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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9: 1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담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가죽 부대가 터져서, 포도주는 쏟아지고, 가죽 부대는 못 쓰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가죽 부대에 담아야 둘 다 보존된다."

(누가복음 22: 39) 예수께서 나가시어, 늘 하시던 대로 올리브 산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그를 따라갔다.

(마태복음 5: 17)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

 

1. 세속화 시대의 형식과 내용

지난 주에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 하나인 에베소교회를 통해 우리의 신앙, 믿음의 열정이 왜 식는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크게 두 가지의 이유를 말씀 드렸습니다. 하나는 육체를 가진 인간으로써의 한계입니다. 지난 주 공일오비 그룹의 노랫말처럼 우리의 열정은 본능적으로 오래가기 어렵습니다. 언제나 열정이 넘치는 상태로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한 사람에게서도 그렇지만 여러 세대를 걸쳐서도 이런 현상이 나타납니다. 에베소교회도 1세대들은 누구보다 뜨겁고 열정적이었습니다. 그러나 2세대부터 그 열정이 식었습니다. 특히 성경의 사사시대는 열정과 냉정의 반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열정을 인간의 한계와 나약함으로만 본다면 끊임없이 열정을 부추기고 회복시키는 것이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교회들은 특별새벽기도회, 금요철야, 부흥회 등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만들어서 식어가는 열정에 다시 불을 지피고자 노력합니다.

그러나 둘째 문제는 쉽게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바로 세속화의 문제 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더 이상 종교가 없어도 상관 없는 시대입니다. 종교가 있다 하더라도 형식이나 예법에 얽매이지 않으려고 합니다. 오히려 예전에는 종교 없이 살 수 없는 시대였습니다. 무신론이 죄가 되고 형식과 예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 죄가 되는 시대였습니다. 물론 현대에도 일부 국가에서는 종교 없이 살아가기 힘든 나라들이 있습니다. 아직까지 천주교에서도 공식적으로는 미사에 빠지면 고해성사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현대로 올수록 점점 종교형식의 구속력은 사라져 갑니다. 다민족, 다종교 국가인 캐나다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한 개인으로써도 믿음과 열정을 지키기 쉽지 않고, 신앙의 열정을 대물림하기는 더더욱 어렵습니다. 이런 세속화 바람을 대처하는 두 가지 극단적인 방법이 있다고 했습니다. 아미쉬 공동체처럼 현대문화를 죄악시하고 분리해서 신앙공동체 안에서 살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다른 극단은 종교 없는 종교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저는 이 양극단 모두가 좋은 해답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분리하고 구분해서 자기와 공동체를 속된 것들에서 지키고자 하는 노력은 많은 보수교회들이 가지는 태도입니다. 포스트모던에 영향을 받은 문화를 배격하고, 혼전순결을 지키게 하기 위해 순결 서약식을 하고, 부흥회를 통해 식은 열정을 되살리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교회와 사회의 간극은 커지고 젊은이들은 갈등하다가 교회를 떠납니다.

반대의 경우는 어떨까요? 이들은 자신들이 하나님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린다고 생각합니다. 형식적인 종교에서 벗어나서 종교간에 갈등도 사라지고 인류애만 가진 참 자유인이 되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 생각합니다. 그것이 예수의 정신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벼룩 잡으려고 초가삼간까지 태우는 격이라 생각합니다.

