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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말에 찔려 죽다

(잠언 4: 23~27) 그 무엇보다도 너는 네 마음을 지켜라. 그 마음이 바로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왜곡된 말을 네 입에서 없애 버리고, 속이는 말을 네 입술에서 멀리하여라.

눈으로는 앞만 똑바로 보고, 시선은 앞으로만 곧게 두어라.

발로 디딜 곳을 잘 살펴라. 네 모든 길이 안전할 것이다.

좌로든 우로든 빗나가지 말고, 악에서 네 발길을 끊어 버려라.

 

1. 바른 말에 찔려 쓰러지다

정혜신 박사는 그의 책 <당신이 옳다>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욕설에 찔려 넘어진 사람보다 바른말에 찔려 쓰러진 사람을 과장해서 한 만배쯤은 더 많이 봤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제 머리에 가장 강력하게 남는 구절이 이 구절입니다. 제가 바른말에 넘어져본 경험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바른말이랍시고 남들에게 상처를 줬던 기억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저는 항상 제 스스로를 돌아보고 조심하지 않으면 어느새 무례한 말, 날카로운 말, 단정적인 말, 과장된 표현들을 쏟아 내면서 상대방을 못살게 구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오래전부터 고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만 쉽게 고쳐지지 않습니다.

저같이 바른말 잘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말을 강조하기 위해 이런 말들을 잘씁니다. 솔직히 말해서”, “진짜”, “나 뿐만 아니라 다들 그렇게 생각해.”,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도저히~한번도~”, “~처음이야, 처음본다.” 와 같이 강조하는 표현을 잘 씁니다. 그러나 진심이라는 말도 계속쓰면 진심인지 의심받게 되고, 진짜라는 말도 계속쓰면 진짜인지 의심받게 되고, 솔직히란 말도 계속 쓰면 솔직한지 의심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는 변명들이 있습니다. 나는 둘러 말하지 않고 솔직하게 말할 뿐이다.”, “나는 말할때 뿐이지 뒤끝이 없다.”, “쓴소리도 들을 줄 알아야지, 그렇게 속이 좁아서 어디에 쓰겠니?”, “다 너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나 아니면 너에게 이런 말 해줄 사람이 있는 줄 알아.”

이런 말버릇들을 잘 살펴보면 타인에게 상처를 주면서 자기합리화 할 뿐만 아니라 상처를 받는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시키기도 합니다.

더더구나 저는 말을 많이 하는 일을 하다 보니 실수가 더 많았습니다. 예전에 청년부를 담당할 때를 생각해보면 날카로운 비수 같은 설교를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그 시절에는 강대상에서 좋은 말 잘하는 목회자들은 약장수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불같이 진리를 선포하고 통회와 회계를 촉구하는 설교가 진짜 설교라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이 생각이 다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다 맞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예레미야처럼, 아모스처럼 불같이 책망하고 회계를 촉구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 많은 부분은 약한 자를 일으키고, 곤궁에 처한 자를 위로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 더 많아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모스와 예레미야도 책망의 말씀과 함께 회복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은 대상과 시기와 장소에 따라 적절해야 합니다. 아로 새긴 은쟁반에 놓은 금사과처럼 경우에 합당한 말이 사람을 살리고 시대를 선도합니다.

 

2. 팩트는 팩트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처럼 바른말 충동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못마땅하고 답답하고 한심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에게 충고를 해주고 잔소리를 해줘야 할 것 같은 사명감에 불탑니다. 나 아니면 아무도 이런 이야기를 해주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이 기분 나빠 하더라도 십자가를 지는 심정으로 지적질을 꼭 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말을 하기 전에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로 여러분이 옳다고 믿는 것, 여러분이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정말 옳은 것인지, 정말 진실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가만히 보면 사람들에게 하는 상당부분의 충고나 지적질은 자신의 주관적인 기준이거나 자신만이 생각하는 진실일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안식일날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비롯해 다양한 병자를 고치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이 분이 “다윗의 후손이 아닐까?”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다윗의 후손이란 자기 민족을 해방할 메시아를 뜻합니다. 이적을 보고 있는 그대로 느낀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비뚤어져 있던 바리새인은 예수님의 이적을 보고 “귀신의 왕 사탄의 도움으로 귀신들을 쫓아낸다.”고 말합니다. 바리새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율법 공부를 많이 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항상 지혜롭고 옳은 말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께서 자신과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이 못마땅했던 것입니다. 못마땅한 시선으로 예수를 보니까 예수님의 이적도 사악하게 계략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진실을 말한다고 스스로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마음이 굽고, 생각이 굽다 보니 판단도 굽고, 말도 굽습니다.

