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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렌스2016.07.12 23:29

사랑의 진실함을 칭송하는 것은 인지성정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남녀간의 사랑은 때와 공간의 제약을 받아서 원하는대로 이뤄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더 안타까운 면도 있겠죠. 나의 사랑의 진실과 진정이 하늘에 다다를 정도로 다함에 이른다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심리적 결과와 다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래의 글에서 이런 글을 썼는데요.

은유(隱喩)와 나
-플로렌스

은유는
자기위기의
기꺼움
너에 이르는
나그네

하늘 속
달이 되고
구름 되나
호수에 비친
나의 얼굴

내가 네가 되고
네가 내가 되는
반사경
나르시스의
우울한 환타지

은유라는 것은 물리적으로는 전혀 상관이 없는 두 대상 사이에 다리를 놓는다는 것인데, 그러한 다리를 놓는 은유론적 혁신이 쉽지 않습니다. 짝사랑은 자신이 타자쪽으로 또는 타자속으로 노둣돌을 놓아 건너가고 있는 중이라고 착각하지만, 사실 이것은 자신의 독백에 불과하죠. "내마음은 호수"라고 했을 때, 내 마음의 수많은 가능성을 배제하고 나를 호수라는 속성에만 연관시키는 모험은 큽니다. 그래서 저는 "은유는 자기 위기의 기꺼움"이라고 했었습니다. 자기를 버릴 정도로 자기 위기를 기꺼이 맞아들인다는 것이죠. 그래서 "너에 이를 수" 있다고 했지만, 결국 그것은 호수에 비친 자기만의 얼굴이지 "타자"의 얼굴은 아니라는 것이죠. 결국 우리의 감정은 나르시소스의 감정으로 회귀되고 자기 감정을 태우다가 소진 되어 버립니다. ㅎ, 그래서 "호수에 비친 자기 얼굴"만 보고 사는 것이죠. 이것은 나는 네가 될 수 없고, 너는 내가 될 수 없는 환상이라는 것이죠.

다중이님이나 저나 모든 사람은 다 사랑의 이상형(ideal type)을 갖고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결코 이뤄질 수 없는 플라톤의 이데아입니다. 막스 베버라는 사회학자도 "이상형"이라는 유형론(typology)을 제지하기는 있지만, 이상형은 현실적으로 이뤄질 가능성은 있지만 결코 현실화 될 수 없는 유형이죠. 하지만 우리가 삶이든, 사랑이든, 실천이든 나름 이상형을 갖고 있지 못하면, 꿈을 꿀 수는 없죠.

우리 교회가 작고 그 작은 속에서도 이상에 이르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꿈을 꿀 권리는 있습니다.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서 맺은 인연에 의미를 추구하며, 그러한 인연의 기적에 경탄하고 감사해야겠죠.

이 노래의 주인공처럼 우리는 한 때 다 그런 사람들일 수도 있습니다. 키에르님께서 키에르케골 전문가시지만, 사실 키엘케골은 바로 그런 경험을 철저히 한 사람이었고, 그의 그러한 경험이 그의 책 곳곳에 나타납니다. 그의 [Works of Love] 등은 바로 인간적 사랑을 그리스도교적 사랑으로 승화하려는 몸부림이었죠. ㅋ 이야기가 길어졌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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