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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사랑의 하나님이신가?

(신명기 20: 16~18) 그러나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유산으로 주신 땅에 있는 성읍을 점령하였을 때에는, 숨쉬는 것은 하나도 살려 두면 안 됩니다.

곧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명하신 대로 전멸시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그들의 신을 섬기는 온갖 역겨운 일을 당신들에게 가르쳐서, 당신들이 주 당신들의 하나님께 죄를 짓게 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28, 29)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면, 여러분은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약속을 따라 정해진 상속자들입니다.

 

1. 사랑의 하나님이신가?

오늘 설교는 신학적 논의와 난제들을 많이 포함하고 있습니다. 최대한 신학 전문용어나 복잡한 이론들을 배제하고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내용까지 다 다루려면 한편의 설교가 아니라 시리즈로 강의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약간의 오해의 여지가 있다 하더라도 단순하게 설명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에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까?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까? 아마 여기 계신 분들은 모두 그렇다고 대답하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첫 본문인 신명기를 살펴 보면 정말 하나님께서 사랑의 하나님이신지 의심이 갑니다. 우리가 읽었던 본문보다 조금 더 넓게 살펴 보겠습니다. 먼저 앞장인 19장 21절에는 당신들은 이런 일에 동정을 베풀어서는 안 됩니다. 목숨에는 목숨으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손에는 손으로, 발에는 발로 갚으십시오." 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눈 에는 눈, 이 에는 이”와 같은 뜻입니다. 이것을 동해보복법이라고 합니다. 당한 그대로 되갚아 주는 법을 말합니다. 이미 모세보다 약 400년 이전에 있었던 바벨론의 함무라비 법전에 기록되어 있는 법과 유사합니다. 당한 그대로 보복하는 법에는 인정이나 사랑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전쟁법은 더욱 잔인 합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이민족과의 전쟁에 관한 법들 중 일부 입니다. 20장에 나타난 전쟁법에는 이런 기록들이 있습니다.

첫째, 적이 저항하지 않고 항복하고 성문을 열 경우는 그 성읍 사람들을 종으로 삼습니다.

둘째, 적이 저항할 경우는 남자들은 모두 죽이고, 여자, 아이, 가축 그 밖에 성에 있는 모든 것은 전리품이 됩니다. 이 전리품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합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주신 가나안 땅의 족속들은 모두 진멸합니다. 남녀노소뿐만 아니라 짐승까지 숨쉬는 것은 모두 죽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입장에서는 자기 민족을 너무 사랑하셔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가나안 땅을 가지고 말썽이 생기지 않도록 하신 명령이라 생각 하겠지요. 그러나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족속들에게는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모릅니다. 아마도 이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 말고는 사랑하지 않으셨나 봅니다. 그리고 가나안 족속들을 진멸하는 명시적 이유는 18절에 나오는데요. 그들이 그들의 신을 섬기는 온갖 역겨운 일을 당신들에게 가르쳐서, 당신들이 주 당신들의 하나님께 죄를 짓게 할 것”이기 때문이랍니다. 이렇게 본다면 당시 이스라엘의 야훼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부족신과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이런 표현들이 다른 곳에서도 종종 발견됩니다.

반면 신약시대 특히 바울서신들을 보면 하나님은 확실히 유일신으로 등장합니다. 오죽하면 다신교를믿는 그리스인들이 유일신을 믿는 바울을 무신론자라는 죄명으로 죽이려고 했겠습니까? 그렇다면 둘 중 하나로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입니다. 이런 의문은 이미 오래 전부터 학자들 사이에 있어왔던 질문입니다. 이스라엘 부족신인 구약의 하나님과 인류보편의 유일신인 신약의 하나님이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구약의 부족신인 야훼 하나님은 끊임없이 타민족, 그리고 타민족 신들과 싸웁니다. 물론 구약은 유대인들의 기록이니 언제나 이기는 것은 야훼 하나님입니다. 유대인들이 시련을 겪거나 전쟁에 지는 것은 야훼 하나님이 약해서가 아니라 자기백성 이스라엘이 죄를 회계하고 깨우치게 하기 위해 내버려 두신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야훼는 부족신들 중 싸움짱입니다. 그러나 인류 보편적인 사랑의 하나님이신지는 모르겠습니다.

