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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기도

(누가복음 5:15~16) 그러나 예수의 소문이 더욱더 퍼지니, 큰 무리가 그의 말씀도 듣고, 또 자기들의 병도 고치고자 하여 모여들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외딴 데로 물러가서 기도하셨다.

(누가복음 6:12~13) 그 무렵에 예수께서 기도하려고 산으로 떠나가서, 밤을 새우면서 하나님께 기도하셨다.

날이 밝을 때에, 예수께서 자기의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다. 그는 그들을 사도라고도 부르셨는데,

(누가복음 22:39~41) 예수께서 나가시어, 늘 하시던 대로 올리브 산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그를 따라갔다.

그 곳에 이르러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여라" 하신 뒤에, 그들과 헤어져서, 돌을 던져서 닿을 만한 거리에 가서, 무릎을 꿇고 이렇게 기도하셨다.

 

  1. 위기의 기도, 위기의 사람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도가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사라져가는 기도의 위기라 할 수 있지만 사실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의 위기입니다. 기도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는 저에게도 기도는 어려운 주제입니다. 기도에 대해 지식적으로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기도를 성실히 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를 포함한 많은 기독교인들이 언제부터 기도를 제대로 하지 않게 되었을까요?

데카르트가 등장하면서 의심할 수 없었던 것들을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의심을 용납하지 않았던 최후의 권위가 신입니다. 물론 데카르트는 방법론적으로만 의심하다가 다시 신의 존재를 증명하게 됩니다만 그의 후배들은 좀 더 과감하게 나아갑니다. 칸트에 이르러서는 신을 예지계로 추방시켜 버렸습니다. 칸트는 세계를 현상계와 예지계로 구분했습니다. 현상계는 우리의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세계입니다. 육체를 가진 인간은 오감을 통해서 보편적인 지식을 습득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우리 몸의 구조 즉 생각의 구조가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신은 우리의 오감으로 알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현상계에서 신이 설 자리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칸트 이후 더욱 극단적인 후배들은 오직 현상계만 인정했습니다. 이들이 곧 유물론자들입니다. 칸트 이후로 점점 대세가 되어가는 유물론, 과학실증주의 등은 신을 학문의 영역에서 몰아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신학에서는 두 가지 대응이 나왔습니다. 하나는 슐라이어마흐를 필두로 하는 주관주의 신학입니다. 이제 중세처럼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신학적 진리를 학문에서 논할 수 없게 되자 보편적인 교리보다 개인의 종교감정, 체험 등을 중시하는 풍토가 생겼습니다.

두번째로는 비신화화 운동과 역사적 예수 연구입니다. 성경을 현상계인 역사 안에서 해석하려는 시도입니다. 예지계이며 비과학적인 신화나 기적은 철저히 제외시키고 역사 안에서 성경을 탐구하고자 하는 노력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신자유주의 신학의 성과들을 받아들입니다. 신자유주의 신학은 점점 발전하는 문명과 과학을 수용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말씀의 신비와 능력, 기도의 능력은 간과했습니다. 이런 것들도 비신화화 해야하는 척결대상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러한 현대신학의 전통에는 미덕뿐만 아니라 단점도 같이 안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말씀의 신비와 기도의 능력에서 멀어졌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일부 교회에서는 반발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자기 교회에서는 매일 새벽기도와 금요철야, 절기마다 가지는 특별기도회들이 얼마나 많은데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반론을 제기 할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렇다 하더라도 기도 하지 않는 사람의 위기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보수교회는 여전히 성경을 보고 기도를 하는 시간이 많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 보면 실속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처음부터 그러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 오순절 운동 이후로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오순절 운동 이전만 하더라도 보수신학에서는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따르는 데 열심인 교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오순절 운동이 조용기 목사를 통해 들어오면서 한국 보수교회의 기도는 기복을 위한 기도가 되어 버렸습니다.

 

  1. 기도는 무엇인가?