이들은 형식주의를 타파한다는 생각으로 형식자체를 내다버립니다. 그리고 이것을 예수의 정신이라 생각합니다. 이들은 당대의 형식주의자들인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 사이에서 형식타파를 외친 것이 예수님이라 믿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형식주의를 배격하셨습니다. 겉과 속이 다른 형식주의를 철저히 비판하셨습니다. 그러나 형식자체를 거부하신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인간인 이상 형식이 없이는 내용을 담아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새 술을 헌 부대에 담으면 터져버린다고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말씀도 하신 것입니다. 술이 내용이라면 술을 담는 부대는 형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대를 없애버리자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시대에 맞는 새 부대(새로운 형식)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본인 또한 일정한 습관을 쫓아 기도하시고 공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새 부대의 필요성을 말씀하셨고 바울은 새 부대를 준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개신교의 등장은 새 부대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던 시기라 생각합니다. 저는 세속화 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은 더더욱 새 부대가 필요한 시대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쉽지 않습니다. 역사 속에 등장 했던 새 부대들은 하나 같이 규격화 된 부대들이었습니다. 다만 규격이 바뀌었고, 재질이 바뀌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오늘은 하나의 규격으로 내용을 담기가 어렵습니다. 포스트 모던의 열풍을 쬐고 나온 현대는 다양성을 추구하고 하나의 규격을 거부 합니다. 그러나 저마다 형식이 다르다면 그것은 형식이라 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지난 설교 처음부터 정답은 없다고 말씀 드린 것입니다. 다만 제 나름의 생각을 말씀 드릴 뿐입니다. 오늘 설교제목에 있는 사막여우는 유명한 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 왕자에 등장하는 여우입니다. 이 소설에서 등장하는 어린 왕자와 여우를 통해 세속화 시대의 형식에 대해 생각해 볼까 합니다.

 

2. 어린왕자와 여우

어린 왕자는 대부분 읽어 보셨을 것입니다. 간단한 내용은 이렇습니다. B612라는 소행성에 사는 어린 왕자가 여러 별들을 거쳐 지구에 옵니다. 화자인 비행사는 사하라 사막 한 가운데서 불시착해 초조한 하룻밤을 보낸 다음 날 어린 왕자를 만나게 됩니다. 어린 왕자를 통해 어린 왕자가 살던 별의 이야기, 자신의 별에서 만난 장미와의 이야기, 그리고 지구를 오기 전까지 들렀던 별들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리고 지구에 와서는 장미 화단에 무수히 피어 있는 장미들을 보게 됩니다. 무수한 장미들을 보고 어린 왕자는 생각합니다.

이제까지 나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꽃을 가지고 있어서 부자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꽃이 그저 평범한 장미 한 송이였다니…… 겨우 내 무릎 높이의 화산 세 개, 그것도 한 개는 불을 뿜지 않는 휴화산이라니. 이것만으로는 내가 위대한 왕자라고 할 수 없어……

울고 있는 어린 왕자에게 사막 여우가 나타납니다. 슬프고 외로운 어린 왕자는 여우와 놀고 싶어졌습니다. 그러나 여우는 그럴 수 없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길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여우가 말합니다. 어린 왕자는 길들이는 것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그런데 여우는 뜬금 없이 사냥꾼과 닭을 이야기합니다. 자신은 닭을 쫓고, 사냥꾼을 자신을 쫓는다고 말하죠. 자신의 필요에 따라 일방적으로 쫓는 관계는 길들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려 하는 것 같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묻습니다.

“너는 닭을 찾고 있니?”

“아니, 난 친구를 찾고 있어. 그런데 ‘길들인다.’라는 게 무슨 뜻이야?”

“이제는 많이 잊힌, ‘관계를 맺는다.’라는 뜻이야.”

“관계를 맺는다고?”

“그래. 지금 너는 나에게 수많은 아이와 다름없는 작은 소년에 지나지 않아. 나도 너에게 수많은 여우 중 하나에 지나지 않으니까. 하지만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우리는 서로 필요한 존재가 되는 거야. 나한테 너라는 존재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사람이 되는 거고, 너한테 나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여우가 되는 거니까.”

길들인다는 것, 관계를 맺는다는 것, 이미 지금은 많이 잊혀진 것은 곧 사랑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세상에 많은 사람들과 많은 만남이 있지만 우리가 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하는 사람, 다시 말하면 길들이고 길들여진 관계에서만 서로를 알 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관계뿐 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길들이고 길들여진 것 즉 사랑하는 만큼 알게 되는 것이고, 의미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우가 말합니다.

