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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를 인정할 때 이해가 시작된다

(마가복음 8: 28~30)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빌립보의 가이사랴에 있는 여러 마을로 길을 나서셨는데, 도중에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엘리야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베드로가 예수께 대답하였다.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엄중히 경고하시기를, 자기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

 

  1. 사진은 진실을 담는가?

19세기 중엽에 미술계는 일대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바로 이 시기에 인상파 화가들이 등장하면서 미술계뿐만 아니라 문화예술의 전반에 큰 영향을 끼칩니다. 한 획을 긋는 역사의 변곡점에는 큰 변화를 추동하는 이유들이 있습니다. 인상주의의 등장 배경에는 카메라와 사진의 등장이 한몫을 합니다. 사진이 처음 나온 지는 조금 더 오래되었지만 사진다운 사진이 나오게 된 것이 19세기 중엽 크림전쟁 때였습니다. 이때 세계 최초로 종군 사진기자가 등장했습니다. 바로 옥스퍼드 대학 출신의 본업은 변호사인 로저 펜튼입니다. 그는 큰 마차에 카메라와 현상을 위한 감광물질을 바른 유리판을 싣고 다녔습니다.

전쟁 중에 군인들의 생생한 모습이 찍혀 있는 사진을 본 사람들은 모두 놀랐습니다. 물론 이 당시에는 피사체가 꼼짝하지 않고 15초 이상 버티고 있어야 제대로 된 촬영이 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전쟁사진이라지만 인위적인 설정에 의해 찍힌 것들이죠. 그것을 알리 없는 사람들에게 사진은 충격이었습니다. 이 충격은 미술계에도 영향을 미쳐서 더 이상 실물과 똑같이 그리는 화풍은 의미가 없다고 느끼게 된 것입니다. 이런 반성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 모네, 마네, 로트렉 등으로 대표되는 인상파 화가들입니다. 시대가 지남에 따라 카메라가 더욱 발전하면서 점점 더 정확하고 선명한 사진들이 대거 등장합니다. 그럴수록 미술계는 인상주의에서 후기 인상주의를 거쳐 표현주의에 이르기까지 점점 추상화됩니다.

이와 같은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사진은 실재 있는 그대로를 담고, 미술은 작가의 주관적인 의도나 심상을 담는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진이 등장하고 한동안은 사진을 기술의 관점으로만 생각했지 예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화가들도 사진사들을 기술자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순진한 생각입니다. 사진도 사진 찍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 같은 피사체도 다르게 연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사진은 진실을 말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정치인들과 언론, 특정 이익단체들은 사진을 많이 이용합니다. 사람들의 사진에 대한 고정관념 덕에 효과는 큽니다. 그러나 세상에 나오는 모든 표현수단들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미술뿐만 아니라 사진, 영상 등 모든 수단들은 특정한 사람들의 특정한 의도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즉 표현도구의 문제가 아니라 표현도구를 이용하는 사람의 문제입니다.

 

  1. 우리는 진실을 모른다.

이와 같이 사람은 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 그대로 생각하고, 있는 그대로 표현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시선은 의도를 가지고 어느 방향을 주시하고 관심이 가는 대상에 포커스를 맞춥니다. 그리고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는 편견, 고정관념에 따라 대상을 해석하고 판단하고 분류합니다. 사실 오해된 정보를 이해되었다고 생각하고 단정적으로 말합니다.

심리실험을 통해 밝혀진 사실에 의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서는 타인이 오해한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이 타인에 대해서는 정확히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주변 사람들을 판단할 때 고민없이 이렇게 말할 때가 많습니다. “00는 좋은 사람이야.” “00는 나쁜 놈이야. 성격이 너무 급해.”, “00는 너무 내성적이라 말수가 없어.” “00는 냉정한 사람이야.” 우리는 이와 같이 타인에 대해서는 속단하고 쉽게 말하는데 반면 자신에 대해서는 이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너희들이 날 어떻게 알아.” “너희들은 날 이해 못해.” “내가 겉으로는 이렇지만 속으로는 그렇지 않아.” “네가 말하는 내 모습은 나의 아주 일부일 뿐이야.” 라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도 사람들에게 많은 오해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이적을 보면서 사람들은 저마다 다르게 예수님을 이해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엘리야의 환생으로, 어떤 사람은 세례 요한의 환생으로, 어떤 사람은 다윗의 뒤를 이을 메시아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수제자인 베드로에게 물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불렀습니다.  마태복음에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표현이 하나 더 붙어있습니다. 그에 대해 예수님의 반응도 마태복음과 마가, 누가복음과 차이가 있습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자기에 관해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반면 마태복음에는 이러한 고백을 하는 베드로에 대해 먼저 격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시몬 바요나야, 너는 복이 있다. 너에게 이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시다.

