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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31 15:49

선악과의 뜻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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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서4:26-32   사무엘 상서  15:36                                                  

한님나라 ”?  “사탄나라 ”?                  2015/8/31            이재형목사    

 

<2015/6/14 캘거리 한님교회에서 했던 설교문을 기초로해서 보완, 추가한 글입니다.>

<“한님이란 용어에 대해서는 앞에 실린 원고 하나님”? “하느님”? “한님교회”? (1)를 참고해 주십시오.>

 

<…>이런 괄호 안에 이렇게 작은 글씨로 쓰인 대목은 읽지 마시고, 글씨로 쓰인 설교 본문만을 계속 읽어 가시기 바랍니다.

읽어보시고 싶으면, 설교본문을 (몇번) 읽고 다음에, 참고로 읽어 보시고요. >

 

마가복음서 본문을 읽으면서, 지난 2,000년간 기독교의 문제는 씨의 자람 아니고, “무슨 씨를 심어왔는냐?”라는 질문이 먼저 생겼습니다. 한님나라 ?”, “사탄나라 ?” 심어 왔느냐? 라는 질문이 앞섰습니다.

 

<지난 주일 에드몬톤 한인연합교회 설교에서선악과 뜻을 가지 법조문으로 풀어 설명했었습니다.>

오늘은 선악과 뜻을 ( 가지 법조문만이 아니고) 가지 경우(우리 실생활)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풀어 설명하겠습니다. 그리고  2000년간 에덴동산 이야기가 어떻게 전수되어 왔는지를 보겠습니다. 인류가 직면하는 현실적인 문제의 해결은 고사 하고, 바로 보지도 못하게 만들뿐 아니라, 문제를 알송달송 흐리게(혼돈) 만드는 과오를 범해왔다는 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선악과 이야기가 서양으로 가서 전해온 역사와 문제점

선악과라는 열매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다 것입니다. 보기만 하면 당장 먹고싶어 죽을 지경에 빠질 정도랍니다. 이때, 사람 마음은 먹을까 말까 망서리기라도 하지만 (뱀과의 대화), 사람 몸은 당장 달려들어 죽더라도 먹고보자!” 식이어서, 훌쩍 먹어버렸다는 겁니다.”

 

<에드몬톤에서 선악과 이야기의 전수역사를 대목까 말했었는데, 오늘 다음 이야기를 계속하면 이렇습니다.>

잠시 숨었다가 발각되어 심문을 받습니다. 후에 죽습니다. 슬하에 아들이 있었는데, 형이 동생을 죽입니다. 동생을 쳐죽인 이런 아들이라도 있었기에, 그를 통해서 사람족 후손이 지금까지 내려온 거랍니다.

 

그런데 사람 부부가 열매를 먹었을 당시에는, 아직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후손들은 조상이 죽었는지 이유를 몰랐습니다.

 

그후, 사인이 밝혀집니다. 부인이 죽인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은 마무도 없었으니, 타살은 아니고, 자살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사람의 죽음은 자살이라는 이 성립됩니다. 죽음은 잘못 살아온 결과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먹지 말았어야 독초나, 쥐약 같은 것을 먹었다든지, 몸과 마음에 무리한 스트레스를 주면서 잘못 살아와서, 죽을 병에 걸려 죽었다 든지가, 일종의 자살이라는 입니다.

 

그런데,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난 다음에, 그가 죽은 이유는, “먹지 말라 선악과라는 열매를 먹었기 때문이고, 그가 말라는 것을 기어이 먹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돌았습니다. 이야기가 글로 적어 경전으로 보존됩니다. <물론 요즘같이 흔한 출판물이 아니고, 손으로 것으로 시작됩니다.>

 

희랍과 로마시대를 거치면서, 사본이 서양으로 들어갑니다. 무렵 가지 새로운 이야기가 나돌았습니다. 이번에는 하나님이 창조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고, 처녀의 몸에 하나님의 영기가 임해서 사람이 태어났고, 어떤 일로 죽임을 당했는데(타살),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하늘로 올라갔는네 얼마 다시 온다고 기다리고 있다는 니다. <이 이야기에도 기독교가 2000년간 게으르기 짝이 없이 잠꼬대만 해 왔다”,  “반성의 여지가 많다.”는 정도가 아니고, 잘못 흘러오고, 잘못 흘러가고있은 인간고의 역사에 공범자라는 누명을 써서 당연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으로 봅니다.> 이야기도 글로 적어, 앞에 말한 것과 합본되어, 기독교의 경전으로 보존됩니다.

 

이야기를 어떻게 가르쳤고, 어떤 문제가 생겼나?