“하지만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내 생활은 달라질 거야. 그러면 수많은 발소리 중에 네 발소리를 구별하게 될 거야. 다른 소리는 나를 땅속 깊이 숨게 하지만, 네 발소리는 마치 음악 소리처럼 나를 밖으로 불러낼 거야. 그리고 저기 밀밭이 보이지? 난 빵을 좋아하지 않아. 밀은 나에게 아무 필요가 없거든. 그래서 그래서 밀밭을 바라봐도 나는 아무 생각도 느낌도 없어. 그건 슬픈 일이지. 하지만 아름다운 황금빛 머리카락을 지닌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밀밭은 내게 아주 근사한 광경으로 보일 거야. 밀밭이 황금물결을 이룰 때 네가 기억 날 테니까. 그러면 나는 밀밭을 스쳐 지나는 바람 소리마저도 사랑하게 될 거야.”

 여우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던 밀밭이 어린 왕자를 통해 의미가 부여되듯 사랑을 하게 되면 세계가 넓어지고 의미가 풍성해집니다. 상대가 클수록 세계도 넓어지고 더욱 많은 것에 깊고 다양한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성장입니다. 그런데 길들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남았습니다.

여우는 일단 길들이려면 인내심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일단 처음에는 멀리 떨어져서 자신을 바라보라고 합니다. 많은 말은 하지 말라고 합니다. 길들여지지 않은 상태에서 말은 오해의 근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매일 매일 조금씩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일정 시간에 찾아가는 것입니다. 매일 4시에 온다면 여우는 3시부터 한 시간 뒤에 찾아올 어린 왕자로 인해 행복해 질 거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의식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네가 아무 때나 온다면 언제부터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지 모르잖아. 그래서 의식이 필요한거라고.”

“의식이 뭐야.”

“이것도 많이 잊은 건데, 의식이라는 것은 어느 날을 평소와 다르게, 어느 시간을 평소의 시간보다 특별하게 만드는 거야.”

저는 사랑을 표현하기 위한 의식이 곧 기독교의 형식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주일성수나 예배의 시간도 마찬가집니다. 오로지 의무감만 남은 주일성수는 형식주의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형식주의를 타파하기 위해 주일성수를 없애야 할까요? 저는 안식일에 대한 신의 명령과 불복종에 따르는 죄에 대한 두려움이 주일성수를 규정하는 시기는 지났다고 생각합니다. 여우가 말하는 사랑의 의식으로써 주일성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속화 시대의 형식은 자발적이고 자율적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회복 보다 갱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날마다 새롭고 날마다 더욱 깊어져 가고 성숙해 가야 합니다.

제가 잠깐 밖에 나갔다가 집에 들어가면 유나는 미친 듯이 소리지르며 발을 동동 구르면서 달려 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모릅니다. 그러나 잠깐 뒤 유나가 좋아하는 동영상을 못 보게 하거나 몸에 좋지 않은 간식을 못 먹게 하면 울면서 때를 쓰고 “아빠 아니야!” 합니다. 지금은 어리니 사랑스럽게 넘길 수 있지만 유나가 스무 살이 되어서도 저런다면 어떨까요?

관계는 회복만이 아니라 계속 새롭게 갱신이 필요합니다. 더욱 성숙하고 깊은 차원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려면 여우가 말한 것처럼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복종에서 나오는 인내심이 아니라 자발적 인내심입니다. 성숙한 사람의 자율에서 나오는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이 인내심으로 사랑하는 이를 위해 의식을 하는 것, 즉 어느 날을 평소와 다르게, 어느 시간을 평소의 시간보다 특별하게 만드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여우는 어린 왕자와 헤어지기 전에 세 가지의 비밀을 알려줍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단다.”

“네 장미를 소중하게 만드는 것은 네가 장미에게 들인 시간이야.”

“네가 길들인 것에는 언제까지나 책임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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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중이 2019.03.25 20:46
    인간관계에 있어서 이런 아름답고 순수한 모습들이 이젠 시대에 뒤떨지고 경쟁에서 도태되는 나약하고 비효율적인 존재들의 특징처럼 인식 되어 버린듯 합니다. 하지만 어느 시대에서도 그 시대에 맞는 인간관계를 지향하되 인내하며 갱신하는 자세를 잃지 말아야 된다는 것만은 변함이 없으리라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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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에르 2019.03.27 21:17
    그렇죠. 새술은 새부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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