그런 바리새인들을 보며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은 함부로 지껄인 모든 말에 대해서 심판 날에 해명을 해야 한다.

네가 한 말에 따라서 네가 무죄가 되기도 하고 유죄가 되기도 할 것이다.”(마태복음 12: 36, 37)

여러분의 생각과 말이 진실과 관계된 것인지, 나의 왜곡된 감정에서 비롯된 것인지 자신을 잘 돌아본다면 팩트라는 이유를 달고 타인을 비난하는 일을 쉽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둘째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여러분의 말이 실제 진실이라 하더라도 그 진실이 불편한 진실일 경우에는 신중하게 전해야 합니다. 이전 설교에서도 말씀드린 바 있듯이 사람은 이성적인 동물이라기 보다 감정적인 동물입니다. 합리적인 말에 설득당하기 보다 공감하는 말에 마음이 움직입니다. 다윗이 자신을 힐난하는 미갈에게 했던 말은 팩트입니다. 미갈의 아버지와 아들들은 전쟁에서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승승장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이렇게도 재수없게 말할 수가 있을까요? 저는 이 사건으로 미갈의 태가 닫혔다기 보다 미갈의 마음문이 닫힌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미갈의 경우와 같이 되돌이킬 수 없거나, 지금 당장 받아들이기 어려운 불편한 진실은 그것이 진실이라 하더라도 말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만약 상대방에게 꼭 필요한 진실이라 느낀다면, 그래서 불편하더라도 말하는 것이 그 사람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말하기 전에 고려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이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해도 될 만큼 사랑과 관심, 따뜻한 말로 신뢰를 쌓아 놓았나 돌아보십시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진실을 말하는 것은 당신의 몫이 아닙니다. 그리고 깊은 신뢰관계가 아님에도 그런 말을 하고 싶어하는 것은 당신이 오지랖이 넓거나 상대를 사랑하기 보다 못마땅하게 생각하기 때문일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말이 화가 되어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3. 말을 담는 그릇

말이란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자신의 말투를 돌아보며 반성해보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시중에는 화술에 관련된 많은 책들이 있습니다. 화술이라는 주제는 워낙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주제라 언제나 잘 팔립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화술에 관련해 한두가지 전문적인 스킬을 알고 있습니다. 상대방의 표현을 그대로 요약정리해서 말하기, 나-전달법으로 말하기 등 많은 요령을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말투는 변하지 않는 것일까요? 말투를 바꾸려면 말투에 관련한 요령을 아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나쁜 말투를 고치기 위해 화술을 익히는 것은 민들레 가지를 꺾는 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꺾인 민들레는 금방 다시 자랍니다. 민들레를 제거하려면 보이지 않는 뿌리 깊숙한 곳까지 파내려가야 합니다. 말습관도 마찬가집니다. 말그릇이라는 책을 보면 “말은 배운 대로 하기보다 입에 배인 대로 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말습관을 바꾸려면 말을 담고 있는 그릇을 재정비해야 합니다. 말을 담고 있는 그릇이 바로 우리 마음입니다. 아울러 그릇과 함께 말이 나오는 배관도 청소하고 재배열해야 합니다. 말이 나오는 배관이 언어습관, 언어구조를 뜻합니다. 마음을 바꾸지 않고 말만 바꾸다 보면 처음에는 사람들의 반응이 좋을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이 어려워합니다.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마음과 말이 다르다 보면 대하는 사람도 본능적으로 느낍니다.

