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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14 19:53

[설교요약] 담과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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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과 문

(창세기 3: 17~19) 남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서, 내가 너에게 먹지 말라고 한 그 나무의 열매를 먹었으니, 이제, 땅이 너 때문에 저주를 받을 것이다. 너는, 죽는 날까지 수고를 하여야만, 땅에서 나는 것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땅은 너에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다. 너는 들에서 자라는 푸성귀를 먹을 것이다.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 때까지, 너는 얼굴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마태복음 27: 46) 세 시쯤에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부르짖어 말씀하셨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그것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뜻이다.

 

1. 단절과 담

인간은 태어나면서 분리불안을 안고 태어난다고 합니다. 태중에 아기는 엄마의 자궁 안에서 엄마와 하나로 지냅니다. 엄마의 심장이 빨리 뛰면 태아도 빨리 뛰고 엄마가 음악을 들으면 태아도 함께 듣습니다. 태아는 엄마와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엄마의 완전한 보호 속에 있다가 태어나면서 엄마와 분리됩니다. 자궁과 양수의 보호로부터 벗어나 세상으로 나옵니다. 영양분이 공급되던 탯줄이 끊깁니다. 나의 일부 혹은 전부인줄 알았던 엄마와의 분리에서부터 아기는 세상을 시작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근원적으로 분리불안을 안고 있다고 합니다.

오늘 창세기에 나오는 인류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에도 인간의 근원적인 분리불안을 담고 있습니다. 선악과를 먹기 전 최초의 인류인 아담에게는 분리불안이 없습니다. 그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동행합니다. 하와는 그의 분신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리고 에덴동산은 마치 어머니의 자궁처럼 아담이 가장 살기 좋은 환경입니다. 추위나 더위에 대한 걱정, 굶주림에 대한 걱정이 없습니다. 만약 아담이 선악과를 먹는 사건이 없었다면 지금의 인류가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도 아담은 늙지도 병들지도 않은 몸과 정신으로 에덴동산에서 매일 똑같은 하루를 보내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르는 첫 사건입니다. 선악과를 먹기 전 아담과 하와는 자신이 벗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나서부터 자신이 벗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부끄러워서 무화과나무 잎으로 몸을 가립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숨습니다. 벗고 있다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은 혼자 있을 때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혼자 옷을 벗고 목욕을 하면서 자신이 벗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부끄러워하는 분이 계십니까? 그렇지 않죠. 벌거벗음에 대한 부끄러움은 타자와의 사이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타자를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은 반대로 자의식이 생겼다는 말입니다. 아담을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선악과를 먹었다는 사실 때문에 숨었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벗고 있다는 사실이 두려워 숨었다고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부끄러워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을 가렸던 것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에 담이 생겼습니다. 최초의 인류가 자신을 돌아보고 인식하는 자의식이 생기면서부터 타자와 자신을 구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타자 앞에서 숨습니다. 타자 앞에서 숨기 위해 담을 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만이 아니라 사람과 하나님, 사람과 자연 사이에도 담이 생깁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자연도 인간으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가시와 엉겅퀴를 내고, 수고를 해야 땅의 소산을 먹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단절은 성경에서 죄의 결과로 생겼다고 말합니다. 이제 하나님 앞으로 막힌 담 때문에 아담이 선악과를 먹기 전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며 걸을 수 없습니다. 물론 간혹 에녹이나 엘리야 같은 예외가 있기는 합니다. 또한 사람과 사람사이의 단절 때문에 사람 사이에서도 외롭고 고독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자의식이 없고 나와 타자를 구분하지 않는 자연으로부터도 인간은 소외됩니다.

그리고 아담의 아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이고 집을 나와서 놋이라는 곳에서 성을 세웁니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도시가 생기면서 각 사람의 자의식뿐만 아니라 집단의식도 생깁니다. 자의식도 집단의식도 타자 혹은 다른 집단에게 배타적입니다. 무형과 유형의 담이 있습니다. 선악과를 먹고 난 이후의 인류에게 담은 자연스러운 것이 되었습니다.  이런 담은 단절을 뜻합니다. 단절은 소외와 고독을 낳습니다. 한때 하나님과 자연과 연결되어 있던 사람은 죄로 인한 단절로 고통을 느낍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고 하는데 그에게 가장 큰 고통은 무엇이었겠습니까? 손과 발에 못이 박히는 고통, 가시관이 머리를 찌르는 고통, 채찍을 맞는 고통 들도 인간 예수로서 극심한 고통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과 단절되는 고통이 가장 두려운 고통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시기 전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주님, 주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외치셨습니다. 항상 하나님과 동행하던 예수님에게 가장 큰 두려움과 고통은 하나님과의 단절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그리스도인의 목적은 다시 담이 없는 최초의 인류로 돌아가는 것인가요? 서로 벗은 체로 지내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때로 돌아가는 것인가요? 자의식이 없고 나와 타자의 구분도 없는 합일의 상태가 되어야 하는 것일까요?