기독교는 이야기들을 주로 성전 벽에 그림을 그려서 가르쳤고, 교리도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캐톨릭교에서 파생된 모든 기독교의 경전 이해와, 교리의 기본이 됩니다. <물론 경전이 대중화 것은 최근의 일입니다.> 수천년 그림으로 가르쳐진 내용은, 경전에 있는 수도 없이 많은 이야기들 중에, 특별한 이야기들과, 둘째 사람에 대한 것들 얼마를 골래낸 것이 전부였습니다.

 

문제는 내용이 제한되었다는 것보다, 그림들이 이야기의 본뜻까지를 바로 전할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문제에 대해 착안한 사람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이런 식으로 2000 전해진 것들이 성경 이야기들의 본뜻과 같을 확율은 극히 낮습니다. 경전을 직접 읽어볼 있게 것은 지금부터 얼마 되지 안했습니다. 그야말로 긴긴 암흑시대를 거쳐오는 동안, 전연 제대로 다듬어지지도 않은 , 본뜻을 찾는 노력도 없이, 교권유지를 위한 교리에 같혀, 수준 이하로 허왕되게, 나돌아 다닌채로 방치 됐습니다.

 

인류 역사상 아주 최근에 이르러서야 서구에 과학이 급성장하고, 세계 최첨단 문명을 이룩했습니다.

기독교가 이런 서구문명 등에 엎혀서 왔기 때문에, 기독교 이야기의 질도 짜임새 있는 것으로 보고(오해하고), 맹종하는 데서 생긴 폐단이 많습니다. 앞으로도 본뜻이 잘못 이해된, 잘못된 씨가, 마구 확산되는 데서 생길 어려움과 혼돈이 것입니다.

 

여기서 발생하는 가장 문제는 경전에 담긴 이야기들이 민간신앙으로 전해온 전통 그대로 이어질뿐이었다는 점입니다. 속에 담긴 모순에도 아무런 이론적인 작업도 없이, 교리적인 노력만 있었지, 참된 적인 탐구가 없이, 적당히 넘어가는 동안, 거짓과 위선이 종교체제 속까지 파고 들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면죄권 판매로 성당건축비를 충당하려 했던 등이겠습니다. 이 면죄권판매 행각은 종교개혁으로 끝났다고 보기 쉬운데,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금까지도 기독교의 흐름이 성경의 예언자적 종교의 혼을 잃업버리고, “네 죄를 사하노라.”는 식의 성전종교일변도로 치달려온 기독교회 성장역사에, 어 두운 그림자로 따라왔던 것입니다.  아무도 부인 못할 실예를 하나 더 든다면, 심지어 우주의 자연질서의 법칙을 말하는 과학자를, 잘못된 교리를 근거로해서, 사형에 처하기도 , 교리의 부당함을 말하는 성직자를 파문하기도 했던 과오 등입니다.

                                                                                                             

이야기가 서구가 아니고 동양으로 들어왔다면?

만일 (기독교)이야기가 서구로 드러가지 않고, 인도문명권이나 중국문명권으로 들어갔다면, 어떻게 을까? 하는 상상을 보게 됩니다. 이야기 안에 내장된 무한한 지혜가, 당시 교권의 절대적인  “”(권력,권세) 유지를 위해 만들어진 교리에 질식당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훨씬 짜임새 있고, 멋진 이론체계로 자리잡혔을 것이라는 상상을  해보게 됩니다.

 

인도문화권에서는 이미 있었던 힌두교의 민간신앙으로 전해오던 이야기들이 그대로 전해온 것만이 아닙니다. 그런 바탕에서도, 기독교보다 훨신 앞서서, 볼교의 뛰어난 이론체계를 만들어놓았습니다. 현대 과학문명 앞에서도 허구성이 들어나지 않는 것만이 아니고, 오히려 과학계에 새로운 발전이 이뤄질수록, 이론체계의 심오함이 증명되고 덧보이게 되어갑니다. (물론 아직도 불교를 빙자한 사기행각 있긴 할 겁니다.)

 

중국문회권에도 고대부터 전해오던 이야기가 인간의 이성적인 지혜를 담는 그릇으로 전수됐을 뿐아니라, 사람의 수신 대해서, 허황됨 없는 작품을 완성해냈습니다.

 

문제는, 서구인들이, 과학문명과 함께 들어온 기독교만을 최고급종교로 오인한데서 생깁니다.

겨우 200여년 전부터 급발전한 현대 서구과확문명의 찬란한 빛에 눈이 부신, 비서구 사람들이, 중에서도 특히 기독교인들이, 서구에서 들어온 기독교의 허구까지도, 제대로 갖춰진 이론 체계이고, 유일무이한 진리요, “최고급종교로, 오인하게 되면서, 잘못 변종된 씨가 마구 퍼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씨비유의 의도까지도 무색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서구에서 선악과 이야기를 그림으로 어떻게 가르쳤을까요? 고작해야 과일 나무 밑에 벌거벗은 남녀가 있고, 나무에 뱀이 그려져 있는 것이 전부입니다.

