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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생각되십니까? (1)

–“목자들”의 교회-          이재형 2016/6/21

 

<이 글은 본래 홈페이지에 (2010/11/30)) ,  

“캐나다 연합교회와 캘거리 한인연합교회”라는 제목으로 올렸던 글을 고쳐쓴것입니다. 옛 원고를 읽으신 분은 반복된 대목을 건너뛰고, 추가된 부분만 읽으셔도 되겠습니다. 옛원고는;

 

캘거리한인 연합교회 교우님들에게
1. “내가 아는 캐나다 연합교회”가 어떻고, 

2. “내가 보는 한국이민교회들의 풍토”가 어떤데,

3. “캘거리 한인 연합교회에 오신 여러분들은 어떤 이들이고,

     어떤 장래를 생각하실까?”

라는 세가지 제목으로 말씀드렸던 것인데, 수정 보완하고,

다음과 같이 4가지 제목을 추가해서 말씀드립니다.>

 

가. 머릿말:“이 원고를 고쳐쓰게 된 사연”

3. 을 <추가보완 하고, 마감에 다음 세 가지를 추가>  

나. 지역사회에 뒤늦게 생긴 캘거리한인연합교회의 특성과 어려움

다.“목자들”의 교회

라. 교회의 내용과 형태내에 대한 우리 생각의 문제

 

가.   머릿말: 이 원고를 고쳐쓰게 된 사연

 

오랫동안 교역자도 없이 지나던 이 교회가 노회의 인준절차를 거쳐교역자를 모신 후, 가장 높은 성장을 체험하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성장은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을 내다보면서 쓴 것처럼 보이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특히 마감부분에, (4.“이 교회에 동참하신 여러분들은 어떤 이들이고, 어떤 미래를 생각?”(3)에)“이런데도, 이 교회가 캘거리한인

연합교회로 존속하려면, 앞에 말한 사실들을 바로 알고, 곧 막연하게 교회가“성장”할 것을 기대하지 말고, 모든 면에서 독특한, 전연 달은 길을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써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이렇게 썼던 나 자신이 미처 생각하지도 못했던 점들을, 6년이 지난 지금에야, 깨닫게 되었

습니다. 무엇은 하지 말아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한다고 말 했던 나 자신은, 그동안, 말아야 할“막연한 성장”을 우선적으로 기대해왔었고, 여러분들에게 해야할 것이라고 말한,“전연 달은, 독특한 길”을 선택하는 일에서는, 아무것도 생각하지도 않고(못하고) 지나왔습니다.

 

미처 착안하지도, 깨닫지도 못했던 점들을 추가하고 보완해서, 원고를 고쳐써야 하게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글 그 다음의 글에만이 아니고, 그 이전의 글에도 수정하고 보완해야 할 점들이 적지 않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또 하나의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사람에 대한 성경의 맨처음 이야기에 (창세기 2-3장 에덴동산 이야기에) 대한 (서구)기독교의 이해에, 심각한 오류가 있었다는 것을 최근에서야 (2015)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첫 다추가 잘못 끼워졌을 때, 잘못은 첫 단추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마지막 단추도 잘못 되는 것입니다. 지금의 기독교(회)

에 비기독교적인 잘못이 있게 마련이란 말입니다. 잘못 끼원진 첫 단추를 고쳐 끼워야만 하는 것입니다. 염두가 안 날 정도로, 엄청나게 큰 작업이 산적해 있는 것입

니다.

 

그 동안 내가 생각하게 되었던“이상적인 교회”는

“전연 다른”교회가 아니고,“전통적인 교회와 같은 교회”였습니다.“전연 달은, 이상적인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를 나 자신도 아직 모르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물론“모른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고요.

 

그런데, 나 스스로 곰곰히 생각해서 깨달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또, 한 순간에 번게처럼 깨달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어떤 분과의 마음상한 일이 있은 다음, 시간을 두고 거듭거듭 새겨보게되는 기나긴 과정을 거쳐서, 깊어

지고, 분명해지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이 교회에 스스로 동참해오신 한 분이, 뜻밖의 일로, 이 교회를 떠났었습니다. 그 이유를 알려준 긴 편지를 받았

었습니다.(2015겨울) 이 긴 편지에 제가 6년전에 썼던 글을 되새겨보게 하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었습니다.

 

“… 하지만 어느 순간에 교우간 인간관계의 균열로 작은 조직이 순간에 붕괴되는 것을 보면서 교회는 존재의미와 존재 방법이 옳고, 이에 공감하는 교우들로 채워질 흔들리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떠나고 조장로님 자매분들과 가정만 남았을 때에 제가 붙들고자했던 생각은 - 교회 존재의미와 방법의 정립이 우선이고 그에 동의하는 교인들을 모으고, 이후 다수가 모여지면 목회자를

초빙하는 것이 옳다고 믿고 자리를 지키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목사님께서 2010 11 캘거리에 오셔서 하셨던 말씀이 교회 홈페이지에  "캐나다 연합교회와 캘거리 한인 연합교회"라는 이름으로 나와있습니다. 마지막 부분에 교회에 당부하신 말씀 - "캘거리 한인 연합교회가 존속하려면 막연하게 교회가 성장하기를 바라지 말고, 모든 면에서 독특한 전연 다른 길을 선택하여야 것입니다"라는 말씀은 가정 남지 않은 교회에 저를 붙들고 매달리던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금년 (2015) 봄에 오셔서 다시 목회자를 먼저 세우자고 목사님과 장로님이 결정/권면하시고, 교인 수가 늘고 교회가 커져가는 것이 다시 우선시되는 의도를 접하면서 제가 담을 이유는 사라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

 

위 두 구절은  2010/11나의 글(생각)과,  2015/봄에 보여진 (느껴진, 인상받은) 나의“의도”를 대조시켜 보여주고 있습니다. 계속하시기를,

 

 “목사님, 저는 교회는 하나님 나라 (약자가 우선시 되는 나라) 이땅에 실현되게 하는 하나님의 여러 도구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염려스럽게 느껴지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까지 보시게 된다면, 달리 생각하게 되실 것이라는 말씀만을 드리고(여기서 중단

하고), 앞으로 해야할 일은 무엇일까? 하는 문제에 관심을 돌려 생각해 보려고 이글을 씁니다.

 

그리고,“한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합동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도,“한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좋지 못한 일에서도 선을 이뤄내는 사람라야 한다.”라는 뜻으로 체험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말씀도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하는 말(대화)에서  “사람의 의도나 생각이 얼마나 정확히 전달될 수 있을까?” 하는 문제가 있고, 또 “사람의 생각을 전달하는 그 말은,  어떤 감정에서, 어떻게 전달 하느냐에 따라서 (그리고 듣는 이가 어떤 감정으로 듣게 되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데 대한, 성경이야기가 주는 답을 찾는 일은 다음으로 미룹

니다.>

 

 

이 편지는“어떤 교회가 되기를 바라는지? 대한 우리 생각”이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된다는 사실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런 경우의 우리 “생각”은 산을 옯길 수 있다는 “믿음”이라는 말과 같은 뜻이기도 할 것입니다.>

 

2010/11의 내 생각은“교회에 붙어있게 하는 생각”

이었다고 했는데, 물론 나는 그 동안 이런 사실은 전연 모르고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2015/봄의 내 생각은“교회를 떠나게 하는 생각”이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주받은 우리 말에서 문제가 생겼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보다 정확히 깨닫기 시작한 것은 위 편지를 받은 2015/12/

25부터였습니다.

 

그리고, 뜻밖에도 내 일생동안 성탄절에 받은 편지 중, 가장 기쁘고 감사한 내용이 이 편지에 담겨있었습니다. (물론 본인은 몰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한장의 편지는 기쁨과 앞음을 동시에 체험하게 함으로, 설교를 준비하는 내 마음에 혼돈을 이르켰습니다.

 

그 겨울, 캘거리에 5주간 머물었었는데, 골방에 들어박혀, 말 그대로 두문불출, 교회의 갈길만을 생각하며, 몇 차례의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편지를 받기 전 주일설교와, 받은 다음 주일설교 내용에 급격한 변화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몇번의 주일설교

에서도, 매번 그 내용에 큰 변화가 지속되었습니다. 5년 전 내 생각과 5년 후 내 생각이 양극화된 것이었다는 사실 앞에서, 내 생각에 일관성이 흐트러졌었습니다.

