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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사람 도마

(요한복음 11:16) 그러자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동료 제자들에게 "우리도 그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고 말하였다.

(요한복음 14:5) 도마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우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

(요한복음 20:25~29)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보았소" 하고 말하였으나, 도마는 그들에게 "나는 내 눈으로 그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도마도 함께 있었다. 문이 잠겨 있었으나, 예수께서 와서 그들 가운데로 들어서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말을 하셨다.

그리고 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서 내 손을 만져 보고,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래서 의심을 떨쳐버리고 믿음을 가져라."

도마가 예수께 대답하기를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하니,

 

1. 칼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

유명한 과학철학자 칼 포퍼는 그의 명저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학문이 가능하려면 반증가능성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쉽게 말해서 언제든 누구든 합리적 반박의 가능성이 열려있는 주장들이 참된 진리로 나아가는 학문의 길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런 그의 주장은 경험에서 나왔습니다. 그는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을 발표하는 것을 직접 지켜 본 사람입니다. 뉴턴의 고전물리학이 과학계를 지배하고 있던 시절에 아인슈타인의 주장은 많은 과학자들에게 황당하게 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후 에딩턴의 실험에 의해 상대성이론이 증명이 되고 학계의 정설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다시 말하면 뉴턴의 고전물리학이 아인슈타인의 반증에 의해 깨진 것이고 에딩턴의 검증을 통해 확증된 것입니다.

포퍼는 힘이나 권위가 아니라 합리적 이성과 지성을 통한 검증과 반증을 통해 과학적 이론이 정립되고 발전하는 것을 보면서 매료되었습니다. 사실 그 이전에 칼 포퍼는 나치의 웅변, 프로이트나 아들러의 심리학 등을 보면서 많은 회의가 들었습니다. 모두가 하나같이 강력한 권위를 내세우거나, 아전인수격 해석을 통해 반증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반증을 허락하지 않는 것들은 검증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포퍼는 종교 또한 반증이 불가능한 영역이라고 보았습니다. 종교는 우리가 합리적으로 논하기 힘든 신비의 영역을 말하거나, 종교적 권위로 선포할 뿐 반증이 가능하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이와 같이 언제나 누구에게나 반증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사회가 열린 사회라고 이야기합니다. 열린 사회가 될 때 사회는 발전하고 지식의 발전이 가능하며 진리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반면 반증을 허락하지 않거나, 반증 불가능한 이야기들만 무성한 사회는 닫힌 사회라고 지적합니다. 바로 닫힌 사회가 열린 사회의 적이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본다면 포퍼에게는 기독교도 열린 사회의 적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모습을 본다면 포퍼의 주장과 비판이 그대로 교회에 적용 되는 것 같습니다. 언제나 교회는 무조건 적인 믿음을 강조하고 의심이나 회의를 죄악시 해왔습니다. 즉 반증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의심을 미연에 차단해 버리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도마에 대해서도 의심해서 책망받은 제자로 아는 분들이 다수일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참 기독교는 닫힌 사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역사적인 기독교, 오늘날의 기독교를 보면 포퍼의 말이 사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종교회의와 종교재판들이 반증을 억압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점에서 갈릴레이의 종교 재판은 기독교가 닫힌 사회라는 것을 인정하는 상징적인 사건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닫힌 사회를 고집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특히 사복음서는 혁명적이라 할 수 있고 기존의 상식과 고정관념을 뒤집는 반전이 있습니다.

저는 도마를 통해서 믿음에 대해, 그리고 의심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2. 도마, 믿음의 변증법

아마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도마’하면 제일 먼저 떠올리는 것이 ‘의심하다가 책망 받은 제자’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도마에 대해서는 앞서서 다른 기록들이 있습니다.

먼저 요한복음 11장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요단강 동편에 계시다가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강을 건너 유대지역 돌아가시려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말립니다. 요단강 동편으로 건너 온 것도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한 유대인들을 피해 온 것인데 다시 돌아가면 십중팔구 돌에 맞아 죽을 것이라 생각해서였습니다. 그런데 다른 제자들과 달리 도마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도 그와 함께 죽으러 가자"

도마는 예수님을 따라 죽을 각오를 할 정도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이만한 믿음이 있으신가요?

다음 장면은 최후의 만찬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근심 어린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지상명령을 내리고 자신이 곧 제자들에게서 떠날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길은 제자들이 따라오지 못할 길이라 말합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왜 내가 따라갈 수 없습니까? 나는 주님을 위하여서는 내 목숨이라도 바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베드로에게 새벽닭이 울기 전에 세 번 자신을 부인할 것이라 말합니다. 그리고서는 자신이 먼저 가서 처소를 예비하고 다시 제자들을 데리러 돌아 올 것이라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도마는 선뜻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이 어디를 가시는지, 왜 자신들은 지금 당장 따라 올 수 없는지, 그리고 자신들을 위해 처소를 예비하겠다는 곳은 어디인지 무엇 하나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도마뿐만 아니라 베드로를 비롯해 모든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도마만 이 궁금증을 가지고 질문을 합니다.