 

2. 악동 하나님이신가?

다른 하나는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이 한 분 이라는 가정입니다. 다면 구약시대에는 선민을 위주로 사랑하다가 예수 이후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만 사랑하는 걸로 바뀌셨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여기에 예정까지 더해집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일찍부터 하나님께서 콕 찍어서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예정까지 더해져 문제는 더욱 어려워집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을 로마서 9장 20, 2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오, 사람아, 그대가 무엇이기에 하나님께 감히 말대답을 합니까? 만들어진 것이 만드신 분에게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하고 말할 수 있습니까? 토기장이에게, 흙 한 덩이를 둘로 나누어서, 하나는 귀한 데 쓸 그릇을 만들고, 하나는 천한 데 쓸 그릇을 만들 권리가 없겠습니까? 신이 피조물을 만들어서 어떻게 쓰든 따지지 말라는 이야기 같습니다. 그런데 위의 본문 후반부를 보면 바울의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진노의 잔을 받아야 할 사람들을 하나님의 의지와 주권으로 사랑해주신 것을 설명하기 위해 이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예정론자들, 제한구원설을 따르는 사람들은 이 말씀을 자신의 이론을 변호하는 데 사용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하나님은 우리 기준에서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하기 어렵지 않을까요?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십니다. 그리고 그 후손들이 어디서 어떻게 태어나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지도 다 아십니다. 이들의 논리대로라면 예수를 모르거나 부정하는 사람도 정해져 있고, 죄를 짓고도 회계하지 않고 죽을 사람도 하나님께서 다 아시겠지요. 반면 예수를 믿고 죽을 사람들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예정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이 죄 중에 살다가 지옥에 가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고, 예수를 믿고 천국에 가는 것도 하나님의 뜻일 것입니다. 물론 이런 말을 하면 예정론자들은 죄를 짓는 것은 인간의 책임이라고 반박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내다보실 뿐 숙명론이나 결정론이 말하는 것처럼 기계적 인과관계에 묶여있는 것은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미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을 만드셨다면 그 책임이 피조물에게 있는 건가요? 하자가 있는 피조물을 만든 창조주에게 있는 것인가요?

이렇게 따지면 그들은 위의 로마서 9장 20, 21절을 되뇌곤 합니다. 신이 자기가 만든 것을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신의 주권이지 피조물 주제에 왜 따지느냐 힐문합니다. 사실 신이 그렇다면 피조물인 우리들은 뭐라 따지겠습니까만 이들이 말하는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의 하나님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런 생각들이 역사 가운데서 얼마나 참혹한 결과를 가져왔는지 모릅니다. 종교를 빌미로 한 수많은 전쟁들이 위의 논리로 기독교가 아닌 이민족들을 잔혹하게 학살했습니다. 십자군 원정이 그랬고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에서도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노예로 삼았습니다. 서구 기독교인들에게는 이들은 신에게 선택 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들이 저주 받은 함의 후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들이 노예가 되어서 잔혹한 학대를 받고 죽어가는 것도 그들 선조의 죄값이라 생각하기도 합니다. 지금도 선민사상을 신봉하고 있는 이스라엘은 그들의 이웃과 참혹한 전쟁을 벌입니다.

이런 하나님은 선택 받았다고 믿는 소수의 사람들에게는 사랑의 하나님처럼 보이겠지만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재앙이나 다름 없습니다. 한국교회는 이런 논리에 익숙합니다.