노래 중에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주는 평화, 막힌 담을 모두 허셨네.”

정말 담을 모두 허무는 것이 답일까요? 사대강에 막힌 보는 당연히 허무는 것이 자연의 순리이고 답이겠지요. 사람도 그럴까요?

 

2. 연결과 문

이상적으로는 담을 모두 허무는 것이 답일 것입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것처럼 말입니다. 노래가사처럼 손에 손잡고 벽을 너머서 서로서로 사랑하는 한 마음이 되는 것이 이상적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가능할까요?

저는 자의식이 있는 한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각자 고유한 자아와 함께 그 자아를 돌아보는 자의식이 있는 한 타자와 합일은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고유한 자아와 자의식을 제거할 수 있을까요? 그것도 불가능합니다. 이미 우리 인류는 선악과를 먹고 난 이후의 인류입니다. 다시 되돌아 갈 수 없습니다. 죽어서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육신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 내쫓으시면서 그들이 자신을 가리던 무화과나무 잎을 뺏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가죽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자의식이 된 인간을 있는 그대로 보아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자아와 자의식을 가지면서 외롭고 고독한 존재로 계속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요? 하나님과 자연 사이에서 단절된 존재로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생각하신 해법이 문입니다. 담은 그대로 두고 문을 만드신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제사가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문이었습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문입니다.

여러 번 말씀드린 구절입니다만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보아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담과 문을 함부로 여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담과 문을 인정해 주십니다. 다만 담은 단절만 있습니다. 반면 문은 닫고 열수 있습니다. 문은 자의식을 가진 사람의 주권입니다. 주권이 없다면 문은 닫혔을 때는 단절, 열렸을 때는 침략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권이 있는 문은 단절이 아니라 보호, 침략이 아니라 연결의 도구입니다.

문이 없고 담만 있다면 사람의 인생은 비극일수 밖에 없습니다. 무신론적 실존주의자들이 말하는 인간이 문이 없고 담만 있는 인간입니다. 카프카의 변신에 나오는 주인공 그레고르도 결국 벌레가 되어버립니다. 가족과도 소통하지 못한 채 벌레로 죽습니다. 카뮈의 이방인에 나오는 뫼르소도 철저히 단절된 인물입니다. 담만 있고 문이 없는 인간들은 철저히 고독하고 불안한 존재입니다.

반면 그리스도인에게는 문이 있습니다. 그것도 매우 크고 튼튼한 문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의 문입니다.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문입니다. 가족과 이웃에게 나아가는 문입니다. 자연과 세계로 나아가는 문입니다. 이 문은 우리를 지키면서도 하나님과 이웃, 자연과 연결시켜 줍니다. 다만 이 문을 하나님과 이웃에게 여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닫는 것도 우리의 몫입니다. 문을 통해 나를 잘 지키면서도 타자를 잘 연결하는 것이 지혜와 능력입니다. 이러한 지혜와 능력도 그리스도인에게는 말씀과 기도를 통해 이미 주어졌습니다. 여러분들은 큰 담이 아니라 큰 문을 가지신 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큰 문을 통해 하나님과 이웃이 잘 연결되고 왕래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왕래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전해지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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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중이 2019.04.19 21:00
    내가 늘 주님을 나의 중심 가운데 모시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문득문득 깨닫는 경우는 하루에도 여러차례 일어납니다. 조급하고 나약하며 이기적인 스스로의 모습을 볼때 마다 안타까운 마음과 함께 짧고 옅은 반성을 합니다. 그나마 주님이 문을 두드리시는 것을 가끔씩 알아차리고 서둘러 문을 여는 때도 있다는 것이 참으로 감사하고 다행이라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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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 2019.04.22 17:29
    그러게요. 저도 문이 있어도 문이 있는지 모르고, 두드리고 있어도 듣지 못 할 때가 많은 것 같아요. 분주하고 바쁘고 일이 잘 풀릴때는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도 다중이님은 가끔씩이라도 알아차리시니 대단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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