 

이 마음의 혼돈은 이때 시작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수년전 교회예산을 세우는 과정에서, 교회가 존폐위기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혼돈정도가 아니고, 완전 포기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어떻게 되어가겠다는 것을 빤이 내다보면서도, 심지어,“누구 누구가, 이렇게 해야, 또는 어떻게 했어야 하는데!”

하는 등의 생각, 단정까지, (심지어“정죄”까지?) 하면서도, 해결을 위한 동참은 물론, 아무런 관여도 하지안했었습니다. 온전한“나 몰라”로 일관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있었습니다.

 

<내가 생각“하고”라고 썼지만, 과연 내가 그런 생각을 ”한” 건지?, 아니면, 무엇인가가 나로 하여금 그렇게 생각 “하게 만든것”인지? 하는 문제는, 차후 성경이야기(뱀이야기) 공부에서 다루게 되겠습니다.>

 

이런 포기는 이 교회에 대해서 처음 가졌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14년 목회했던 에드몬톤 한인연합교회를 자진사퇴할 때도, 8년간 시무한 밴쿠버한인연합교회에서 정년은퇴할 때도, 한인연합교회에 대한“포기”가 있었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이런 나의 포기는 한님을 부인하는 잘못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것도, 뜻밖에, 2015년5월에, 20여년간 포기했던 에드몬톤 한인연합교회의 초청을 받고, 그 교회에 가서,“포기할 줄 모르는”몇분의 여신도들을 통해서, 한님께서 하시는 기적과 같은 일들을 목격하면서 깨닫게 되었었습니다.

 

<사실은 은, 그 교회에서 받은 감격과 깨달음의 기쁨을 이야기한다고 했던 내 말에, (정확히 말해서, 말의 내용보다도, 어떤 감정에서,

그리고, 어떻게 말을 했는지? 하는데서) “뱀”이 끼어들 틈이 생기게  되었다고 봅니다. 이래서, 앞에 언급한, 뜻밖의 “사건”이 생겼던 것이지만, 이 아픈 체험은 “뱀”의 뜻을 (불행의 원인과 행복의 길을) 더 깊이 깨달을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언젠가 글로 정리할 수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이번 일에서, 나에게 가장 큰 잘못은 포기에 끝나지 않고, 누군가를“어떤 사람이다!”하고“단정”까지 (정죄? 까지) 하면서도, (타인을 통해서 소식을 듣고는 혼자 단정했을 뿐!) 당사자와는 한 마디 말도 직접 나눠보지 안했던 점입니다. 혼자만의 생각이 단정으로 굳어지고, 심지어 정죄(?)함에 이르게 될 경우에는, 누군가에 대한“원망”과, 소중하게 여겨오던 교회가 죽는데 대한“울분”이란 감정에 지배당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울분”을 동반한 복합적인 감정

에서는 정신적인“폭력”을 자행하게 되고, 모두에게 행복이 아니고, 불행을 가져오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내 말이 아무리 옳았다고 해도,“뱀”이 지배하는 결과가 되고 마는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마음의 혼돈에 질서가 잡힌 것은, 마지막 설교를 (고 문장노님 추도예배 설교) 준비할 때, 이 교회의 갈길에 대한 나의 생각에 하나의 방향이 잡혔을 때였습니다.

 

2016/1/19 떠나면서, 그동안 했던 몇편의 설교 원고들을 곧 보내드린다는 약속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원고들을 고대로 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앞에 말한 문제점을 자인하게 되고, 미쳐 착안하지도 못했던 점들에 대한 깨달음이 생기면서, 2010/11의 그 옛 원고부터 보완수정해서 다시 고쳐써야하겠다고 마음먹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면서, 내가 몇가지 크게 배운 바는;

첫째, 교회를 보는 시각에 있어서, 나와 먼 사람으로 여겨졌던 그 사람이 (받은 편지를 통해서), 이 세상에서 둘도 없이 가장 가까운 사람임을 알게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가 어떤 관계라야 행북을 체험할 수 있는 것일까? 하는 문제를 더 깊게 생각해

보게 되고, 깨달은 바가 많았습니다.

 

내가 누군가와“등을 대고”나란히 서 있다고 합

시다.“등돌린”관계는 가장 가까이 있는데도,“멀고 먼”관계입니다. 행복을 체험할 수 없는 관계입니다. 이런 경우, 내가 내 앞만을 바라보고, 내 시선(각)만을 고집하고, 길을 떠난다고(산다고) 합시다. 시간이 갈수록 더 점점 멀어집니다. 멀어져가는 이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될 때까지는, 내 시선(각)에 방향변화가 없는한, 지구를 한 바퀴 돌아가야만 합니다. 곧 그만큼 먼(불행한) 관계로 살게 되는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정 반대 방향을 보면서(등을 대고) 서있다고 여겼던 이 두 사람이, 사실은 둘 다 꼭 같은 어떤 한 지점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또는 둘 다(한 사람만이 아니고) 무엇인가“하나의 같은 표적”을 향해서 자기의 시선(각)의 방향을 (한 사람은 오른편으로, 다른 사람은 왼편으로 90도씩) 돌리기만 하면, 어떻게 될까요?! 이 때 이 두 사람은 이 지구상에 나란이 서있는 가장 가까운 사람이 되지 않을까요?

 

이렇게 되지 않고도 행복을 체험할 수 있는 자세가 또 있을까요?

 

특히 개인과 개인과의 관계에서만이 아니고, 공동체를 이루는 여러 사람들에게, 이렇게 되지않고도, 곧 모두가 무엇인가“하나의 같은 표적”을 향해서 자기 시선(각)의 방향을 각각 알맞는 각도씩, 돌리지 않고도, 행복을 체험할 수 있을까요?

 

사람이“등을 대고”서있을 때만, 먼(불행한) 사람이 되는 것일까요? 등돌리지 않고,“마주 보며”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데도, 가장 먼(불행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경우가 더 많지 않을까요? 예를 들어, 불행한 체험에 지치고 지쳐서 이혼을하게 되는 경우는 가장 가까운 사람 사이에서만 생기는 불행이지요.

<두 사람이 “등돌린 관계”에서, 둘 다 자기 시선(각)의 방향을  90도가 아니고, 180도 돌린다면(둘다 100% 잘못을 인정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다시 “마주보는”관계로 돌아가는 것은 분명하지요. 이 마주보는 관계가, 개인과 개인만의 관계라면 (부부관계에서 처럼), 상대방을 향한 “사랑”만으로(마주봄만으로) 행복할  것처럼 생각될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이 저들만의 행복을 추구하고, 다른 사람의 행복을 돌보지 못하는 순간, 저들의 행복자체도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사실은 이들의 행복자체도, 공동체의 보호가 없이는, 보장될 수 없는 것입니다. 부부간의 행복도, 공동체의 행복도, 공동체를 이룬 모두가 무엇인가 “하나의 같은 표적”을 향해서 시선(각)의 방향을 돌리지 않고는, 체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하나의 같은 표적이(목표가) 무엇인지에 대한 성경이야기의 답에 대해서는 다음으로 미룹니다.>

 

<두 사람이 “등돌린 관계”에서, 둘 다가 아니고, 한 사람만 시선(각)의 방향을 180도 바꾼다면 어떻게 될까요? 한 사람만 시선을 180도 바꾼다는 말은, 한 사람만 100% 잘못했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뒤딸아 가는” 관계가 되는데, 한 사람은 100% 옳고, 한 사람은 100% 틀린 것으로 되는 경우이지요. 이런 관계를 성경 이야기는 바로 사는 것이라고 하고 있을까요? 이에 대해서도 다음으로 미루겠습니다.  “두 사람이 한몸이 된다.”는 말씀의 뜻도 이렇게, 마치 어느 한편이 중심을 이룬 하나의 원을 그리는 것과 같은 것으로 이해함은 잘못이고, 둘이 동등한 중심임을 인정하고, 두 점을 중심으로 해서, 하나의 타원형(원형이 아닌)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이해해야만,  그런 생활 속에서만, 행복이 체험되는 것이라는 설명을 했던 일이 있습니다 ( “떠나라”책 에덴동산 이야기에서).>

 

“원수도 이웃”처럼 대할 수 있어야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어떤 경우에만 실현가능할까요?