 

3. 사랑의 하나님

제가 아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자신의 숨결을 불어 넣어주셨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신의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주체의 자유의지와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더 이상 신적 속성이 작용하지 않는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저는 인간의 죄가 신의 속성을 없애버릴 만큼 강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맹자는 이런 마음을 측은지심(惻隱之心)이라 했습니다. 물론 생물학자나 과학자는 거울 뉴런 때문에 생기는 일이라 할 수도 있고, 진화의 과정에서 생겼다고도 하겠지요. 예정론자들과 다른 이유로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없다고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인간에게 사랑과 자유의지, 자유의지의 결단으로 인한 믿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왜 신명기의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의 하나님과 다른 모습일까요?

일단 신명기는 구약의 주요 네 가지 문서 J.E.D.P 중 D(Deuteronomy)문서 입니다. D문서는 부족신 야훼의 명령에 순종하면 복을 받고 거스르면 벌을 받는다는 내용이 주제입니다. 그리고 강한 민족주의, 합법적 성소에서 예배에 대한 강조, 선민의식 등이 주 내용입니다. 그러다 보니 선민이라 자부하는 유대인을 제외한 다른 민족들은 안중에 없습니다. 점령의 대상이거나 이방인일 뿐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D문서의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 부족신 하나님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 마디로 이 문서는 유대 근본주의자들의 문서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문서에도 장점은 있습니다. 나와 우리 민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 때 우리민족이 일본의 압제하에 있을 때 D문서는 큰 힘이 됩니다. 우리를 압제하고 괴롭히는 이민족 일본을 멸하고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을 생각할 때는 큰 힘이 되겠지요. 사실 이 문서가 쓰여졌다고 보여지는 시대가 강대국의 위협을 받고 있던 북 이스라엘, 남 유다의 말기 때라 추정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강대국, 제국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정복을 정당화 하는데 악용될 우려가 높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신관은 아직 좁은 세계관에 갇혀 있을 때의 신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나서만 하더라도 D문서와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입니다. 바벨론의 수도 니느웨 성읍 사람들이 요나의 외침에 회계를 하고 멸망을 모면합니다. 그러나 적국의 수도인 니느웨가 멸망하지 않은 것이 요나는 못마땅했습니다. 그런 요나에게 하나님께서 박넝쿨을 자라게 해서 그늘을 만들어 주십니다. 요나는 기분좋게 그늘에서 니느웨가 혹시 멸망하지 않나 보고 있는데 금새 박넝쿨이 시들어 버리고 맙니다. 요나는 대뜸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이런 요나서 맨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나 4: 10, 11) "네가 수고하지도 않았고, 네가 키운 것도 아니며, 그저 하룻밤 사이에 자라났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식물을 네가 그처럼 아까워하는데, 하물며 좌우를 가릴 줄 모르는 사람들이 십이만 명도 더 되고 짐승들도 수없이 많은 이 큰 성읍 니느웨를, 어찌 내가 아끼지 않겠느냐?"

이 말씀은 신명기의 말씀과 확실히 대비가 됩니다. 요나 기자가 본 하나님은 유대인이나 비유대인이나 모두 사랑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이런 사상이 신약에 이어집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인 갈라디아서에 나타납니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 보면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예수 안에서 민족이나 인종의 경계, 성별의 경계, 신분의 경계가 없다고 선언합니다. 29절에는 예수 안에서 모두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하나님의 상속자라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신명기 저자와 바울은 다른 신관을 가진 것일까요?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의 저자들도 결국 인간입니다. 시대의 시간의 제약, 경험의 한계 안에서 자신이 체험하고 믿는 하나님을 고백합니다. 이들이 고백하는 하나님은 각각 성격과 모습이 다릅니다. 왜냐하면 육체를 가진 인간은 하나님께서 각자들에게 현현하시는 모습 안에서만 하나님을 체험할 뿐입니다. 누구도 하나님의 전부를 알 수 없습니다. 이미 성경의 저자 바울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합니다.”

