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미국의 교수가 되었나? -한겨레 토론마당

by 운영자 posted Jun 04,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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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미국의 교수가 되었나?

먼저 시간강사 한 분이 자살하였다는 소식에 매우 가슴이 아프다. 울고 싶을 정도이다.

나는 한국에서 지방 국립대학을 나오고, 그 대학에서 석사를 하고, 고등학교 교사와 전문대학 교수를 지냈다. 그리고 1987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왔다. 전문대학 어느 과의 학과장을 지내던 내가 그 직장을 던지고 유학을 오게 된 것은 결코 집안이 부유해서가 아니었다. 내 부모는 아주 소농을 하는 가난한 농사꾼들이셨다.

내가 유학을 온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하나는, 내가 석사학위를 한 그 대학의 그 과에서 내가 가장 입학 성적이 우수하여 입학 당시 입학금 전액을 면제 받았지만, 나중에 동급생들의 치열한 아부 전쟁에서 나는 무참히 지고 말았던 것이다. 석사과정의 학비까지 부모님께 의지할 수 없어서 나는 고등학교 교사를 하면서 대학원을 하였는데, 직장이 없는 일부 동급생들은 지도교수의 충실한 심부름꾼으로 전력을 다했다. 그런데 그들이 지나치게 나를 경쟁의 상대로 여긴 나머지, 나와 지도교수의 사이를 엄청나게 이간질 시켰다. 심지어 그들은 지도교수의 부친상을 당했는데도 학교 밖에 있는 나에게 알려주지 않아 장례가 지나고 난 다음에 알게 되는 결례를 해야 했다. 일이 이 지경이 되고 보니 지도교수가 나를 달갑게 여길 리가 없었다. 나는 조교 자리를 비롯하여 모든 기회에서 철저히 배제 당했다. 나는 아부하는 능력이 없는 데다가 왕따를 당한 것이었다. 나는 늘 겸손하였으며 교수에게 나쁘게 대한 적이 없었지만 한국의 대학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것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1980년대에 이미 그러하였으니 지금은 더 했으면 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듣고 있다.

내가 유학을 떠나게 된 두 번째 이유는 당시에 전문대학에서 학생 모집 때면 항상 겪던 인간적인 수모 때문이었다. (석사 학위를 받은 얼마 후 나는 전문대에 취직이 되었다.) 당시 그 전문대에서는 학생을 모집하기 위하여, 교수들은 누구든지 서무과에서 당시 돈으로 기백만원을 대출 받아 고등학교들을 방문하고 3학년 교사들을 만나 음식 대접을 해야 했다. 그리고 학생 한 사람의 원서를 써 주는 댓가로 4만원에서 5만원까지 사례비를 주어야 했다. 말하자면 신입생을 돈을 주고 사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한 고등학교를 출입하는 전문대학의 교수가 나 뿐이 아니고 다른 학교에서도 오는 것이어서, 걸핏하면 고등학교 교사들은 "XX전문대는 5만원 준다던데" 하면서 불평을 하여 하는 수 없이 돈을 더 쓰는 수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학생 모집이 끝나면 남는 것은 빚에다가 술병(病)이었다. 나는 그런 인간 이하의 교수가 되느니 차라리 외국에서 굶주리며 유학하는 길을 택하겠다고 마음 먹었다.

한국에서 영어 교수를 지내다 유학을 왔지만 처음 유학을 와서 언어 때문에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 나는 유학을 와서 영문학을 전공했지만, 나중에 차츰 하다 보니 나같은 가난뱅이가 학교에서 거의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영문학 공부를 하는 것이 심히 어리석게 생각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공부하여 사회에 크게 기여할 것 같지도 않았다. 나는 고민 끝에 전공을 더 실제적인 분야로 바꾸었다. 그리고는 박사과정에 들어갔다. 흔히 한국에서 석사를 하고 미국에 와서 다시 석사를 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이것은 현명한 것이 아니다.

어쨌든 나는 가난 때문에 한눈 팔 사이도 없이 공부에 전념한 나머지 남들보다 더 먼저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런데 정작 학위를 받고 보니 한국에 돌아갈 수가 없게 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학부, 석사는 영문학을 공부했는데 박사학위는 다른 전공으로 했다 하여 한국의 대학에서 채용을 안 하려고 했다. 매우 재미있는 것은, 한국의 대학에서 싫어하는 이 다른 전공을 미국의 대학에서는 더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미국인들은 나더러 두 가지를 전공했으니 더 넓은 관점에서 사물을 볼 수 있으니 좋겠다는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나는 귀국하여 겪게 될 난관 때문에 한국에 가지 않았다. 이것은 무엇보다 내 아내의 강력한 주장이 그러하였기 때문이었다. 아내의 주장은 두 아이들을 데리고 고국에 돌아가 직장도 없이 거렁뱅이가 되기는 싫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내의 그런 주장은 옳았다. 양가 부모들이 모두 가난하니 무슨 재주로 우리를 먹여 살렸겠는가?

어쨌든 한국에 갈 수 없게 된 나는 내가 박사학위를 했던 대학에서 post doctoral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는 미국 대학에 지원을 하였는데, 몇 군데서 인터뷰를 했다. 그런데 정작 가장 어려운 것은 인터뷰였다. 인터뷰 과정에서 물어보는 질문에 미국인들 식으로 요령있게 대답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흔히 인터뷰 과정에는 학생들을 위해서나 교수들을 위해서 약 한 시간 동안 발표를 해야 하는데 이것도 처음에는 상당히 힘든 일이었다. 어쨌든 나는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 한 대학에서 교수로 채용되었다.

그 대학에 근무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전체 대학에서 한국인 교수가 딱 나 한 사람인 환경이어서 의사소통이나 문화적인 차이 때문에 항상 나만 두드러져 나타난다는 사실이었다. 다행히 같이 근무하는 미국인들이 대부분 친절하게 대해 주어서 그런 어려움을 어렵게 극복하였다. 그리고 지금은 어느 주립대학에서 정년 보장을 받고 교수로 근무하고 있다. 이 글에서 생략한 많은 내용이 후배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지만 글이 길어질 것 같아 생략한다.

어쨌거나 내가 미국의 교수가 된 것은 한국의 풍토에서 내가 배겨나지 못했던 것과, 학위를 받은 후에 돌아갈 수가 없었다는 이유이다. 가끔 한국 분들이 "왜 한국에서 교수를 하지 않나요?" 하고 물을 때면 나는 "한국에서 교수를 할 실력이 없어서요" 하고 대답하는데, 이것은 어떤 면에서 전혀 틀린 대답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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