 

둘째, 이 교회가, 성경이 말해주고있는 교회의 원형에 가장 가가운 교회로 될 수도 있다는 생각를 하게 되었습니다.

 

셋째, (1)“누가 옳고 긇음을 가려내고 자기(만)의 옳음을 주장하려는 관심으로는(자세로는)”참된 신앙생활을 할 수 없고,

 (2) 나와 남의 행복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함께 찾고, 함께 행하려는 자세에서만, 참된 신앙생활을 체험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후자(2)는 “모든 열매를 무엇이나 다 먹어라”의 뜻이고, 전자(1)는 “선악과는 먹지 말라”의 뜻인 것입니다. 이 점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강조되어야 할 점이라고 봅니다.>

 

서구기독교 신학의 핵심적인 관심은“옳고 그름을 가려낸다”에 치중되어 있었고, 나와 다른 사람의 행복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함께 생각하고, 함께 찾아내고, 함께 행하지 못한 오류에 빠져 있었다고 봅니다. 쉽게 알 수 있는 이런 실예가, 서구 기독교가 식민지 시대에 저질은 죄악입니다.

 

(서구)기독교신학은“교리”라는 틀을 (이론체계를) 먼저 만들어 신주처럼 모셔놓고, 이 틀에 맞지 않으면, 무엇이든 다, 과학적인 진리까지도,“이단”으로 규정하게 되고, 이권을 지키기 위해서, 교권이라는 힘을 써서“이단처형”하는 오류를 범하게 되었던 것이라고 봅니다.

 

이런 (서구)기독교(신학)전통을 이어받게 되고, 배운 한국기독교 교역자들과 신도들 대부분도 이런 오류에 빠지는 것도 모르고, “내가 옳다! 네가 틀렸다!”는 노름에 빠지는 것이 신앙생활의 본 모습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 나닐까요? “믿습니다”라고 할 때도, 이렇게 주입된 교리를 믿는다는 경우가 태반이 아닐까요? 서구 인문학을 공부한 학자들의 우선 관심도“내가 옳다! 네가 틀렸다!”에 머문 상태가 아닐까요?

                

1. 내가 아는 캐나다 연합교회

교회역사는 교회분열의 역사로 볼 수 있습니다. 유대교에서 초대기독교회가 파생, 초대기독교회에서 네 개의 구교 (천주교) (Eastern Orthodox, Ukrainian Catholic, Roman Catholic, Oriental Orthodox)가 파생, 이중 로마천주교회에서 종교개혁을 통해서(15세기) 개혁교회가 (개신교회Reformed Church)가 파생.

이 개혁교회에서 네 개의 교회 (영국성공회 Anglican /감독교회 Episcopalian), 장로교회 Presbyterian, 루터교회 Lutheran, 침례교회 Anabaptist)가 파생.


영국성공회/감독교회에서 감리교회와 (Methodist), 회중교회가(Congregationalist) 파생.

이런 분열을 거쳐 캐나다 장로교회, 영국에서 건너온 캐나가 감리교회,  캐나다 회중교회 , 이런 4 교단이 합해서 캐나다 연합교회라는 단일 교단이 생겼습니다(1912년).

 

<당시 장로교회 중 10여%에 해당하는 교회는 연합운동에 동참하지 않아서, 지금의 캐나다 장로교로 남아 있었음.>

<회중교회라는 교파는 한국에는 없고, 감리교회와 함께 영국에서 캐나다로 들어 온 교단.>
<위 교단들의 연합은 캐나다에서만 되어진 일입니다.  위에 언급된 모든 교단들이 세계전역에서는 (특히 미국이나 한국 등) 계속해서 수도 없이 분열 파생되어 왔고, 파생되어 가고 있음. 캐나다 연합교회는 미국의 교파교회풍토보다는  영국교회

전통에 더 가깝다고 보임.>

연합교회형성 이전에 캐나다에 세 개의 교파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감리교회, 회중교회, 그리고 장로교회, 이 세 교회가 합해서 연합교회가 되었다는 말을 자주 들었기 때문에, 캐나다에는 이 세 고파가 각각 단일 교단으로 있었던 것처럼 오해하기 쉬운데,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캐나다에서도 다른 나라에서처럼 이 세 교파들은 각각 수많은 교파들로 난립해 있었던 것인데,
(1) 감리교회는 약 9개 교파로 분열되어 있다가 1920년부터 한 두 교단씩 합하는 운동이 시작되어 오다가, 64년 만인 1984년에 하나의 연합감리교단으로 통합에 성공 했습니다. 
(2) 회중교회는 4개의 교파로 분열되어 있었는데, 1806년부터 연합운동을 시작해서, 19년 만인 1925년에 두 개의 교단으로 통합했습니다.
(3) 장로교회는 10여개가 넘는 교파로 분열되어 있었는데, 1827년부터 한 두 교파씩 합치기 시작해서, 48년만인 1975년에 하나의 연합장로교회로 통합되어 있었습니다.

감리교회가 64년, 회중교회가 19년, 장로교회가 48년의 긴 세월을 각각 분열된 교파를 통합하는 운동을 꾸준히 지속해왔다는 점, 첫 연합운동이 시작된 1817년에서 1925년까지, 108 동안이나 지속했었던 , 그리고 연합 지금까지(2016현재로) 91년간 함께 살고, 함께 섬기고 있다는 점은, 캐나다교회 풍토의 특징이 아닐까요? 이는 세계 교회사에 유일무이한 일입니다. (캐나다에 왔다가 나이아가라 폭포를 못보고 감은 아쉬운 일일텥데, 캐나다에서 살면서, 세계교회사에서 유일무이한 캐나다연합교회를 보지(알지) 못하고 감은…?) 분열밖에 모르는, 더욱이 국토분단의 아픔을 견디어야 하는 한반도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기에, 더욱 배울 바가 있어 보입니다.

 

<그만큼 “이질적”이기도 하겠고요. 곧 캐나다에 신앙풍토에 따라갈 수 없는 점이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인도에서 교회 연합운동이 시작되었으나 실패했음, 그후 비교적 최근에 오스트랄리아에서 “연합하는 교회” Uniting Church 라는 이름으로 연합운동에 성공했음. 이 교회와는 캐나다연합교회가 주일학교성경공부 교재를 함께 쓰는 일도 있었음. 캐나다에서 하기방학 기간을 위해서는 주일학교 교재를 만들지 않는데, (하기가 아닌) 오스트라리아에서 만든 교재를 들여다 쓰기도 했었음.>

 

(4) <첫 원고에는 없던 내용>

    교회연합운동과 교회의 본모습 –교리보다는 민생문제를-          

 

이 교회의 연합운동이 일어난 것은 당시 교회지도자들에게서 발상된 것이 니아니었답니다. 마을 네거리 모퉁이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교파교회들이 서로 경쟁하듯 교회당을 세우고, 자기 교회에 나오라고 들볶가대는 웃지 못할 짓에, 지치고 진절머리를 내던 동민들의 상식적인 요구에서 비롯한 것이었답니다. “당신들이 먼저 하나가 되어 한 교회를 이루고나서, 나오라고 하면, 그때 나가리다.” 는 식의 너무도 당연한 상식에 승복한데서, 생겨난 일종의 교회혁신

운동이었던 것입니다.

 

교리를 중심한 이론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백성의 민생문제에 관심을 앞세운 교회의 본모습을 되찾는 운동이었습니다.

 

<이 점은 성경 이야기에 나타난 교회의 본모습을 찾는 데서 더 공부하게 되겠습니다.>


(5) 캐나다 연합교회의 특징;

(5-1) 교리적인 면에서 옳고 그름을 (이단여부를) 평가 내지 판단하려는 자세보다는, 현실에서(민생문제에서) 인간이 당하는 불행을 극복하는데, 필요한 일이 무었인지를 찾고, 무엇을 함께할 수 있을지? 를 찾아서, 함께 행함에 우선순위를 둔다고 하겠습니다. 누가, 또는 무엇이, 옳고? 글은지? 를 따지려기 보다는, 무엇을 해야할지? 무엇은 하지 말아야 할지?에 관심과 노력을 앞세우려는 자세입니다.

