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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밖에 서서

(요한계시록 3: 20) 보아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1. 사랑의 공동체

저는 아이들에게 성경의 많은 교훈 혹은 미덕 중에 단 하나만 가르쳐야 한다면 사랑을 가르치겠습니다. 제가 오직 한번의 설교 밖에 할 수 없다면 사랑을 주제로 설교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하나님의 나라도 사랑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도 믿음, 소망, 사랑은 우리에게 언제나 있어야 하는 것이지만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말씀에는 아무리 지혜로운 말이라도 사랑 없이 하는 말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태어나는 것도, 자라며 성장하는 것도 사랑으로 자라고 성장합니다.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 속에 구현하고 실천하며 사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그래서 모든 교회는 사랑의 원리에 따라야 합니다. 교회라는 이름을 가지고 공공연히 차별하고, 구분하고, 특정 대상에게 증오와 혐오를 조장한다면 이미 교회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계신 곳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공적인 사랑의 공동체가 교회라면 사적인 사랑의 공동체는 가정입니다. 한 가정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을 통해서 자녀가 태어나고 양육됩니다.

공적인 사랑의 공동체인 교회와 사적인 사랑의 공동체인 가정이 원리에 충실할 때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에게 머무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하나님 나라를 파괴하는 강력한 적이 나타났습니다. 바로 돈입니다. 돈과 사랑이 반드시 대립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이 있는 곳에 자신의 돈도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사랑보다 돈이 우선되면서 모든 문제가 생깁니다. 이익집단은 두 말 할 것도 없고 사랑의 원리로 돌아가야 할 가정과 교회도 돈의 원리에 따라 돌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와 가정은 사랑의 원리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 가정과 모든 가정에 있는 아이들도 사랑의 원리에 따라 양육되고 자라야 할 것입니다. 사랑의 원리에 따라 자랄 때 불안을 이기고 참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방법을 살펴보고 우리가 우리 형제와 자녀들을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1. 부름의 역사

예전에 이런 내 노래가 있었습니다.

"예솔아!"

할아버지께서 부르셔

"예"

하고 대답하면

"너 말구 네 아범."

"예솔아."

아버지께서 부르셔

"예"

하고 달려가면

"너 아니고 네 엄마."

아버지를

어머니를

"예솔아--"

하고 부르는 건

내 이름 어디에

엄마와 아빠가

들어 계시기

때문일 거야.

 

이 노래가사처럼 우리나라는 독특한 호칭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르기 보다 그 사람 자녀의 이름을 붙여서 누구 엄마, 누구 아빠라 부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요즘에는 이상하게 영어와 섞어서 누구맘, 누구파라 부르기도 합니다. 반대로 서양에서는 대부분 이름을 부릅니다. 호칭의 관습만 보더라도 그 사회의 정신을 알 수 있습니다. 이름보다 직급이나 촌수, 누구의 엄마나 아빠로 부르는 동양사회는 개인보다 공동체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반면 각 개인의 이름을 부르는 서양사회는 개인주의가 발달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호칭은 매우 중요하고 큰 영향력을 미칩니다. 여러분도 익히 아시는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에 ‘부름’의 중요함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이름으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주시기 전에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저를 ‘전도사님’이라고 부르시기 때문에 저는 ‘전도사’로 여기 있는 것입니다. 나 혼자 ‘전도사’라고 생각하고 있어도 아무도 나를 ‘전도사’라고 부르지 않으면 저는 하나의 몸짓에 불과합니다. 반대로 저는 ‘전도사’가 되고 싶지 않음에도 많은 분들이 저를 ‘전도사’라고 불러주시면 제가 원치 않더라도 ‘전도사’가 되지 않기가 어렵습니다.

그렇게 생각해본다면 우리가 우리의 자녀들을 부르는 것도 정말 중요합니다. 자녀 때문에 너무 화가 나서 ‘바보야’, ‘멍청아’라고 부르면 그 아이는 정말 바보, 멍청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그리고 가족과 이웃들에게 사랑을 담아 이름을 부르십시오. 별명을 부르더라도 좋은 의미를 담은 것으로 부르십시오. ‘부름’에는 부름 그대로 현실화 시키는 힘이 있음을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1. 문 밖에 서서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데 “문 밖에 서서” 부르신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그의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의 주권은 창조주에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문을 부수고 들어와도 우리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문 밖에 서서 부르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스스로 문을 열어줄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열어드리면 그때서야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음식을 나누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그의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면에서도 그 분 앞에 부족하고 부족함에도 그 분은 우리를 함부로 대하지 않으십니다.

아무 때나 문을 벌컥 열어젖히지 않습니다. 우리를 자유로운 인격체로 존중하시고 대우하십니다. 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하나님에게 그러한 존중을 받은 기독교인들은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신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상대방이 약하고 어리숙해도 함부로 쳐들어가서는 안됩니다. 강제해서도 안됩니다. 두드리고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 자녀에게도 마찬가집니다. 함부로 들어가지 마세요. 내 자식이니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조물을 자신 마음대로 하시지 않은 것처럼 여러분도 여러분의 자녀를 마음대로 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들을 존중해야 합니다. 존중할만해서 존중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존중할만해서 존중하셨을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존중하시면 그 순간 우리는 존중 받을 만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자녀들을 존중하면 여러분의 자녀들이 존중 받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존중은 아이들의 자존감에도 큰 영향을 미칩니다.

가끔은 과격한 기독교인들 중에 선교를 빌미로 무례하게 구는 것을 보기도 합니다. 그분이 정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격해서 다른 사람들과 나누기를 원한다면 친절해야 합니다. 무례하게 굴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그분을 존중하고 친절하게 대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전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자녀에게 가르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방식도 제대로 배워야합니다. 문 밖에 서서 두드리십시오. 열어줄 때까지 인내하십시오. 닫혀있는 문을 무례하게 열려고 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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