신명기 저자는 자신이 만난 하나님을 보편화 절대화 하는 우를 범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일개 부족신으로 전락시켜버렸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만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체험한 하나님의 모습과 조금만 다르면 이단으로 정죄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역사는 많은 퇴행 속에서도 점차 발전해 왔습니다. 아브라함, 욥이 등장하는 족장시대에 비해 신명기 저자의 시대는 퇴행한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바울에 이르러서는 오늘 본문에서 보시듯이 보다 발전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4. 예수 안에서?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도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합니다. 일단 신명기 저자와 달리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다고 고백하고 있지만 한가지 전제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 안에서”라는 말입니다. 29절에는 “예수에 속한 사람”이라는 제한이 있습니다. 이것을 너무 가볍게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신약 이후 지금까지 기독교 세력과 비기독교 세력의 대결구도를 만듭니다. 그리고 종교라는 미명아래 수많은 학살과 학대가 방조되어 왔습니다.

신명기 문서를 신봉하는 유대인들이 선민과 이방인을 나누어 차별했던 것처럼 신약시대에서는 그리스도인과 이방인으로 나누어 차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역사 가운데 오셔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신 희망의 상징인데 그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절망이 되어 버렸습니다. 2000여년 전 예수님은 유대 땅과 그 주변에서만 활동하시다가 돌아가셨는데 예수를 모른다는 이유로 지옥행 열차를 타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인류의 구원자일까요? 자신이 선택한 극소수의 구원자일까요? 저는 예수님 당신도 이런 상황을 원하지 않으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엄격한 유대율법과 달리 자유로운 모습을 많이 보이셨습니다. 배고픈 제자들이 안식일 날 밀이삭을 까서 먹는 것을 그냥 두셨고, 여자들과 어린 아이들, 이방인들과 어울리셨습니다. 그렇다고 어려운 사람들과만 어울리신 것이 아니라 니고데모와 같은 바리새인들, 로마 군인들과도 스스럼 없이 만나시고 이야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달리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형식주의를 넘어서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당시 근본주의 유대인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말씀들을 하셨습니다. 대표적으로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 염소와 양의 비유들이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리기 원하셨습니다. 자유 안에서 참 사랑을 느끼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를 따른다는 무리들이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이분법으로 하나님을 대신해 판관 노릇을 하려고 합니다. 예수의 뜻과 정신을 따라 살기 보다 예수라는 이름을 아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예수 안에서”, “에수에 속한 사람”이 정말 예수의 이름과 역사를 아는 사람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의 가치, 정신과는 무관한 삶을 살면서 그의 이름을 주로 고백만 하면 “예수에 속한 사람”이 되는 걸까요? 이들은 분리할 수 없는 믿음과 행위를 인위적으로 분리해서 믿음을 행위 위에 놓았습니다. 그리고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믿음 없는 사람들,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이라 매도합니다. 하나님께서 값 없이 주신 은혜를 공로로 얻으려는 사람이라 비판합니다.

좋습니다. 하나님께서 조건 없이, 값 없이 사랑으로 주신 은혜인데 왜 당신들에게만 적용합니까? 당신들은 은혜 받기로 예정 되었고, 다른 사람들은 은혜 못 받는 걸로 예정 되었다고요? 이런 사람을 보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되어버린 사람인 것 같습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사랑의 전령이 아니라 지옥과 공포의 전령입니다. 예수 이름 안 믿으면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영원한 불 속에 활활 타오를 것이라 협박합니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외치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마치 스토커가 스토킹 대상에게 날 사랑하든지, 아니면 내 손에 죽든지 하는 소리를 듣는 것 같아 섬찟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십니다. 예수님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도 베드로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어 줍니다.”  여러분 사랑 빼고 하나님에서 다 안다고 말하면 그 말은 하나님을 모른다는 말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알고 다른 곳은 좀 모르셔도 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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