오늘 본문에는 마음을 지키라고 합니다.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 왜곡된 말, 속이는 말을 제거하라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마음과 말은 상호적인 관계라 할 수 있습니다. 좋은 마음을 통해 좋은 말이 나오게 되고, 좋은 말을 통해 좋은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나무가 좋으면 그 열매도 좋고 나무가 나쁘면 열매도 나쁘다 열매로 그 나무를 알 수 있다.

선한 사람은 마음 속에 쌓인 선으로 선한 말을 하고 악한 사람은 마음 속에 쌓인 악으로 악한 말을 한다. (마태복음 12: 33, 35)

오늘 본문은 말을 제어함으로써 좋은 마음을 가지는 것을 말하고 있고, 방금 읽은 마태복음 12장에는 선한 마음에서 선한 말이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선하고 강한 마음을 가지려면 내 마음그릇 이곳 저곳에 금 가고 상처 난 곳부터 찾아서 보수해야 합니다. 사람들과 대화하다 보면 특정 주제나 특정 언어에 참지 못하고 발끈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함부로 말하고 비난하고 깎아내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평소에 점잖던 사람이 그런 말들을 하고 있을 때면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마음 어딘가에 상처가 나서 그 영역은 자라지 못한 채 어린 아이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어른아이”라고 부릅니다. 저는 다윗에게도 어른아이가 있지 않았나 추측해봅니다. 다윗은 여덟형제 중 막내입니다. 사무엘이 찾아와 아들을 보자고 했을 때 다윗의 아버지 이새는 다윗을 제외한 일곱형들만 보여줍니다. 이것만 봐고 다윗이 가정에서 어떤 대우를 받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한 사람으로 취급받지 못하고 아버지와 형의 심부름꾼 취급받던 다윗에게는 강한 인정욕구와 막내 컴플렉스가 있을 수 있습니다. 미갈의 책망은 다윗의 어른아이를 건드린 것일수도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금 가거나 벌어진 상처를 치료하고 얽혀 있던 매듭을 풀어야만 “어른아이”는 다시 자랍니다. 마음이 강하고 건강해지면 바른 생각을 하게 되고 바로 보게 되고 바로 말하게 됩니다.

그와 아울러 좋은 언어습관을 가지기 위한 노력도 필요합니다. 마음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마음그릇에 좋은 언어, 정확한 어법들이 담겨야 합니다. 그리고 단어와 단어들이 지혜롭게 조합되어 나올 때 그 말은 빛이 나고 힘이 있습니다. 좋은 말은 단순히 입바른 소리, 아첨이 아닙니다. 말하지 말아야 할 때와 해야 할 때를 아는 것이고, 간결하고 쉽게 하는 것이고, 중언부언하지 않는 것이고, 바르고 정직한 말이며, 사랑과 따듯함을 잃지 않는 가운데 나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쉬운 일이라 할 수 없습니다. 평생의 과업이라 할 만합니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철학자 하이데거의 말처럼 언어를 통해 우리는 존재하고 소통합니다. 우리를 나타내고 드러내는 것은 언어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언어를 가지는 것은 곧 좋은 나가 되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보다 좋은 나가 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간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우리들 모두 나이가 들수록 좋은 말, 지혜로운 말, 경우에 합당한 말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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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중이 2019.09.09 20:51
    참으로 어렵고 힘든 훈련이 바로 "말"인듯해요. 하루에도 여러번 정신 바짝 차리고서 입을 간수하지 않으면 실수하기가 십상입니다. 말도 말이지만 심성 또는 성정을 다듬고 잘 간수하려 하면서도 하루에도 몇 번씩 후회하는 일들이 생기곤 하는걸 보면 아직도 멀은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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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에르 2019.09.14 13:33
    저도 동감입니다. 말을 길들이기 어렵고, 말이 나오는 마음을 변화시키기 더 어렵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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