 

<이점은 성경의 첫, 가장 중요한, 가르침 (선악과 이야기의 본뜻)과도 맞먹는 일입니다. >

 

(5-2) 교파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자아비판에 철저할 뿐 아니라, 성서해석과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자신의 성경 이해와 행동에 대한 자아비판에 철저하려는 점입니다. 그리고 예를 들면,“무조건 믿으라”는 등 “믿음”

이라는 말로, 심지어“사랑”이라는 말로도, 모든 합리성을 부정하고, 억지로 자기주장을 관철하려는 독단과 독선, 그리고 광신을 반성하려는 점입니다. 인간의 능력이 닿는 한에서는, 경험적이고 합리적이고, 과학적으로 사고하고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점입니다. 
 

(5-3) 타국에 연합교회라는  “교파교회”를 설립하려는 의도가 (“선교” 정책이) 없습니다. (식민주의적인 발상에서 탈피한 자세입니다. 전도라는 명목으로 짖는 죄악에 대한 각성.)
 

(5-4) 교회의 모든 행정절차를 "매뉴얼”에 (Manual, 교회 “헌법”이란 용어 대신 쓰는 말) 따릅니다.

 

“나에게도 남에게도 좋고 이로운 것은 하되, 나에게 좋고 이로워도 남에게 해로운 것은 하지 말라!”는 한님의 첫 말씀에 순종하려는 자세라고 봅니다. 권위주의나 이득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기본

자세입니다. 한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길은, 나(우리)만이 아닌, 다른 사람(들)과 함께 누리는 행복을 지켜줄 법치주의 실현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디.

 
(5-5) 인권 및 사회정의 운동을 교회의 핵심사명과 분리할 수 없는 것으로 봅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캐나다 모는 국민을 위한 건강보험제 창설지지, 공산주의 중국을 국제연맹(UN)이 인준해야 한다는 운동전개 (공산주의를 인준하는 일이라는 반대가 있었음), 여성목사 안수제 처음 창설, 미소냉전체제 비판, 원주민 말살정책비판과 사과운동 전개 (이를 “복음을 모독하는 일”로 보고, 반대가 있었음), 최근 인권운동의 하나로 세계 여러 교파들에서 논란이 되는 “동성애자 목사지망 자격 인준” 문제도 캐나다 연합교회가 가장 먼저 다루기 시작했었습니다.

 

<이 동성애자에 대한 물의는 캐나다연합교회 안에서도 “진보”와 “보수”가 대립되어, 반대 입장을 천명하는 “Community of Concern”이라는 조직이 생겼었으나, 교회분열 사태로 번지는 일만은 삼가했습니다.>

<성서의 예언서들은 당시 잘못된 종교(유대교)와 정권(왕권)에 대한 비판의 소리들었는데, 연합교회는 성서의 이런 전통을 소중하게 유지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곧  “제사장적” 사명만이 아니고 “예언자적” 사명에도 충실해야 한다는 입장이라고 하겠습니다.>
 

(5-6) 다른 종교를 대하는 입장이 다름
한인 기독교인들에게는 교리를 앞세우고 일체의 다른 종교를 부정해야만(개종의 길을 통해서만) 기독신도가 될 수 있다는 식으로 배워온 것과는 달리, 캐나다연합교회는 (교리를 앞세우지도 않고, 또  우리와는 달리 개종의 길을 통하지 않고 기독교인으로 태어나고 성장하기 때문에) 다른 종교를 부정하려하지 않고, 함께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웃)의 종교이기에, 이해하려는 입장입니다. 더 나가서 배울 것이 있으면 배우기도 하고, 서로 협조한다는 입장입니다.


<추가>

캐나다 연합교회의 독특한 점을  신학과 실천 면에서 그 특징을 요약해서 추가한다면;

(1) 성서해석에 있어서 교파주의적인 교리에 매이지 않고, 참으로 학자적 성찰에 철두철미 정직하려는 점이며,
(2) 성서해석에 있어서, 개인주의적인 입장에서 끝나지 않고, 공동체 입장에서 성경이야기의 본뜻을 찾아내려 하고,
(3) 실천에 있어서 “사회정의”를 구현함으로 모두가 다 같이 한님 나라를 체험할 수 있게 하는 일을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으로 삼는 점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이상 열거한 캐나다연합교회의 “독특한” 점들이, 이민온  한인 기독교인들에게  “장점”으로 알려지기보다는 “단점”으로, 더 나가서  “이단”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여기에는 한국이민 기독교인들의 신앙풍토에도 그 원인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2. 내가 보는 한국이민교인들의 풍토

    -캐나다에서 한인연합교회 성장하기 어려운 문제들-     

(2-1) 극소수를 빼고 절대다수 한인교역자와 전체 한인교인들이 연합교회 교역자나 교인이 되기에는 너무나 다른 교회풍토에서 자랐습니다. 캐나다연합교회 입장에서는, 캐나다에 온 한인들이 교회를 세우려고 할 때, 장로교회나 감리교 계통이면 그저“연합교회”로 보게 되어 있었고, 이민초기 한인교회를 창설한 이들은 다 캐나다 연합교회와의 관련을 맺고 온 사람들

이었습니다. 그래서 교회 이름을“한인연합교회”라고 하기 쉬웠을 것입니다. 행정 상의 문제에서도 자선단체로 등록하고 세금공제 헌금영수증을 발급할 수 있는 길이 연합교단 소속교회로 등록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이민온 한인기독교인들은 전부가 한국의 각 교단소속 교인들이었습니다. 캐나다 연합교회를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교회행정을 연합교회 식으로 맞춰가기가 한국에서 오랜 교회생활을  한 이들

에게는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한가지 예를 들면, 연합교회에서는 재정문제를 장노가 다루지 않고 재정부원이 다루게 되어 있습니다. 장노교인 이 보면 제직회가 장노(당회) 상위에 있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연합교회가 시작된 일에 대해서 두 가지 상반되는 평을 할 수 있겠습니다.
 “새 대륙에서 교파를 초월해서 새로운 교회생활을 할 필요가 있다.”는 평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과연 성공했느냐? 고 질문해보면, 실패했다는 답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연합교회라고 이름은 부쳤으나 교회행정 등 모든 면에서 한국의 교파교회를 그대로 따랐던 것이 사실이고, 교인들은  “연합교회 교인”들이라기 보다는 한국의 “장로교인”, 감리교인”, “침례교인”들이었습니다.

둘째 평은,“잘못했다. 처음부터 한국의 각 교단교회를 세웠어야 했다.”는 평이겠습니다. 이민초기에 한인

“연합교회”에 나오던 이들도 얼마 지나면서는 그들의 종전 교파교회를 세우고 나갔고,“연합교회”라는 창설시 이름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교회들까지도 목회내용과 성격에 있어서는 그 교회 교역자의 출신교파를 따라가게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2-2) 한국 교파교회

한국인 이민들이 많아짐과 동시에 각 교단교역자들이 많아지면서, 장로교 목사는 캐나다 장로교회에 소속하는 절차를 밟고, 교회 이름도“캐나다 한인장로교회”로 하게 되기도 하고, 한국교단과 관련을 맺거나, 또는 독립해서 특정 교단교회를 세우면서, 한국과 같은 교파교회 이름을 쓰는 경우도 점점 많아졌습니다. 그리고 교인들이 모여 교회를 세우고 교역자를 이민초청하는 경우에도, 교파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새로 이민 오는 한인 교역자들의 입장에서는 들어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연합교회”를 세울 이유가 없는 것이고, 평신도들의 입장에서도 “고기도 놀던 물이 좋다”는 속담대로, 이미 익숙해 있던  교단교회에 나갈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캐나다 연합교회 측에서도, 이민자들이 자기 교회에 들어오기를 바라는 것도 아닙니다. 들어노려는 경우 반대도 핞겠지만.)

(2-3) 한국의 군사독제 정부와“연합교회”문제
군사독제 시 토론토 한인연합교회가 반독제(민주화)

운동에 앞장 선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이 교회를 위시해서,“민중신문”이나“십자군”을 통한 민주운동이 있었으나, 다른 교회나 교역자들은 드러내 놓고 이런 운동을 한 경우는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다.