 

원죄라는 말은  2000 동안 일초도 쉴새없이 앵무새처럼 내뱉아오면서도,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했는지? 사람의 마음과 행동에 무엇이 문제인지? 사람이 사람과 어울려 살아 없게 하는 현실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불행의 원인이무엇인지?  , 경전 맨 앞에 나오는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못본채 흘러왔고, 흘러가고 있습니다.

 

이런 그림은 기껏해야 남녀간의 성관계를 유혹으로 생각하게 하는 결과가 고작이었습니다. 성에 대한 죄의식을 심화시켰습니다. 사람이 추구할 최고의 가치는 성을 부정하는 삶이기나한 것처럼, 극단적인 문화를 창출하는가 하면, 반대로 성개방이란 하나의 극단적인 문화로 치닫는 , 마치 인간의 문제는 성문제 밖에는 없는 것처럼 되어 것이 서구 기독교문화”(?) 풍토였습니다. 성경의 에덴동산 이야기를  마치 남녀 둘만의, 개인적인 문제만을 취급하는 것으로, 본뜻과는 달리, 축소해석을 해버리는 데서 가장 문제중의 하나입니다. 인간을 오직 성적존재만으로 보는 오류가  기독교이 잘못된 교리중심적인, 잘못된 성경해석에서 발원했다고 하겠습니다.

 

사람의 가지의 기본적인 욕망들은 각각, 마치 다른 욕망들은 없고, 어떤 가지 욕망만 있는 처럼, 거의 광적인 행동에 몰입시켜 버리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사람이 특정한 가지 어떤 욕망에 목숨 걸고 대결하는 식의 금욕주의는 병적인 부작용을 동반한다는 사실을 역사적 사실이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 몸이 생겨먹은 대로 모든 기능과 욕구가  균형을 잃지 않게 사는 삶의 지혜를 개발하는 방향으로 가르쳤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데서 위선이라는 거짓 성의 사람의 눈을 부시게 하고, “성의 가려 그늘진 곳에 생기게 마련인 고뇌가 일때마다, “ 죄를 사하노라 마디가 만병통치 약인듯, 그리고 아무 일도 었다 , 역사의 시간을 흘려보냈습니다.  면묜죄권 판매행각이 중세에 끝난 것이 아니고 이런 예식에 숨겨저 내려오고 있습니다.  

 

선악과 이야기는 사람의 개인적인 관계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중에서도 특히 성관계만을 다룬  이야기는 더더욱 아닙니다. 선악과 이야기는 사회적인 관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싶다마음

사람이 몸으로 하는 모든 행동은 무엇을 보거나, 듣거나, 생각할 , 생기는 (~먹고싶다, ~하고싶다, ~갖고싶다, ~보고싶다, ~듣고싶다,등등) 원초적인 마음에서 비롯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생기는 ~싶다 마음은 내게만 생기는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에게 같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싶다 마음은 철두철미 자기 중심적이어서, 한치의 양보도 능력이 없는 것이 본성입니다. 사람이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하지만, 개개인에게 생기는 ~싶다 마음은 철두철미 반사회적입니다. < 물론 개개인의 “~싶다 마음이, 집단적 이익을 계산하고, 집단(부족이나 국가) “~싶다 커지는 경우가 생기지만, 다른 집단과의 관계에서 보면, 여전히 적대관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19세기 식민주의 시대에 비해서 지금은 국가간의 적대관계가 국제질서라는 이름으로 많이 다스려지는 추세이긴 합니다. 그러나 모든 나라들의, 예를 들면, 특히 조선반도를 둘러싼 중국, 일본, 러시아, 미국, 강국이 각각 한치도 양보할 없어하는 개의 “~싶다 역사에 전례가 없을 정도로 첨예한 대립각을 세워, 지구상에서 먹구름장을 띄우고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산다는 말은 사회적인 관계를 바로 맺고 산다는 말인데, ~싶다 개인주의적인 마음이 에덴동산에서(한님 나라에서) 살지 못하게 했다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마치 아주 어린 애기들이 처음에 하는 모든 행동에서 있는 것과 같습니다. 애기는 자기의 말고, 다른 입도 있다는 사실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조금 커가면서야, 예를 들면, 무엇을 먹거나 , 엄마에게도 먹여주는 행동을 재미있어 알게 됩니다.

 

장난감을 때도, 자기에게 갖고 싶다는 마음이, 같이 다른 아이에게도 생긴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기까지는, 숫한 울음과 싸움을 거치는, 오랜 과정을 거쳐서야, 비로소 익히게 되는, 길고도 괴로운 (여정)입니다. 마치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바꿔지는 겉과 같은 일대 혁명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님도,“어려서는 어린애 짓을 하고, 성장해서는 어린애 짓을 버린다, 젖을 먹다가 커서는 굳은 음식을 먹는다.” 하신 것입니다. 이유식이 당연한 길이지만, 태어날때부터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이런 변화를 두고, 한님나라는거듭나야만 체험할 있다고 것입니다.   