기도도 말씀처럼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넓은 의미로는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에 끊임 없이 기도하라고 했던 말씀처럼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생활화 된 기도를 말합니다. 걷고 있든 대화를 하든 항상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의 뜻을 묻고 진리에 비추어서 말과 행동을 돌아보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기도는 곧 삶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좁은 의미에서의 기도는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 형식을 갖추어 하는 기도입니다. 마태복음 6장 6절에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서, 숨어서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도 규칙적으로 한적한 산에 올라가셔서 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양한 종류의 기도가 있습니다. 큰 관점에서 몇 가지만 나누어 보겠습니다. 기도하는 주체에 따라 개인기도가 있고 모여서 하는 단체기도 혹은 대표기도가 있습니다. 기도를 받는 대상에 따라 개인기도와 중보기도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의 형식에 따라 묵상기도, 통성기도, 방언기도, 명상기도, 관상기도가 있습니다. 명상기도나 관상기도는 기도의 깊은 경지에 이를 때 온전히 가능한 기도입니다. 먼저 명상기도는 자신의 상을 뚜렷하게 하는 기도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일반 명상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자신의 호흡에 집중을 하고, 일렁이는 마음의 강을 잔잔하게 하여 자신의 심연을 들여다 보는 기도입니다. 명상 기도는 자신의 아집과 욕망, 왜곡된 생각에서 자유롭게 하고 바로 서게 합니다.

관상기도는 명상기도의 다음 단계로 자신의 마음과 정신이 맑아진 후 하나님을 관조하는 기도입니다. 관상기도를 통해 만나는 하나님은 오감으로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음성을 듣거나 형체를 보는 것이 라니라 오감을 넘어 직관하는 것입니다. 차원을 넘어 만나는 것입니다. 이 만남이 깊어지면 나와 하나님의 경계마저 사라집니다. 말그대로 물아일체의 경지가 됩니다.

그러나 오늘날 명상기도나 관상기도는 교회에서 거의 하지 않습니다. 성직자들 중에서도 명상기도나 관상기도를 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가끔 명상기도의 수준은 있지만 관상기도를 제대로 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우리 성도님들 중에는 기도를 어느 깊이까지 체험해 보셨는지요. 한때는 기도의 깊은 맛을 체험해본 적이 있을지는 몰라도 지금까지 그 깊이를 유지하고 계신분은 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본이 되시는 예수님을 통해 기도를 다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1. 예수의 기도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도 기도 하시는 모습이 자주 나옵니다. 예수님이 어느 때 기도를 하셨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자신의 일을 시작하시기 전에 기도로 준비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광야로 가셔서 기도하시고 세 가지 시험을 이겨내시면서 공생애 시작을 알렸습니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잘 나가고 바쁠 때 오히려 기도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께서 귀신을 쫓고 병자를 고친다는 소문이 크게 났다고 합니다.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에게 모여들었습니다. 그럴때 예수님은 사람들을 피해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셨다고 합니다.

셋째, 예수님은 사람과 인연을 맺고 관계할 때 먼저 기도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뽑기 전에 산에서 밤을 세워 기도했다고 합니다.

넷째, 예수님께서 능력을 베푸실 때도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때도 기도하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다섯째, 예수님께서는 괴로우실 때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것을 안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서 눈물이 핏물이 되도록 기도했습니다.

여섯째, 예수님께서는 특별한 일이 있을 때뿐만 아니라 정기적으로 시간과 장소를 정해서 기도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모든 순간을 기도와 함께 하셨습니다. 기도의 대가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과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기도가 바로 주기도문입니다. 기도의 깊은 단계에 이르기 전에 기본이 되는 주기도문을 제대로 알고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1. 기도하는 삶을 위한 제안

저도 기도가 부족하고 여러분도 기도가 부족하다는 것을 아실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한번에 기도가 생활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속적이고 꾸준한 기도생활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단 한 가지만 제안하려고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건, 잠자리에 들기전이건, 아니면 화장실에서 볼 일 보는 순간도 좋습니다. 어느때 어느상황이건 여유가 있을 때 주기도문으로 하루에 한번만이라도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냥 주문 외우듯이 하지 마시고 한구절 한구절 뜻을 되새기면서 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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