 

더욱이 캐나다 연합교회 총회가 한국의 민주화(반독제) 운동을 공식적으로 지지했기 때문에, 당시 한국정보

부에서는“이민교양강좌 등을 통해서, 이민교인들이 연합교회를 멀리하도록 했습니다. (한인“연합”

합교회를“공동번역성경을 쓰는 교회”라고 했음.)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디른 교단교회들이 더 성장하고, 교회 수도 많아지게 되는 동안, 한인“연합”교회는, 내가 캐나다로 온 그당시의(1978) 교회 수나 지금의 교회 수에 차이가 없을 정도로 멈춰섰습니다.

(2-3) 동성애자 문제 (연합교회“이단 시”여론 문제)

이렇게 교파교회 일색으로 변해진 풍토에서 캐나다

연합교회의 독특한 점들을 <위 1. 번 “내가 아는 캐나다 연합교회”에서 언급한> “장점”으로 인식되기

보다는“단점”으로 보일 뿐 아니라, 더 나가서“이단”시하는 여론이 지배적이었습니다.

타 교단교역자들이 캐나다연합교회를“이단”시 하게 된 것만이 아니고, 연합교회에서 목회하는 역자들까지도“

이단”은 아니더라도, 연합교회의 독특한 점들을 수적인 교회성장을 막는 치명적인“약점”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연합교회의“다른점”을“장점”으로 보는 여론이 많아도 어려운데, 이렇게 된 상황에서, 한인연합

교회가 다른 교단교회들처럼 교인이 많아지고, 큰 교회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것은, 산에 연못을 파놓고 바닷물고기가 모여들기를 바라는 것과 같은 격이라고 하겠습니다.

(2-4)“연합교회”목회자들과 교인들 문제

연합교회의 장점을 말하는 타 교단교역자가 한 사람도 없을 것은 당연하겠지만, 심지어 연합교회에서 목회하는 교역자들 중에서도 교회성장을 위해서는 연합교회를 탈퇴해야 좋겠다는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려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연합교단에 소속해 있으면서도 종전 교단교회 신학과 목회방법을 떠날 필요를 못 느끼는 분들이 태반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심지어 한인연합

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도“신앙고백적인”입장에서 연합교회의 입장을 따를 수 없다는 이도 있었습니다.

당시 연합교회 교역자들은 다 한국에서 교파신학을 졸업한 이들이었습니다. 그 후 몇 년 안 지나자 캐나다연합교회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이들이 많아졌습니다. 이들이 졸업하면서 한인교회 목회를 맡게 되는“물가리”가 이뤄지면, 한인연합교회가 제대로 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캐나다 한인연합교회 협의회에 신학생들도 준회원으로 참석하게 하는 안이 통과된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졸업했을 때, 한인연합

교회들은 여기서 신학을 공부한 새 교역자들을 수용하지 안했습니다. 목회경험이 없다는 것이 큰 이유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교육과정에서 백인교회 목회실습도 마친 이들이어서, 백인 교회 목회자들로 빠져나가는 결과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들이 백인교회에서 5-6년 목회하면서, 연합교회 노회나 총회차원에서 “지도자로” 성장한 다음에 한인교회로 돌아오면, 바람직하게 되리라는 기대를 걸고, 한인연합교회 협의회에 “백인교회 한인목회자들도 준회원으로 해서 협의회에 참석하게 하자”는 안이 통과되기도 했었습니다.>

 

한인연합교회들은 한국에서나 미국에서 교역자들을 초청할지언정, 캐나다(백인)연합교회에서 시무하는 한인목회자들을 초청하는 예는 거의 없었습니다.

“한인교회 목회경력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한인목회자들 중 목회경험이 있는 교역자를 찾는다면 그는 연합교회를 모르는 교역자임이 분명한데 (이런 이들의 목회경력은 연합교회가 아닌“타 교단교회”를 위한 경력인데), 이런 이들만 청빙해놓고“연합교회”

가 제대로 되기를 바라는 것은 역시 앞뒤가 맞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또 한가지 문제는 여기서 공부한 이들 중 한인연합교회 교역자가 된 이들이 간혹 있어도,“연합교회”식으로 목회해 나가기가 어려울 정도가 아니고, 불가능함을 체험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앞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소위 한인“연합교회”교인들이“연합교회”

교인들이 아니고,“한인교단교회”교인들이기 때문에,“궁합”이 안 맞은 것이었습니다. 결국 교역자가 자기 입장을 교인들의 눈높이에 맞춰야하는 경향이 생기면서, 여러 면에서“연합교회”와는 더 점점 거리가 멀어져 왔습니다.

(2-5) 타 교단목사를 연합교회 목사로 인준하는 절차 문제:
캐나다에 와있는 한국인 목사는 다 연합교회가 아닌 타 교단목사들이었기 때문에, 연합교회목사로 인준받는 절차를 밟도록 했었는데, 여기에 더 큰 문제가 있었

습니다. 네 가지만 지적하면;

(2-5-a) 이런 절차를 밟도록 되어있었으나,

“한인연합교회” 목회한지 십여 년이 지나도, 이 과정을 마치지 않아도, 그대로 넘어가는 판국이었습니다. 이런 경우를 막기 위해서“18개월 이내로 인준 절차를 마쳐야한다.”는 새 규정을 마련해보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한 세대가 지난 지금의 평가는“실패”한 것으로 된 모양새입니다.

 

(2-5-b) 연합교회목사로 인준 받아야 이곳에서 목회도 할 수 있고, 이에 수반되는 혜택도 (교단 직장보험 및 건강보험 등) 받기 때문에 일단 이 과정을 거치기는 하되, 목회방식은 종전 교단교회에서 익힌 그대로 해도 연합교단에서 어떻게 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만일 연한교회교단에서 개입하는 경우가 있을 수는 있으나, 거의 불가능한 경우일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해당 교회교인들이“우리 목사가 연합교회 Manuel에 위배되는 목회를 합니다.”하고 노회에 시정요청을 해야 할텐데, 타교단에서 뼈가 굳어진 교인들이, 목사님이 하시는 모든 일을 그저 그런 것으로 알지, 연합교회 매뉴얼을 공부해서 그 조항을 들고 문제를 제기할 경우는 거의 없는 것입니다. 비록 이런 경우가 생기더라도, 노회에 목회자를 걸고 시정요청을 할 정도라면, 그 교회는 이미 교회내분의 길을 가게 마련이지,“연합교회”로 시정되고 성장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2-5-c) 만일 교역자는 모든 면에서 조금도 하자없이 연합교회의 인준을 받을 자격을 가추고, 또 정말 연합교회의 좋은 점을 알기 때문에, 그런 목회를 하려고 해도, 한국에서 자란 원로 교인들이나 일반 교인들이 생소한 연합교회 식을 따라 갈 수 없기 때문에, 다수 교인들이 익숙한 종전 목회방식을 따라가게 마련이어서, 이름만“연합”교회인 경우가 태반이었습니다. 

(2-5-d) 인준 청원자가 소속한 한국교단이 현대신학의 성서해석학을“이단”으로 정죄하는 교파일 경우도 있었습니다. <한 가지 쉬운 예를 든다면, 모세5경의 저자를 모세라고만 (모세가 죽었다는 이야기도 나오는데) 가르치는 경우 등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인준절차 교육이 인준을 받기 위한 형식에 불과한 일종의 낭비일 수가 있었습니다. 이런 교파신학 풍토에서 이미 굳어진 이들에게 바랄 수 없는 결과를 기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성서해석학에서 이미 세계수준의 신학훈련을 쌓은 분들에게는 간혹 이 인준절차에서 요청하는 과목 중에는 불필요한 것, 시간과 돈의 낭비가 되기도 했을 것입니다. 

(2-5-e) 연합교회의“개척교회”정책 문제
위에서언급했던,“타국에 연합교회 교파교회를 설립하려는 선교정책이 없다”는 데에도, 교회성장을 저해하는 간접적인 원인이 있다고 봅니다. 캐나다 내에서 연합교회를 세우는 일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개척교회를 세우려면 교단의 승인이 (백인교회의 경우에도) 있어야 하는데, 그 절차가 한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거의 불가능해 보일 정도입니다.