      

개개인이 품는 ~ 싶다가 우리 ~ 싶다 넓혀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나가 -> 우리로, 우리가 -> 우리로, 우리가 -> 우리로 넓혀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 사는 나라와 살지 못하는 나라들 사이에 예외없이 사실로 증명되는 가지가 있습니다. 사는 나라는 밖으로 나가서, 도적질해다가 먹고 해적국가들입니다. 살지 못하는 나라들은 도적질 당한 나라들입니다. 이들은 밖으로 나가서 싸운 것이 아니고, 안에서 자기들 끼리 싸우다가, 밖에서 들어온 도적에게 몽땅 빼았긴 나라들입니다. 예를 들면, 나라마다 100가마의 쌀이 있었다고 합시다. 고정된 100 가마의 쌀을 두고, 지배계층이 서로 자기가 먹겠다고 파싸움을 합니다. 반면, 해적국가들은 안에 있는 100 가마의 쌀을 그대로 두고, 국민들에게 나눠주고, 힘을 합해서 밖을로 나가서, 해적노릇을 해서, 1,000가마의 쌀을 갖다 놓고, 푸짐하게 나눠 먹었던 것입니다. 서구의 모든 나라들이 이런 해적나라들이었습니다. 아세아에서는 나라가 이렇게 했습니다. 어느 나라지요?  일본이지요. 원자탄에 혼줄이 터지고서도, 아직도 해적근성을 못버렸는지 없는 일입니다. 없느냐? 하면, 예를  들어 미국이란 나라가 내게 유익하면 (또는 ~하고싶으면), 인근 다른 나라에 해가 가도 (~하고 싶어 안해도) 무엇이든 해낸다.” 식으로 막강한 힘을 앞세운다고 가정해보면, 일본이 해적의 길을 확률이 높아지니까요도적질로 살아온 저들도 처음에는 안에서 파싸움도 하다가, 통일을 놓고는, 밖으로 나가 도적질 하노라고 파싸움을 겨를이 없었던 것이 다른 점이지요. 물론 해적국가들이 잘한 짓은 없습니다. 저들은 같이 자기들의 우리 절대적인 우리 착각한 과오를 범했던 것입니다. 자기들의 우리에게 (국가주의) 유익하면, 다른 우리에게 해로워도 치우는 도적됨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헌법 2조를 (설명은 다음에) 어기면서도 기독교 국가인 것으로 착각해 왔던 것입니다.>

 

선악과 이야기는 (개인과 개인간의 개인적인 문제를 다룬 이야기가 아니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야 하는 사회적인 문제가 바로 해결되어야만 지상낙원(에덴동산)에서 있다는 이야기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과거 2,000년간, 특히 중세 서구 미술 등에서도, 선악과를 주로 남녀의 성관계를 뜻하는 것만으로 해석해 왔습니다. 그리고 선악과 이야기를 중심으로 해서, 원죄론이라는 <여기에 구원론이 따르고> 교리를 만들게 됩니다. 한님께서 사람을 남녀로 창조하시면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여라라고(1:28) 했다는 말과 모순되는 해석임을 알면서도 그리 건지, 모르고 그리한 건지, 한심스러운 일입니다. 심지어는 예를 들면, 자식을 낳기 위한 목적에서만 부부간의 성생활도 한님의 뜻이지, 행복감이나 즐거움을 위한 것이 되면, 원죄에 이어지는 것이라고 가르치기도 했답니다. 음식을 먹되 몸에 영양분을 제공하는 것으로만 먹어야지, 음식을 먹으며 맛을 즐기거나  행복감을 가지면 죄가 된다는 식인 것입니다. 한님도 모든 창조 과정을 마칠 때마다, “좋았다( 1:4,10,12,18,21,25,31) 하셨다는데, 사람이 좋다 감정을 가지면 원죄에 이어진다는 식의 교리는 온전한 정신에서 나온 것이라기 보다는, 병적인 결백증 환자에게서 나온 이론이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에덴동산 선악과 이야기는 성경 처음 나오는 성경의 입니다. 이것을 바로 가르치지 못하면, 성경전체를 바로 배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겨에 같은 창조에 관해서 서로 조금 다른 두가지 이야기가 앞에 나옵니다. 1장의 천지창조 이야기가 앞에 나오고, 인간을 창조해서 에덴동산에서 살게 했다는 이아기가 2장에 나옵니다. 그런데 두번째 이야기가 오래된 것이라고 합니다. 창세기 2장을 잘못 배워버리면 성경의 처음 기초에서 부터 잘못 출발한 격이 됩니다. 출발점에서 방향이 아주 조끔 틀려도, 틀린 각도를 바로잡지 않고 그대로 나가면, 도착지점은 지구의 반대 지점이 되는 곳과 같은 결과가 생기는 이 아닙니까?> 

 

잘못된 씨가 심겨졌다는 말입니다. 잘못된 씨를 이어받은 교회전통이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사회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크나큰 비극의 진상을 바로 보지 못하게 만들고, 해결을 위한 집단적 노력이 요청된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눈을 돌리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정도가 아니고, 진단도 하지 못할 아니라, 문제를 알송달송하게 하는(혼돈) 사탄의 씨가 되어버리는데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개인들간의 사적인 성관계와 집단간의 공적인 관계에서 원죄는 어디에?

