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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히 여기는 마음에 담긴 하나님의 얼굴

(누가복음 10:33,34) 그러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길을 가다가, 그 사람이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가까이 가서, 그 상처에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에, 자기 짐승에 태워서,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주었다.

 (마태복음 9:36)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그들은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에 지쳐서 기운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에베소서 4:32) 서로 친절히 대하며, 불쌍히 여기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과 같이, 서로 용서하십시오.

 

1. 마뜨료나의 마음, 마뜨료나의 얼굴

톨스토이의 유명한 단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보면 구두수선공 세묜이 교회 앞에 벌거벗은 채 웅크리고 있는 미하일을 발견하고는 집으로 데리고 옵니다. 외상값을 못 받아서 외투도 못 사고, 술 까지 마신 세묜이 벌거벗은 청년을 데리고 오자 부인 마뜨료나는 불 같이 화를 냅니다. 그렇지 않아도 마뜨료나는 떨어진 밀가루를 걱정하고 있었고, 부부 두 사람이 낡은 외투 한 벌을 의지하는 신세를 한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란 작자가 새 외투는커녕 있던 낡은 외투마저도 거지 같은 청년에게 벗어주고 들어섰으니 화가 날만도 합니다.

마뜨료나는 저녁을 내오라는 남편을 무섭게 쏘아붙입니다. 줄 밥도 없고 젊은 청년 미하일은 당장 내쫓을 기세입니다. 그러나 세묜이

“마뜨료나, 당신 마음엔 하나님이 없단 말이오?”

라고 하는 말을 듣고는 잠시 화를 누그러뜨리고 청년을 바라봅니다. 그 청년을 바라보니 ‘그 사내가 차츰 가여워지면서 잘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중에 청년 미하일이 하나님이 내 주신 세 문제의 해답을 모두 깨닫고서 다시 천사로 변합니다. 천사로 변한 미하일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자는 저를 추운 밖으로 내쫓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만일 그렇게 한다면 여자는 죽고 말 거라는 걸 저는 알았습니다. 그때 남편이 여자에게 하나님 얘기를 꺼냈습니다. 갑자기 여자의 태도가 달라지더군요. 여자가 제게 저녁을 차려주면서 절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그녀 얼굴에 더는 죽음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고 생기가 넘쳤습니다. 저는 그 얼굴에서도 하나님 얼굴을 보았습니다.

마뜨료나가 미하일을 가엽게 보고 있을 때 천사 미하일은 마뜨료나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입니다.

 

2. 선한 사마리아인의 마음

오늘 본문에 보면 사마리아 인이 강도 만난 유대인을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고 나와 있습니다. 앞서 강도 만난 유대인을 그냥 지나친 레위인이나 제사장은 그런 마음이 없었습니다. 어려움 당한 사람을 도왔느냐 돕지 않았느냐 보다 먼저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을 측은하게 느끼고 공감하는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가 우선입니다.

두 번째 본문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쫓는 사람들이 목자 없는 어린 양 같이 방황하고 고생하는 현실을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죽은 과부를 불쌍히 여기셔서 그 아들을 살리시고, 소경이 된 자를 불쌍히 여기셔서 눈을 뜨게 하시고, 한센병 환자를 불쌍히 여기셔서 그 몸에 손을 대시어 고쳐 주시고, 나사로의 죽음에 눈물 흘리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함께 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다는 것은 모두 성경에서 기록하고 있는 내용들입니다. 이 점을 본다면 기적이나 이적, 누구를 돕는 성과 이전에 그들을 측은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는 사랑의 마음이 먼저일 것입니다.

지난 주 세속화로 인한 문제들을 이야기 했습니다. 세속화로 발생하는 문제가 종교형식의 문제, 형식에 대한 새로운 정의의 문제도 있지만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 문제도 있습니다. 세속화와 과학주의의 시대에 하나님은 더 이상 인격신이 아닙니다. 그러다 보니 감정도 없습니다. 사람들을 심판하거나 불같이 노하는 일도 없지만, 사랑하고 측은하게 여기는 것도 없지요. 단지 자신의 목적을 가지고 창조를 한 초월자일 뿐입니다. 그런 하나님은 우주 저 끝, 아니면 다른 우주나 차원에 계실 것 같습니다.