나도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다. 나는 이 반석 위에다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 죽음의 문들이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마태복음 16: 17~19)

그런 다음에 자신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엄명을 하십니다.

그리스도는 그리스어로 크리스토스(Χριστὸς)라는 말로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을 가집니다. 우리는 쉽게 베드로의 고백과 예수님의 상찬을 통해 베드로가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있다고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혹은 메시아라는 단어 하나로 예수님을 구세주, 하나님의 아들, 성자 하나님까지 엮어서 이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라는 단어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로마의 통치와 그리스 문화권에 속하는 당시에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는 왕을 뜻합니다. 왕위를 계승할 때 기름을 붓는 전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대인의 전통에는 왕뿐만 아니라 선지자, 대제사장도 기름을 부어 직위를 계승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이 예수님께서 왕, 선지자, 제사장의 삼중직분을 가지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도 로마 시대의 황제를 일컫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로마의 황제들은 보통 죽은 후에 신격화가 이루어집니다. 선제가 신이 되면 황제는 자연스럽게 “신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고백한다고 하더라도 같은 고백을 하는 사람에 따라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닐 수 있습니다. 정작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를 ‘인자’ 즉 ‘사람의 아들’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해석도 분분 한데요. 먼저 ‘사람의 아들’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이 단순히 인간 예수와 하나님 예수를 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면 전혀 반대로 하나님의 아들은 황제를 뜻하는 것이므로 오히려 인간 세계의 통치자를 뜻하는 반면 사람의 아들은 다니엘서 7장에 나오는 ‘인자’와 같은 의미로서 하나님과 같은 권세를 가진 신적 존재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제가 볼 때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변론하는 데 애를 쓰시지 않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변증하는 복음서 기자들이 더 열을 올리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는 데 전력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께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신 그분의 정체에 대해서 따지고 있기 보다 그분이 애쓰셔서 공들이셨던 하나님 나라에 대한 메시지에 집중해야 하지 않을까요?

 

  1. 오해를 인정하는 데서부터 이해가 시작된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경험의 한계, 신체와 사고의 한계를 가진 인간은 자신의 한계와 경험 안에서 특정한 프레임을 가지고 상대를 이해하려고 합니다. 이런 이해는 결국 오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사람은 자신 스스로는 진실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과 뜻이 다른 타인은 오해를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른 이해와 진실에 나아가려면 우리의 한계를 알고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내가 보든 것도 전부가 아니라 부분일 뿐이고 다른 사람이 나와 생각이 다른 것도 틀려서 일수도 있지만 내가 보지 못한 다른 부분을 보았을 수도 있다는 인정이 우리를 진실의 세계에 한걸음 더 다가가게 만듭니다. 사진도 하나의 프레임으로 찍은 사진 보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를 여러 프레임으로 찍은 사진을 볼 때 그 당시의 현장을 보다 사실과 가깝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저는 성경의 구성도 이러한 한계를 인정하는 지혜의 산물이라 생각합니다. 모세오경은 같은 사건을 다르게 묘사하고 바라보는 여러 문서를 종합해서 서술하고 있는 책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의 창조이야기와 2장의 창조이야기가 다릅니다. 그리고 아내를 누이로 속여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도 아브라함이 두 번 이삭이 한 번 모두 세 번의 유사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것을 모두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약의 복음서도 마찬가집니다. 예수님에 대해 조금씩 다른 견해를 가진 복음서가 네 개나 실려 있습니다. 처음 성경을 읽으시는 분들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을 지나 누가복음을 읽을 때쯤이면 왜 이렇게 같은 사건, 같은 이야기들을 세 번씩이나 반복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런 지혜가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부터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하나의 제국아래 하나의 종교는 하나의 기준만 있어야 한다는 통일의 강박 속에서 종교회의를 통해 주류와 다른 의견들은 이단으로 정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와 같은 독단과 어리석음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볼 수 있습니다. 진실에 다가가는 지혜는 오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내가 아는 것이 정확하지 않을 수 있고 부분일 뿐이라는 겸허한 자세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최근 들어 하나의 이념을 강요하는 사람들과 단체들의 과격한 행동들이 세계 곳곳에서 보입니다. 세계정세의 불안과 공포로 인해 발생하는 혐오와 배타를 자양분으로 삼는 나쁜 권력자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습니다. 참 그리스도인 참 교회라면 이런 정치지도자들에게 동조하여 혐오를 조장하고 소수자들을 배척하는 데 앞장서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그들을 견제하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문화를 지키는 데 앞장서야 합니다. 인간 세상 속에 진리는 오직 한 사람, 혹은 한 단체가 독점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독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이 바로 비진리입니다. 각 부분들이 서로 연대하고 소통하는 가운데 진실에 조금이나마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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