예를 들면, 부부간이나, 개인과 개인 간의 사적인 어떤 관계가  다른 사람들의 행복이나 불행을 좌우하는 경우와, 어떤 공적이며 (국가간이라든가 ), 집단적인, 관계가 인류의 -불행을 좌우하는 경우, 어느 것이 심각한 비극을 불러왔을까요?

              

라덴은 부인 다섯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의 이런 개인적인 성관계가 세계 인류에게 미치는 영향은 아무 것도 알려진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 집단이 여객기로 뉴욕 고층건물을 불사르기로 결정한 일은 아직도 세계에 불행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미국 민주당 클린톤 대통령이 여자관계로 물의가 있었지요? 그의 이런 개인적인 이성관계가, 세계 인류에게 어떤 해를 끼쳤는지 알려진 바가 있었던가요?

 

그러나 공화당 부쉬 정부가 이락전쟁을 이르키기로 결정은, 그가 물러난 지금도, 인류에게 크나큰 비극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남녀간 개인적인 성관계가 유혹이 되는 경우가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도 내게 좋은 것이 다른 에게 (배우자를 비롯해서 직계 가족들과 관련되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해로운경우가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범위가 사적인 것으로 제한됩니다. 문제는 서구 문화권에서는 이성간의 성을 인간의 모든 문제의 핵심인 것처럼 보는 경향에 성경 이야기를 보는 시각도 사로잡혀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사회적인 문제는 기독교의 핵심 문제가 아닌 것처럼 봐버리는 데서 기독교가 이빨바진 호랑이처럼 됐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마치 기독교의 최고 덕목이 금욕주의적인 동전녀 찬양과, 독신주의 찬양인 것처럼 외곡된 것이 문제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에덴동산 이야기의 본뜻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개인적인 성관계에서만이 아니고, 인간 의모든 사회적인 관계에서, “내게 이롭다고 (좋다고), 다른 사람에게 해로워도 ( 좋아도) 밀고 나가는 강자의 횡포를 막지못하는 일류 사회는 절대로 에덴동산의 행복을 체험할 없다.” 것이 이 성경 이야기의 본뜻입니다.

 

최근에 어떤 여집사님이 사탄이 한님보다 언제나 강한 것처럼 보여요라고 말한(질문한?) 일이 있었는데, 나도 그렇게 생각될 경우가 많은 것을 체험합니다. 사실 에덴 동산 이야기에서도 사탄이 말빨이 하나님의 말빨 보다 세었고, 에덴동산 이야기의 해석에서도 지난 2000년간 사탄이 것을 증명해 줍니다.  

 

<서구 제국주의시대 말기에 우리에게 들어온 기독교에 대해서 내가 처음 가져본 질문은 “2000년간 내려온 거짓말 뒤에 도대채 무엇이 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질문이 바른 질문이었다는 생각했고, 신학을 재미있게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재미 있게 배운것 자체도 "거짓말" 보자기를 온전히 벗어난 것이 아니었다는 것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었습니다

2015년도 절반을 살면서야 무엇이 거짓말의 보자기인지를 어렴풋이 윤곽이 잡히면서, 마음 졌습니다.>

 

먹고싶은 것은 무엇이든 먹으라, 그러나 선악과는 먹지 말라. 먹으면 죽는다.” 말은, 사람을 홀로 두지 않으시고, ( 아닌 다른) “”, 둘을   우리 (“으로) 창조하시고, 에덴동산에 두실 하신 말씀으로 되어 있습니다.(2)

 

<여기다른 사람 어울려 라고 하지 않고, 함께 어울려라고 것은 아주 중요한 뜻이 있어서입니다. 다른 사람 어울려라는 말은 오늘의 본문(사무엘 ) 같이 백성들이 이상향으로 잘못 생각하는 왕국 맞는 말이고, 나라에는( 아닌, 사람인, 다른) 함께 어울려우리를(한님나라) 이룬다고 말해야 맞는 말이 됩니다. 왕국에서는 왕만이 중심에 (가장 높고 강한 왕좌) 있고, 다른 사람 그의 지배를 받고, 그만 섬기는 자리에 있게 되는 조직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아무도 왕이 없는 (왕좌가 없는) 님나라에서는 백성들은 모두 같은 자리에 있어서, 아무 사람도 섬기지 않고, 아무 사람의 지배도 받지않는 조직입니다. 다른 사람이라는 표현은 어떤 사람인 ,   중심에 자리잡은 입장에서 보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다른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아무도 중심 자리가 아닌 동등한 자리에 있게 되는 하나의 됩니다. 그래서 나라 조직에서는 나와 다른 사람 아니고, 함께 어울려라는 말을 써야 것입니다. “ 라는 표현도, 앞의 중심에 앉은 잎장에거 변두리 자리로 몰아낸 표현입니다.>

