 부족을 오가며 쾌와 불쾌에 지배되고 있습니까? 불쾌를 피하고 쾌를 얻기 위해 짐승처럼 달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바울처럼 자족의 삶을 살고 계십니까? 자신의 삶을 긍정하고 사랑하십니까?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반성을 통해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 대해 감사하고 평온함을 누리고 계십니까?

제가 보기에 많은 사람은 만족과 부족 사이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자족의 비결을 아는 사람은 소수의 사람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예수님과 바울을 비롯해 성경의 인물들 말고 자족의 비결을 아는 사람으로는 최춘선 할아버지가 생각납니다. 그분이 하셨던 말이 기억이 납니다.

“기도의 응답으로, 하나님의 축복으로

세상에 부러운 사람이 없고,

무서운 사람이 없고,

보기 싫은 사람이 없고, 얼마나 감사한지요.

부러운 것, 부러운 것 없는 사람은 사람은 법률 없이 일등 부자예요.

미운 사람이 없는 사람은 세상의 일등 권세예요.

세상 왕들의 억만 배 권세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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