"주님, 우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계속 선문답을 하십니다. 그리고 더 많이 말하지 않겠다고 말하십니다. 도마는 마음이 무척 답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잡히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으셨습니다. 도마는 그 동안 예수님이 하신 말이 모두 물거품으로 돌아갔다고 느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이 아주 중요한 어딘가를 먼저 가서 제자들을 위한 처소를 예비하겠다고 하셨는데 가시기도 전에 돌아가셨으니 말입니다. 그렇게 낙망하고 있는 도마에게 소문이 들려 왔습니다.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도마는 믿을 수 가 없었습니다.

"나는 내 눈으로 그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소!"

나중에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직접 오셔서 자신의 옆구리와 손의 못자국을 만져보게 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도마가 의심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의심한 도마를 내치거나 나무라지 않으시고 실재로 못자국과 옆구리를 만지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도마의 의심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그리고 저렇게 의심하는 것은 나쁜 것이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한 세계, 이해하지 못한 차원을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못 알아 들은 채로 그냥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집요하게 물어보고 따져서라도 알려고 하는 도마의 자세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도마에게 직접적인 증거를 몸소 보이시는 예수님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3. 믿음1에서 믿음2로

우리도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계신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럴 때 그 질문을 회피하지 마시고 끝까지 묻고 따지는 것은 나쁜 자세가 아닙니다. 물론 큰 지혜와 깨달음이 있어서 애써 따지지 않아도 믿어지고 이해되면 좋겠습니다만 지혜가 부족한 인간이 항상 그럴 수 없지요. 지혜가 부족해서 깨달음이 오지 않아서 이해되지 않는 것은 따지고 물어야 합니다. 의심하고 희의도 해야 합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 치명적인 것은 이러한 회의나 의심이 아닙니다. 무관심입니다. 말씀으로는, 자신의 믿음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세상 곳곳에 벌어지는데도 관심이 없습니다. 가끔 자신에게 어려움이 찾아오면 따지거나 대들기도 하지만 대체로는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미워하거나 의심하지 않지만, 사랑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 믿음에 대한 생각이 없습니다. 연예인들이 그런 말들을 하지요. 악플보다도 무플이 더 무섭다구요. 이 경우가 딱 그렇습니다.

 자신을 즐겁게 할 것들, 자신의 욕망을 채울 것들에만 관심이 쏠려 있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만나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반대는 불신이 아니라 무관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로마서 1장 17절에 “믿음으로 믿음에”이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치 동어반복을 하는 것 같아서 개역개정 이후의 번역서들은 이것들을 나름의 해석을 통해 의역을 하고 있습니다. 영어성경도 킹 제임스 버전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의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헬라어 성경에는 “믿음에서 믿음으로”라고 써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이 동어반복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앞의 믿음과 뒤의 믿음이 다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임의로 앞의 믿음을 믿음1이라고 하고, 뒤의 믿음을 믿음2라고 하겠습니다. 믿음1의 단계는 주체가 의지를 가지고 믿음의 결단을 하는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입니다. 머리로 다 이해가 되지 않지만 말하는 그 분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있어서 그의 말씀대로 결단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1 입니다. 그렇게 이해하지 못했지만 믿음의 실천을 하게 될 때 그 실천에 따른 증거들이 나타납니다. 증거들을 통해 비로소 이해하게 됩니다. 이런 체험을 통해 증거가 있는 믿음 보다 확고한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믿음2 입니다. 이것은 일회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도전 받습니다.

그러나 믿음2로 나아가기 위한 믿음1을 가지기 위해서는 때로는 적극적으로 의심하고 회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도마는 그러한 의심을 통해서도 믿음2를 체험했습니다. 자신이 어릴 때부터 믿고 있는 알량한 믿음을 고집하는 사람은 새로운 도전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회의와 의심이 오기도전에 뿌리칩니다. 자신의 마음을 편할지 모르지만 간장종지와 같은 믿음의 크기에서 자라지 않습니다. 자라는 믿음, 즉 믿음의 변증법에는 언제나 반증가능성이 있습니다. 회의와 의심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무관심한 사람보다 자신에게 따지고 묻는 사람에게 나타나십니다. 이미 믿음의 선조들은 이러한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는 체험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의심과 회의를 통해서라도 주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정작 무관심한 사람들이야 말로 믿음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관심이 없으니 의심하거나 회의 할 일도 없습니다.

여러분, 의심과 회의를 두려워하거나 피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끝까지 묻고 또 물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면 도마에게 못자국과 옆구리를 보이셨던 것처럼 답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좋아하든 미워하든 관심을 가지십시오. 오히려 지금 여러분에게 하나님과 말씀이 관심이 없는 것이 되어 있지 않은가 돌아 보십시오. 의심과 회의보다 치명적인 것이 바로 무관심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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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중이 2018.11.28 22:39
    건강하고 발전적인 신앙을 위한 귀중한 말씀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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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에르 2018.11.29 16:56
    앗! 홈피 1위에 빛나는 다중이님께서 다시 등판하셨군요.ㅎㅎ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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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중이 2019.03.25 20:40
    그로부터 4개월이 흘렀군요 ㅎㅎ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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