 

여기짝으로창조하셨다는 말은 생욱하고 번성하여  충만하게 됨을(1:18) 말하면서, 동시에 사람이 많아져서 사회를 이루게 됨을 말합니다. 에덴동산은 사람이 이상적인 사회를 상징합니다.   이상적인 나라를 뜻하기도 하고, 한님의 나라를 뜻하기도 합니다. 물론 한님 나라는 죽은 다음이 아니고, 땅에서 사람이 체험하기를 바라는 이상을 뜻합니다.

 

한님께서 이미 창조해 놓은 이상향과 사람이 할일

오늘 본문 사무엘 상서는 8장부터 계속해서 이스라엘 배성들이 다른 나라들 처럼 왕국을 창조하고 싶다고 해서, 한님도 어쩔 없이 내버려 다음에 생기는 문재들을 이야기합니다.

 

성경의 창조 이야기는 이상향(에덴동산) 한님 이미 창조해 놓으셨다고 합니다. 사람이 왕국을 창조한다”, “공산주의 지상천국을 창조한다”, “민주공화국을 창조한다 , 어떤 조직체를, “ 하나의 완벽한 이상향으로 선전하고, 강요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한님 이미 창조해 놓은 에덴동산에서, 땅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지배-피지배, 또는 착취-피착취 등과 같은 관계가 아닌, 바른 관계를 유지하면서 살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세운 어떤 제도에서도, 강자() 자기()에게 유익하면(좋으면) 다른 사람에게 해로운 것이라도(안좋아도)  밀고 나갈 위험성이 항상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잘못된 관계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에덴에서 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지옥이라는 말은 바로 이런 경우에 있는 말일 것입니다.

 

 <에덴에서 쫓겨났다고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마치 에덴을 떠나 지옥까지 시간 여유라도 있고, 그래도 두고 떠나온 에덴동산이 어딘가에 아직도 있는 것으로 착각하기 쉬운데, 에덴동산은 그런 아닙니다. 잘못된 관계가 되면, 행복을 떠나서 불행이 있는 (지옥?)으로, 차를 타고 가듯, 가는 아닙니다. 잘못 되는 순간 행복은 살아지고, 불행이 그 자리를 당당 채와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하느냐 하면, 죽어서 지옥 간다는 말이 서구 독교 교리의 허구이기 때문입니다. 지옥은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고, 당장 사람 안으로 들어와버리는 상태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이 일은 어떤 제도를 지켜나가는 것이 아니고, 체채나 정권을 유지해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정권유지되는 경우, 체제나 정권을 끊임없이 감시하고, 끊임없이 평가하고, 끊임없이 수정해 나가는 것이 사람이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래서 참된 한님 교회만년 야당이라야 합니다.

 

< 이하에 삽입된 글들, 인간도 혼돈에서 질서를 창조?”, “가능성으로 남은 하느님의 형상(흔적)”, “창조능력의 부족이 불행의 원인이 아님 기도?”, “불행의 원인은 판단능력의 한계 참된 기도?”, “하지 않음(말라)에서행복을” …등은 설교에 없던 것인데, 여기 삽입합니다. 7년전에 출판한 떠나라 (P.182-192)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 다루기는 했었지만는, 특히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당시에는 미쳐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이제 알게 되어씁니다.

 

(1) 성경은 인간불행의 원인은 무엇이라고?”

(2) “인간불행에서 인간행복을 되찾을 있는 길은 무엇이라고? ” 하는 문제에 대한 성경의 답을 찾는 일에, “선악과 이야기 대한 서구의 잘못된 해석이 도움을 주지 못할 아니라, 결정적으로 방해를 왔다는 점을 밝히기 위해서 ,보완해야 할 점들을 여기에 추가ㅏㅂ니다.>

 

인간도  혼돈에서 질서를 창조?

인간의 창조능력에 대해서는 잘못 생각하기 쉽습니다. 사람이 사회(나라) 창조하는 일은 사람의 몫으로 남겨진 것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창세기 1장에  한님이 혼돈에서 질서를 창조하신 것으로 되어 있고, 한님께서 사람을 한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1:26-27) 말도 있기 때문에, 인간도 혼돈에서 질서를 창조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런 이해에는 오류가 끼어들기 쉽습니다.