 

다른 교단교회에서는 교회를 개척하려는 교역자만 있으면 그 개인의 역량이나 소명의식등에 달린 것으로 보게 됩니다. 그러나, 캐나다 연합교회를 개척할 경우에는, 그 절차가 매우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이유는 새 교회를 개척할 경우 개척하려는 목사 개인의 역량이나 소명의식에 달린 일로 보지 않고, 그 목사에 관한 모든 일을 보증할 책임을 교단이 진다는 입장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사례비, 주택비, 교통비, 건강보험, 직장보험까지도 지불할 재정능력이 확실히 보증되었을 때에만, 교회개척을 인준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개척하기 이전에, 그 지역에 대해 “교회개척 가능성 조사”가 (Feasibility Study, 인구동태에서부터 모든 사회학적 여건조사) 되어져야 하는데, 가능성이 있다는 결론이 나야,“00선교지”(00 Mission)라고 노회가 인정하게 되고, 교역자도

“초청”할 수 있게 됩니다. 내가 목회할 당시(2000년 이전) 적어도 1년 경비로 50,000불정도가 보증되어 있어야 했습니다. 어떤 큰 교회가 있어서 지 교회를 설립하려는 든든한 장기 재정보증이 없이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토론토 인근지역에 한인 연합교회가 몇개 생긴 일이 있었으나, 그것은 개척교회들이라기 보다는, 대부분 교회분열을 거듭하면서 생긴 교회들이었습니다.)

 

(2-5-f) <추가>

초기 한인이민사회의“사회적 계층”문제

 

이 교회와는 직접 관련이 없는 문제이지만 수적인 성장과 관련이 있는 것이어서 말합니다. 대체로 처음 한인(연합)교회가 (그 것도 비교적 큰 도시에서) 생길 당시에는, 아직 한인이민사회가 되기 이전, 교육계, 의료계, 국가공무관계, 등  한정된 범위의 사람들 위주로 모이는 일종의 침목회와 같은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들 중에는 이미 미국에서 서구문화에 익숙해진 이들도 많은 편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해서 “영어권층” (“엘리트” 의식을 갖게된 층”) 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후 캐나다가 한인들에게도 이민길이 열리면서, 한인사회가 다양한 계층사회로 바꿔졌습니다. 나중 온 사람들을 “비영어권 층” 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둘을 구분 해 보는 이유는 연합교회보다 타 교단교회가 교세에 있어서 더 커지는 과정에 있었던 중요한 문제 하나를 언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전자가 후자를 무의식중에  “멸시”하는 인상을 주기도하고, 받기도 하는 사례들이, 연합교회에서 한국교단교회로 분립하는 과정 뒤에 숨겨긴 동기 중 하나였습니다.

 

<이런 일도 이젠 다 옛말이 되고, 근래에는, 돈의 크기가 이민조건으로 되면서부터는, 비교적 전에 온 사람들을 통틀어서 “원주민”이라는 말로(비하해서) 불려지기도하는데, 초창기 연합교회 교인들은 “원주민”들 중에도 태고적 원주민에 해당하고, 이민사회의 뒷방 노인이 되어가지요. 그러나 아직도 이들의  알게 모르게 저질은 “터줏대감 행세”가  “한인이민자 교회”를 “캐나다연합교회”에 접목시키는 일에서는 비참할 정도로 낙제했다고 보해야 옳을 것입니다.>

 

3. 교회에 동참하신 여러분들은 어떤 이들이고, 어떤 미래를 생각?

 

<나는 독일 함부르크 신학대학 대학원에서 (1970  세계선교학 시간에, “캐나다연합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듣고, 교회연합운동의 성공한 실례로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일이라는 점에 감탄했엇습니다.>

 

그런데 내가 캐나다로 올 때, 캐나다 한인연합교회에 대해서 잘못 알았던 것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한다면, 당시 에드몬톤 한인연합교회는 물론, 캐나다에 있는 모든  한인연합교회들이 “연합교회”라는 이름으로 불린다고 해서, 그 교회 교인들까지도 다 “연합교회

교인”들인 줄로 생각했던 것은 나의 착각이었다는 말입니다.

 

20여년을“연합교회”에서 목회하다가 은퇴할 무렵에는 사정이 달라졌을까? 하고 묻는다면,“마찬가지였다”

는 대답이 정답일 것 같습니다.


그런데 금년이(2010현재로) 내가 은퇴한지 9년이

되는데, 캘거리 한인연합교회에서는, 유다른 일을 보게 됩니다. 이 교회가 걸어온 길을 교회 웹사이트에서 읽어보시고 최근에 스스로 찾아와 공동체를 이뤄가시는 여러분들은, 연합교회에 대한 남달은 열정과 굳은 결단을 하고 오실만한 어떤 동기가 있었던 분들로 보입니다. 앞에 열거한 역 조건들에 대한 제 말을 들은 다음에도,“우리가 마땅히 할 일을 하며 사는 모습을 보이는 길 말고 다른 길이 없습니다. 과거 경험을 보아도, 예를 들면, 사회정의운동을 함께 하면서도, 교회까지 옮기는 (보수적인 교회에서 떠나는) 사람의 수는 극히 소수였습니다.”는 등의 소견을 말해 주신 분도 계셨습니다. 내가 목회하지도 않은 이 공동체에서, 이런 체험담을 듣게 된 일은 꿈에도 생각치 못했던 일입니다. 이런 내 이야기를 들을 이유를 가진 사람이 이 세상에 많지는 않겠지만, 캘거리 한인연합교회 여러분들을 위시해서 몇 몇 분은 계실 것이라고 믿어지기에, 지난날을 되돌아보고 앞날을 내다보며, 제 생각을 글로 적어 보는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특히 서구에서), 기독교가 종전과는 달리 감소하는 추세에 들어섰는데, 이런 추세는, 성경

이야기가 보여주는, 참된 기독교(회)의 본모습을 부정하는 현상이 아니고, 잘못된 기독교에 대한 거부현상이라고 보면 어떨까요? 참다운 기독교를 갈구하는 새 세대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참된 교회의 이상을 바로 키워나갈 수 있는 길은 없을까요?

 

앞에서 캐나다 연합교회에 대한 긴 소개가 있었지만, 연합교회를 아는 것이 우리의 목적은 아닙니다.  모르면서 아는것으로 착각하는 “우물안 개구리 기독교인” 됨의

수치를 탈피하는 교양을 갖추기 위한 것 정도로 보면 좋을 것입니다. 우리의 현실은 성경이야기가 알려주는 기독교 신앙의 본모습을 찾고 실천을 시도해보는 일이겠습니다. 결코 연합교회가 제일이다.” 생각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위에서 열거한 점들은 다 한인연합교회가 수적인 성장을 바랄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도 분명히 말해 줍니다. 그런데도 이 교회에 스스로 찾아와 동참하는 경우는 캐나다 전역에서 찾아볼 수 없는, 극히 드문 일입니다. 이는“돌연변이” 현상이라는 표현밖에 다른말이 없어 보입니다. 

 

<이하 추가>  

여기에는 두 가지 자세가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1)“성장을 발랄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참하는” 자세와,

(2) “사실을 사실대로 알지 못한 채 막연한 기대나, 변하게 마련인, 어떤 인연만으로 동참하는 자세”,

 

문제는 이 둘 사이에는 그 결과에 있어서 엄청난, 너무나 큰, 차이가 생길 것이라는 것보다 더 큰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곧 이 두 가지 다른 자세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없고, 두 입장이 하나의 분명한 공동목표를 세우지 못할 경우에는, 하나의 건전한 공동체를 이뤄낼 수도 없고, 지속해나갈 수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교단교회들과 같은 수적인 성장을 기대할 수 없는 형편에서 생긴 현실적인 문제를 하나 더 예로 든다면, 학부형 교인들로서 커가는 자녀들의 교회생활을 보살펴야 할 책임은 가중되기만 할 뿐, 그 대책도 해결의 길도 없어 보인다는 문제일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성경의 답은 성경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다고 나는 보고는 있습니다. (첫 성경이야기 인 에덴동산 이야기를 시작으로 해서, 첫 신앙공도체의 형성인 출애급기에 나오는 이야기와, 신약의 초대교회에 관한 성경이야기에서 말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민한국인 기독교인의 풍토를 두고보면, 이 교회에 어떤 교역자가 와도 수적인 성장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인데,“수적인 성장이 불가능한 교회”라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지금 이 교회에 교적을 두신 여러분들은 최근의 체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는 일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교역자를 모실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 재정능려을 갖출 수 없는 “교회아닌 교회”(?)로 될 수 밖에 없다는 말이 됩니다.