이렇게 멀리 계시는 하나님, 감정이 없는 신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이런 신은 우리에게 있으나마나 한 존재입니다. 물론 신이 인간의 필요에 따라 있고 없고 하는 존재는 아니겠지요. 또한 인간의 필요에 따라 캐릭터가 만들어지는 것도 우상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비인격신, 초월자로서만 존재하는 신은 이 작은 지구별에서 찰나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의미가 없습니다. 나와 저 개미집의 수많은 개미 중 한 마리보다도 못한 관계라 할 수 있습니다. 신이 우리를 향한 선한 계획이나 역사 따위는 없습니다. 고도의 지능에 의해 창조된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자연법칙입니다. 인간은 자연법칙을 찾고 깨달아서 보다 나은 삶을 영위할 뿐입니다.

그러나 자연법칙, 물리법칙으로도 어떻게 하기 힘든 마음의 문제가 있습니다. 물론 극단적인 유물론자들은 마음의 법칙마저도 알고리즘과 호르몬이라는 물리적 문제일 뿐이라 환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많은 부분에서 마음의 영역은 물리적으로 환원되지 않습니다.

제가 아는 하나님, 제가 체험한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교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순히 영적인 차원만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신으로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셨습니다. 삶을 통해 신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삶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영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영육 차원 모두에서 적용됩니다. 과거에 계셨던 분이거나 미래에 오실 분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를 포함해 지금 이 시간 가운데에도 존재하시는 분입니다. 수억 광년 떨어진 어느 별에 계신 분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마음, 지금 우리 삶의 현장 가운데 계신 분입니다. 그런 하나님만이 내 삶을 바꾸시고 나를 치유하시고 나를 새롭게 하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믿고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어떤 분이신가요?

 

3. 가족과 이웃에 대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 우리를 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느끼고 체험한 사람들은 내 가족과 내 이웃에 대해서도 불쌍히 여기고 측은히 여기게 됩니다. 보다 높고 깊은 차원으로 그들을 바라보게 됩니다. 마뜨료나가 미하일을 보는 얼굴과도 같습니다. 사람을 바라볼 때 단편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하나의 사건, 하나의 말, 하나의 모습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역사적으로 보고 맥락을 읽습니다. 그러다 보면 우리는 상대를 보다 더 깊이 이해하고 다름을 수용하고 관용하게 됩니다. 레비나스는 바로 타자의 얼굴의 고유성, 그 고유한 존재를 들여다 보는 것이 윤리의 시작이라고 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자신의 부모 모두를 수용소에서 잃었던 레비나스는 왜 전체주의의 망령이 역사 속에 등장하는지 깊이 고민했던 철학자 입니다. 그는 성경과 톨스토이 문학에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바로 사람과 사람이 얼굴과 얼굴로 만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미국에 있을 때 매우 친한 일본인 친구가 있었습니다. 이 친구를 만나기전만 하더라도 빈일 감정이 커서 일본인 자체를 싫어했는데 미국에서 만났던 일본인 친구는 참 사람이 좋았습니다. 그 친구 덕분에 도쿄에까지 놀러 가게 됐는데 차를 렌트해서 여행시켜주고 숙소까지 잡아주었습니다. 진솔하고 친절한 일본 친구덕에 일본이란 나라, 일본 정권이 저지르는 잘못과 한 개인으로서의 일본인을 구분해 생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추상적인 개념으로 쉽게 묶어서 보편화 해버리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이런 생각들이 전체주의, 인종혐오나 차별을 만듭니다.

지금 여러분 옆에 계신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세요. 주름이 얼마나 잡혔나, 점이 있나 없나를 보라는 게 아닙니다. 꼴에 담긴 얼을 바라보십시오? 저마다 하나님의 얼굴이 있습니다. 또한 저마다 시련과 상처의 세월을 견뎌온 인고가 묻어 있습니다. 그 얼굴을 측은히 여기고 불쌍한 마음을 가질 때 여러분은 하나님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마지막 본문을 읽고 예배를 마치겠습니다.

(에베소서 4:32) 서로 친절히 대하며, 불쌍히 여기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과 같이, 서로 용서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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