<이런 오류는 창세기 2-3 내용을 함께 고려하지 않고, 1장만을 두고 해석할 생기기 쉬운 잘못입니다.>

 

그러나 차창기 2장과 3장에서 인간은 님의 형상을 상실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떠나라”187-189) 다음과 같이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런 이해가 틀리다는 것을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창조했느냐? 질문을 해보면, 문제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사람은 한님의 뜻에 어긋나는 왕국도 창조할 수가 있고, 사탄의 나라도 창조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럴 때는 사람이 한님의 형상이 아니고, 사탄의 형상을 닮았다고 해야 것입니다. 이것은 한님의 형상을 (닮은 것이 아니고) 잃어버린 현실인간의 실상인 것입니다.

 

인간은 혼돈에서 질서를 창조할 수가 없습니다인간이 질서를 창조한다고 할때,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결과는 완전한 질서가 아니고, 혼돈이 묻어난, 불완전한 질서가 되게 마련입니다. 예를 들면 2차대전이 끝나면서 한반도 남반부에 미군정이 질서를 창조한다고 했는데, 과정에서 일제시대 공직에 있던 사람들이 대거 등용되면서, 친일파 인물들이 판을 다시 잡는 꼴이 되어버렸던 것과 같습니다. 조선민족의 입장에서보면, 질서가 아니고, 지난 일제시대의 혼돈 그림자가 드리워지면서, 새로운 강대국들의 냉전에 휩싸이는 큰더 혼돈으로 빠져들어갔덧 것과 같습니다.

 

인간이 창조한다는 질서 질서의 혜택을 입는 자의 입장에서만 질서입니다. 그러나 피해에게는 혼돈 것입니다. 제국주의 일본이 한국을 강점했을 , 조선민족을 말살하고, 소위 대일본제국 질서를 강행했었습니다. 그때의 질서 일본민족에게는 유익한 것이었으나, 조선민족에게는 민족의 정체성이 말살되는 이었던 것입니다. 사람이 창조한다는 질서는 사람에게는 질서로 생각되지만, 다르 사람에게는 혼돈인 것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백성이 왕국을 창조하려고 했을 ,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까닭이 여기 있는 니다. 왕국질서는 지배와 피지배 체제, 착취와 피착취의 체제이기 때문에, 그것은 질서가 아니고 혼돈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흔히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기 쉽습니다. “간자체가 불완정한 존재이고, 인간 사회 불완전한 것이기 때문, (1) “인간은 혼돈을 온전히 없앨 능력이 없다.” 그러기 때문에, (2) “인간은 온전한 질서를 창조할 능력이 없다.” 결론을 말입니다.  

 

이 결론을 교리로 표현한 것이, “인간은 타락한 존재다.” “인간을 죄인이다.” 라고 해서, “원죄론이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이 원죄는 이성간의 성에 뿌리박혀 있다고 가르쳐 왔습니다. 곧 에덴동산 이야기는 타락”,  “죄인”, “원죄등을 가르치고, 구제불능한 존재인데, “네 죄를 사하노라.”하는 사제의 선언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열려있다는 식의 교리를 만들어, 그렇게만 생각하도록 만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에덴 동산 이야기에 나오는 선악과 이야기의 목적은 인간이 타락한 죄인이고 원죄를 뿌리로해서 태어난 존재이기 때문에, “대책이 없는 존재다.” “인간을 스스로를 구원할 능력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려는 것이 그 목적이 아니라는 사실이니다. 인간의 능력이 없음을 문제로 다루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정 반대로, 에덴동산 이야기의 목적은 , “하님께서 창조해 주신 온전한 질서에서 살수있는 행복의 길이 있었는데, 왜 살 수 없게 되었는지? 그 원인을 말하려는 것이 그 목적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원인은 창조능력의 부족이 아니고,  “판단응력의 부족이라는 것입니다. 타락”, “죄인”.  “원죄등을 논하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행복의 길을 되찾을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를 말하려는 것이 목적인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밑에서 (“창조능력의 부족이 인간불행의 원인이 아님인간불행의 원인은 판단능력의 보족에서), 찾아보겟습니다.>

 

가능성으로 남은 하느님의 형상(흔적)

한님께서 혼돈이 아니고 질서를 바라셨듯이, “한님의 형상을 상실한 현실인간도 혼돈이 아니고 질서를 바란다.” 있기 때문에, 이런 바람 있어서만은 한님을 닮았다고 있겠습니다. (다만, 질서에 대한 바람을 실현시킬 능력 있어서는 인간이 한님과 같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 창조 이야기에 나오는 모든 일들은 마디로 요약하면, 생명을 위협하는 파괴적인 환경을 한님께서 다스리셔서, 생명을 키워주고, 보존해 줄수 있은 것으로 만드셨다는 말로 요약할 있습니다. <“떠나라 100~101 혼돈과 어두움을 다스려 질서와 빛을>  사람도 생명의 파괴가 아니고 생명을 키우고 보존해 주는 환경을 원한다고 있습니다. 한님의 뜻과 인간의 이런 바람이라는 점에서만,  현실인간에게도 한님의 형상이 가능성으로 남아있다고 있겠습니다. 예수님이 일생 마지막 결투에서, 죽음을 피할 길을 갈구하는 순간에, “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한님의 뜻대로…”라고 하신 점에서 한님의 형상이 들어난 것입니다

