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역사3

by 관리자 posted Feb 09,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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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근대 계몽주의가 금과옥조처럼 받들던 이성의 역사가 세계대전 이후로 충격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1960년대 후반에 들어와서 사람들은 더욱 근원적인 회의에 빠졌습니다. 근대가 신에 대한 맹신을 버리고 계몽의 시대를 열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신을 대신해 이성과 인간을 맹신한 것이 아닌가 하는 회의였죠. 그래서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내려온 모든 가치체계에 대한 의심을 시작한 것입니다. 철학에서는 포스트 구조주의로 사회문화계에서는 포스트 모더니즘으로 불립니다. 신, 이성뿐만 아니라 그 동안 성스럽게 생각한 것과 속된 것이라 생각한 것의 기준, 고급이라 생각한 것과 저급이라 생각한 것, 문명인과 미개인이라는 서구중심적 생각들, 남자와 여자의 구분들 등 기존의 질서체계를 철저히 의심하고 뒤집고 부수고 해체했습니다. 신학에도 전적으로는 아니지만 이러한 사회 분위기에 영향을 받은 것이 과정신학, 신죽음의 신학, 해방신학, 여성신학, 생태신학 등입니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동물은 결국 다시 쌓고 올리는 것을 잘 합니다. 20세기 후반까지 문화와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쳤던 포스트 모더니즘을 21세기에 들어서 극복하려는 노력들이 보이고 있습니다. 지금도 보수교단에서는 포스트 모더니즘을 사탄의 계략 정도로 생각하지만 저는 역사의 수많은 사건과 변곡점들이 믿음의 외연을 넓히고 성숙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동안 믿음의 위기라고 생각된 사건들은 많았습니다. 유대가 로마에 멸망했을 때도 그랬고, 지동설이 증명 되었을 때도 그랬고, 근대 계몽주의 때도 그랬고, 진화론이 등장 했을 때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믿음의 세계는 사라지지 않고 성장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 와서는 리처드 도킨스와 같이 진화생물학을 통해 기독교를 공격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들의 공격으로 믿음의 세계가 무너질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인간에게 있어 본질은 이성이 아니라 믿음이 아닐까요? 사람들은 아는 대로 행동하기보다는 믿는대로 행동하기 쉽습니다. 믿음의 체계가 어떤가에 따라 행동이 달라집니다. 과학계에서도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 이론이 등장하면서 더 이상 가치중립적이고 실증적인 과학은 없다는데 대체로 동의하는 분위기 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과학실험의 첫 단계가 무엇입니다. 가설입니다. 가설은 합리적인 의심이라고 할 수 있지만 합리적인 믿음으로부터 시작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직 증명되지 않은 것에 대한 믿음을 실험을 통해 증명해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험은 철저히 통제되고 주어진 조건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무엇을 믿느냐에 따라 실험방법도 달라질 수 있고, 실험방법이 달라짐에 따라 결과도 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20세기 말, 21세기는 과학의 시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흔히들 사람들이 자신의 주장을 피력할 때 이것은 ‘과학적으로’라는 말을 미사여구로 붙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과학 또한 가치중립적이거나 본질만을 드러낸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과학의 성과나 업적을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과학을 통해 얻은 결과들도 상대적이고 한시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시간 또한 상대적이고 중력의 법칙 또한 공간마다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렇다면 인류가 시작한 이래로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요? 데카르트의 말처럼 우리가 “생각한다(의심한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입니다. 믿기만 하는 사람들은 금방 자기만의 좁은 세계에 갇혀버릴 것입니다. 생각만 하는 사람들은 어떤 행동도 하지 못합니다. 믿고 생각하는 것을 반복하면서 믿음의 세계도 커지고 생각도 깊어집니다. 그리고 믿음의 세계를 넓히는 데는 생각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직관과 체험이 있습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우리보다 직관과 체험을 더 잘 했으리라 봅니다. 사실 뛰어난 과학자들은 영감이 남다르다고 하죠. 시대를 뛰어넘는 가설을 설정하는 것 자체가 바로 직관의 힘이기도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2700여년 전 데모크리토스라는 철학자는 이 세계가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 작은 단위의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했습니다. 원자설이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은 아인슈타인이 브라운 운동을 관찰하고 쓴 논문으로 밝혀진 것입니다. 즉 직관으로는 2700년 전에 깨달은 것을 생각으로는 겨우 100년 전 그러니까 2600년이 흐른 뒤에야 밝힌 것이죠. 더욱 분명한 앎과 믿음을 위해서는 생각을 통한 증명이 중요합니다. 직관이 때로는 틀릴 수도 있기 때문이죠.

 

 마지막으로 정리하겠습니다. 인류는 믿음으로 시작했습니다. 신으로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믿음 대신 이성(생각), 신 대신 인간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계몽시대로 넘어 왔습니다. 유토피아를 꿈꾸던 사람들에게 세계대전은 큰 상처를 남겼습니다. 그리고는 신도, 인간도, 믿음도, 이성도 모두 부정하고 해체하는 과정을 20세기 후반까지 겪었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믿음의 세계, 이성의 세계, 허무의 세계를 동시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결국 모든 사람이 믿음의 세계에 산다고 생각합니다. 이성의 세계와 허무의 세계는 믿음의 세계를 더욱 풍요롭게 하는 과정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은 더욱 생각하고 끝까지 회의하고 새롭게 믿습니다.

 

 말씀에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에 대한 실물이며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증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실물을 보기 원하고 증거를 얻기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반성, 의심과 함께 최종적인 믿음이 필요합니다. 결국 다시 돌아가 "믿기 위해서 안다(intelligo ut credam)"와  "알기 위해서 믿는다(credo ut intelligam)"는 명제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지금의 우리뿐만 아니라 믿음의 선조들이 이미 자신의 실존적인 삶 속에 얻은 고백입니다. 반성하고 생각하고 회의하는 순간에도 믿음의 경주를 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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