 

 <이 “교회 아닌 교회”가 참 교회가 될 수 있다는 성경 이야기의 답에 대해서는 다음에 추가 하겠습니다.>

 

그런데, 만일 이 교회가 다른 교단교회들과 비슷한 교회가 된다면, (그렇게 될 수도 없겠지만,) 이 지역에 이 교회가 하나 더 있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다른 교회와 비슷한 교회라면, 없어져도 될 것이고, 없어지는 것이 더 옳고, 좋은 일이 아닐까요? (한국인이민인구가 자꾸 늘어나는 추세라도, 그럴 이유를 대기가 어려울틴데…)
 

 

.  지역사회에서 뒤늦게 생긴 캘거리 한인연합교회의 특성과 어려움

 

캐나다 다른 지역에서는 대체로 한인연합교회가 이민초기에 세워진  유일한 교회들이었습니다. 이 교회에 어떤 문제가 (그 중 많은 것은 장노선거와 관련된 것) 생길 때마다 교회가 갈라졌습니다. 한두번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민인구가 증가하면서 더 심해졌고, 이 때마다 한국의 각양 교파교회가 더 많이 생겨났습니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세월이 지나면서 한인 연합교회보다 타 교파교회들의 수도 압도적으로 많아졌고, 교세도 더 커지는, 달라진 한인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대체로 맨 처음 생겼던 한인연합교회가 오래동안 어느 특정 지역에서는 (두손 꼽을 정도로 몇 안되지만) 그 기반이 (인맥등) 비교적 잘 다져진 편이어서, 아직까지 그 맥을 이어가는 편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유독 캘거리 지역에서는 한인연합교회는 타 교단교회가 기반을 잡고, 이미 성장기에 들어서려는 무렵에, 어렵게 생겨난 교회입니다. 그 과정을 봐도, 그 특정 교단교회의 반대라는 역풍을 거슬러가야 했습니다. 그 것도 이 지역사회 문제가 아니고, 한국의 독제정권 문제를 두고, 뚜렸한 반독제 입장을 가진 몇 사람이 주축이 되어 창립된 교회였습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단 한번도 자타가 인정하는 “교회다운” 교회로 <이 말의 성경적인 본뜻은 앞으로 더 찾아봐야하겠습니다만.> 지역사회에서 자리맥임해 기회를 갖지 못해왔습니다.

 

이 교회 창림예배에 설교자로 초청받았던 내 기억에서 가장 큰 문제는, 목사와 교인들 관계 문제였다고 생각됩니다.

 

한번은 임시 교역자를 모셨는데 (아주 초기에), 그 한 분이 두 교회를 시간을 달리해서 시무하도록 되어있었습니다. 이 분은 다른 교단목사로 타 지역 한인연합교회를 시무하다가, 은퇴하신 분이었습니다. 이 분을 동시에 시무하게 한 다른 한 교회는 바로 이 교회가 분리해나온, 그 교회 였습니다. (이분의 목회가 이 두교회 중 어느 교회의 성장에 더 도움이 되었을지?) 이 분은 그분의 자제분 목사를 이 교회 담임 목사로 초청하게 하는 (이민)절차를 밟았답니다. 그 과정에서 연합교회노회의 인준을 받지 못했던 것으로 들었습니다. 이 교회에는 별 도움이 안되는 세월이 흘러간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창립후 비교적 짧은 기간에 교역자 한분을 노회의 인준절차를 거치고, 담임목사로 청빙할 수 있었을 때는, 이 교회가 지역사회에서 정말 자리맥임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기대가 컸었습니다. 그런데 이 지역에  “성령파 운동”의 물결이 일때, 교역자와 교인들 관계에서 문제가 생기면서, 교회창림에 동참했고, 성장에도 기여해 오던, 창립자 가족들이 모두 (한 가정만 남고!) 타교단 교회로 가버리는 일이 생겼던 일은, 이 교회의 존속에 치명적인 타격을 남겼고, 그 후유증에세 아직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내가 이 교회와 비교적 정기적인 관계를 맺게 된 계기는 교역자도 교인도 없어져간, 이 무렵이었습니다. 몇 명 안되는 이들이 가정집에서 모이던  일이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창림자 문장노님께서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손을 놓지 않으시고, 일편단심 애쓰신 것은,  “어떤 대가를 치르드라도, 교역자를 모신 교회로 다시 일으킨다!” 일념이었던 같습니다. 구체적으로 경제게획도 세우고, 그  실현을 위해서 사셨던것으로 압니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목사인 나도, 그후 줄곧 이분의 생각과 꼭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곧 우선 교역자를 모신 교회를 세운다는 생각에 끌려가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구심점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라고 하겠지요.

 

이래서 교역자의 자원봉사 형식으로 연명하던 때, 내가 이교회 모임에 강사로 초청받은 일이 있어서 들렸었

습니다. 그때 제직회를 구성하도록 하면서, 교역자 청빙건을 담당하는  “목회인사위원회”를 두도록 권고하고, 그 회장직을 자원하기까지 하면서,  예산에 “목회자 청빙기금” 항목을 둬서 헌금하는  일도 시작하도록 했었습니다.  

<다수가결로 통과되었는데, 반대하신 분이 한분 계셨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목사라면 다 가질 수 있는 이런 생각이,  곧 목사를 구심점으로해서 수적인 성장을 바라는 마음이 속깊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 갗습니다. 바로 이런 내 관심이, 앞에 인용한 편지의 한 구절이 (…교인 수가 늘고 교회가 커져가는 것이 다시 우선시되는 의도를 접하면서…) 쓰여지게 한 이유중의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고 문장노님과 다른 것이, 내게,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곧 문장노님은“언젠가는, 어딘가에서, 누군가를, 적임자를 모셔온다.”는 생각만을 줄곳 하고 계셨던데 반해서,

 

나는 언재부터인가, 전연 달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적임자는 어디에도 없다.”는 생각과 동시에,“문장노님 자신이, 교역자가 되는 길 밖에 달은 답은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었습니다.

 

드디어, 이런 나의 생각을 그분도 받아드리게 되었고, 필요한 준비를 시작했었습니다.

 

그러나,이 교회는 이런 기회까지도 허락받지 못했었습니다. 그리고 만 15년이 흘러갔습니다. 앞으로 15년도 이렇게 흘려보내야 할까요? (“언젠가는, 어딘가에서, 누군가를, 적임자를 모셔온다.”는 것을 목표로 삼고, 또 15년을 말입니다.)

 

. “목자들”의 교회

여기까가지 이르자, 내 생각은 엉뚱한 길로 튀었습니다. 앞에서,“문장노님, 본인자신이, 교역자가 되는 길 밖에 달은 답은 없다.”고 했던 그 생각이 되사라나면서, 이 교회 현실에 적용시켜서,“남아있는 교인들 자신이,

“교역자”가 되는 길 밖에 달은 답은 없다.”는 생각으로  비약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전통적인“목사”라는 말을, 기독교의 (예수님의, 그리고 성경이야기의) 근본 정신에 맞게 승화시켜야 할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교역자”를 부르는 호칭“목사”를 “목자”

라는 말로 대치하면 좋겠다고 생가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교역자”라고 불으기는 어색

(불가)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을 분명히“선한 목자”라고 하셨습니다. 전통적으로도 주님을“선한 목자”라고 볼러왔습니다. 예수님의“제자”가 되어야 하는 우리들은“선”자는 빼고,“목자”라는 말로 불으기 시작하면, 익숙하게 되기도 할 것이고, 신앙생활에 큰 도움도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교역자를 모시게 된다면 그 분을 “목사님”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분도“목자님”으로 부르는 것도 몸에 익히게 될 정도로 되다면, 좋은 점이 많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을“왕중 왕”이라고도 하는데, 성경에는 아주 일찍부터“왕”을 악한 존재로 보았었습니다. 그 대표적

인 예가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로 착취한 바로 왕이었

습니다. 그후 이스라엘에 왕 제도가 도입되고, 다웟왕을 이상적잉 왕이 되기를 바랄 때, 악한 “왕”과 대립

되는,“선한 목자”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왕은 힘을

(권력) 자기를 위해서 백성을(다른 사람, 他者) 착취하는데 쓰는데 반하여,“선한 목자”는 온 힘을, 자기자신을 위해서가 아니고,“타자”(他者, The Other)를 위해 쓰는 분을 상징하는 말로 썼던것입니다. 예수님은, 왕과 갗이 크신분이지만, 악한 왕과 대조

되는, 선하신 왕이라는 뜻으로 썼던 말입니다. 이런 상징적인 뜻의“목자”라는 말은 참된 기독신자의 심성과 행동을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인 것입니다. 이렇게 아주 단순한데, 곧 힘을 어떻게 쓰느냐에서, 참된 교회의 모습이 들어나는것입니다. 이점이 바로 에덴동산 이야기의 첫째와 둘째 계명이기도 한 것입니다.

 

“목사”라는 용어에는“돈으로 산 교역자”또은“싻군 교역자”라는 세태의 냄새가 배여있(을 수가 있)게 되어

버렸지만, 담임 교역자님을 (우리만이 아니고, 모든 약자를 위한“선하신 목자”이신 예수님의 뒤를 밟으

시는)“00목자님”으로 불으며, 함께 기독 공동체를 이루는, 은총을 체험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00목자(목사)님”본인도 돈 안 받고 목회하고 싶다.”

는 마음을 품으셨다고해도, 교인“목자”들은,“필요한 것을 다 체워주시는”한님의 뜻이 실현되게하는“귀한 그릇”으로 변신하게 되는 체험을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고, 복된 일릴까요?

 

“교인”이라는 사람(양떼들)이“전통적인 교회”를 위해서 바쁘게 돌어가는 것이(심한 경우엔 착취?) 아니고, 선하신 목자께서 주시는 안식을 함께 체험하는 공동체를 시도해보는 신앙생활!

내가“행복한”, 그리고 남을 (他者 The Other)

“행복하게 하는”교회! 누구나 다 동참하고 싶어할 교회! 돈 때문에 교역자를 모시지 못하는 일은 없을 그런 교회!

 

위에서, 창립에 동참했던, 가족들까지도 다 타교단

교회로 가버린 일을“치명적인 타격”이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그후, 문장노님은“사철에 봅바람 불어있고, … 라는 찬송을 제대로 불을 수가 없으셨다고 들었습니다. 흐르는 눈물을 막을 길이 없어서요. 형제들을 잃은 고독과 괴로움에, 몸부림치셨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교회가 가정을 파괴하는 비극. 무엇인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 아닐까요?

 

그후 그때의 타격은 여러분이 주역을 담당했던 최근 이 교회역사에서도 고대로 들어났다고 봅니다. 여러분이 다 아시는 대로, 얼마 전, 여기에 7년간의 긴 세월을, 한 분 교역자의“자원 봉사”형식의 열정에 힘을 모아, 연명해올 수 밖에 다른 길이 없었던, 그 사실도 이런 후유증의 결과가 아닐까요?  

 

여기서, 내 생각에 또 하나의 비약이 생기면서, 더 큰 문제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이 교회가“운명적

으로”안고 있다고 보이는 문제입니다. 이 회는

“전통적인 목사가 없는 교회”, 새로운 “목자들의

교회”의 길을 개척해야하는“운명”을 (“한님”의 뜻이라는 뜻에서의“운명”) 가야하는 것이, 이 교회의(우리들의) 사명이 아닐까? 하는 질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 되시는지요?

 

한 사람만 남는“교회아닌 교회”가 된 일이 교역자가 없을 때가 아니고, 매번 다 교역자를 모실 수 있었던 때에 발생했습니다. 심지어, 창립자 본인이“목사”가 되려는 그 길까지도 허락받지 못했습니다!

 

최근에 교역자를 모시지 못한 일은“돈 때문”이 아닐까요? 하고 묻는 이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보이기도 하지만,“돈 때문”이라기 보다는“돈에 대한 생각”때문이라고 해야 옳지 않을까? 하는 생각

도 들지만, 아마 정답은“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한 답에서 혼돈이 생기기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가“바라는 교회는?”참 교회는? 한님의 원하시는, 한님의 뜻에 맞는 교회는? 우리에게 독이 되지 아니하고, 정말 약이 되는 교회는? 모두에게 불행을 안겨주는 교회가 아니고, 모두에세 행복을 낳아주는 교회는? 이런 물음에 하나의 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참된 기독교 신앙생활의 본 모습을 성경 이야기는 어떤 것이라고 말해 주고 있는지를 탐구하고, 정직하게 시도해 보는 새 길을 가야하는 “운명”(사명)을 피해서, 다른 길을 헤매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가 가야 할  “외길”을 피하거나, 못 찾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앞에서, “교회 아닌 교회(?)” 또는 “교회답지 못한 교회(?)” 라고도 했었는데, 남달은 특성을 지닌, 이런 교회는 있을 수 없는 것일까요?

이런 사람들에게 (다른 이들에게는 그들에게 맞는 교회가 있는데!) 맞는 참된 교회다운 교회는 없는 것일까요?

성경 이야기가 말하고 있는 교회의 본질은 어떤 것일까요?

 

우리 교회가 생존해야할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교회가 생존해야 할 형태나 방법은 무엇일까요?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게 되십니까?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라고 묻지 않는데는, 그럴 이유가 있어서입니다. 역시 에덴동산이야기의 뱀의 뜻과도 관련된 일이어서, 이에 대해서도, 앞으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이런 우리만의 질문에 대한 답은 한 두 편의 글로 찾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정직한 시도를 계속하는 과정에서, 시행착오도 거치면서 체험할 수 있을 답만이 정답일

것입니다.

 

. 교회의 내용과 교회의 형태에 대한 우리 생각의 문제

 

교회를 말할 때 우리는 교회생활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교회생활은 기독교 신항생활을 두고 하는 말

입니다.

 

이 기독교 신앙생활에는 내용이 있고, 그 내용을 담은 그릇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내용은 신앙의 정신이라고 보면 되겠는데, 업격히 말하면 성경 이야기의 본뜻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내용은 그릇에 담기는 물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경계해야할 오류가 생길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내용을 물과 같은 것으로 생각해서 좋겠다고 보이지만, 이 내용과 그릇과의 관계에 대한 우리 생각에서 오류가 생깁니다.

 

물은 꼴이 없습니다. 세모꼴 그릇에 담기면 세모꼴로 보이고, 네모꼴 그릇에 답기면 네모꼴로 보이고, 둥그런 그릇에 담기면, 둥근 꼴로 보입니다. 그러나, 물은 이런 어떤 한 가지 꼴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할 때, 장노교파의 교회생활만 아는 사람은, 장노교 형식의 교회생활만이 참 신앙의 내용을 따라 산다고 착각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또 감리교파 교회생횔밖에 모른 사람들은 자기들 만이 참 시앙생활의 내용을 따라서 산다고 착각할 것입니다. 곧 자기 교파의 교리라는 그릇에 담김 물만이 생수이고, 자기 교파 신학이라는 그릇에 담긴 물만이 생수라고 착각하기 쉽다는 말입니다.

 

이는 세모꼴에 담긴 물만이 참 물이고, 다른 꼴에 담긴 물은 참 생수가 아니라고 착각하는 것과 같은 짓입니다.

 

이런 착각이 비일비재함을 한걸음 더 나가서 생각해보면, 마치 목사, 장노, 권사, 평신도 등으로 어떤  “위계질서” 형태의 특정 교파교회생활밖에 모르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자기가 잘 아는 어떤 특정한 전통적인 형태(꼴)에 맞는 교회 생활만이 참 신앙생활이라고 고집하는 짓은 잘못이라는 말입니다.

 

한님을 믿는 참 싱앙생활은 한님의 말씀(내용)에 따라서 빚어지는 삶의 어떠 현태를(꼴, 모습을) 이뤄가는 과정

입니다.

 

인간이 처하게 되는 어떤 환경에서든, 한님의 말씀의 본뜻에 따라서, 우리 모두의 불행을 극복하고, 우리 모두의 행복을 창조할 수 있는 어떤 형태(꼴)의 삶이든, 이런 삶을 살게 된다면, 그것이 다 참된 신앙생활일 것입니다.

 

꼴이 내용을 좌우하는 것이 아니고, 내용이 꼴을 잡아주는 것으로, 바꿔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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