 

선악과는 먹지말라는 말에도, 내게 이로워도(좋아도),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는 (안 좋은) 일을 하지 말라는 말에,한님의 형상이 무엇인가?” 대한 답이 함축되어 있음을 있습니다. 강자는 자기에게 이로우면(좋으면), 다른 사람에게 해로워도( 좋아도), 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형상대로 되지 못한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 이런 강자에게서 약자를 보호하시는 분이십니다. 자기에게 이로워도(좋아도), 다른 삶에게 해가되는( 좋은) 일은  하지 않을 있는 사람만이 한님의 형상대로 지움받은 사람입니다. 사람이 내게만 유익하고, 좋은 일이 이뤄지기를 바라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도 유익하고, 좋은 일이 이러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는 것인데, 이런 바람이 한님의 형상의 흔적이 가능성으로 남아있다고 하겠습니다. 마디로 말하면, 사람이 바람는 것이 한님의 뜻에 맞으면, 그것이 한님의 형상을 닮은 것이다.” 라고

 

그런데, 여기서도 앞에서 말한 과 꼭 같은 말을 할 수 있겠습니다. 선악과 이야기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 또는 그 형상을 잃어버렸다.”는 문제를 다루려는 것이 그 목적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왜 인간이 에덴동산(가장 이상적인 사회) 에서 살 수 없게 되었는지(또는 되는지)?   한 가지 원인이 무엇인지?  달리 말해서, 어떻게 하면, 가장 이상적인 횐경을 회복하고(그런 사회를 이루고), 거기서 사는 행복을 체험할 수 있는지? 에 대한 한 가지 답을 주려는것이 에덴동산 이야기의 유일한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창조(해낼)”능력의 부족이 인간불행의 원인이 아님

인간이 질서를 창조하는 데서 하나님과 같지 못하다는 것은 사실이입니다. 그리고, 질서만이 아니고, 사람이 하고싶은 이런 저런 모든 것을 해낼능력이 부족한 것도 사실입니다. (여기서 창조능력이라는 말은 질서창조만이 아니고, 사람이 하고 싶어하는 모든 것을 해낼 능력도 포함하는 말로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이런, 저런무엇인가를 다 하고 싶은 마음은 있으나. 이런 모든 것들을 해낼 힘이 부족해서 불행하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 이 성경이야기의 가르침입니다여기서, 생각치 못했던 가지 사실을 까닫게 됩니다.

 

[1] 째는, 창조(해낼)능력부족”(“능력의 한계”) 때문에 인간이 불행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경 이야기에는 인간의 능력부족, 또는 능력의 한계 극복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한다는 가르침도 없습니다. 흔히 기도가 인간의 능력 부족을 극복하는 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이런 생각은 냉철히 비판해봐야 문제가 많습니다.

 

( 한가지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여기서  -불행 말할 , 개인 누구 누구의 -불행이 아니고, 사회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불행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경우 어떤 깨인이나어떤 계층의 일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착취해서 행복 누린다고 하는 경우에도, 이들이 참으로 행복한 것이 되고, 불행의 씨를 심고 있다는 사실까지도 동시에 드려다보아야 것입니다.)

 

인간의 능력이 한계에 이르렀을 , “저는  죽을 힘까지 쏟아서 일을 다했습니다. 이제는 손을 놓겠으읍니다. 전지전능하신 한님께서 알아서, 맡아서 해주십시오.”하는 것이 기도라고 합시다.

이런 기도에서 모은 손은 이제부터는 손은 놓겠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이겠습니다. 마술사나, 도깨비가 된듯, 주문을 내뱉는 것과 다름이 없는 짓입니다.  올림픽이 시작된 이래 이런 기도를 드린 바보천치는 사람도 없었을 것입니다. 불법 약물의 기운을 빌려 메달을 획득했다가 망신당한 자들도 이런식의 기도는 드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간의 능력부족을(한계) 극복하기 위한 바른 기도가 필요한 것은 사실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무엇이가를 만드는, 또는 해내는 능력이 부족해서 불행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인간 능력의 한계를 극복하는 기도를 드린다고 해서, 인간불행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죄를 용서하노라.” 하는 사죄교리로 해결되는 것도 물론 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창조능력의 탁월함에도 따라오는 불행

앞에서 인간은 혼돈을 온전히 없앨 능력이 없고, 따라서 질서를 창조할 능력도 없다고 한것은 이론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증명되는 진리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지금 가지고 있는 정도의 창조능력만으로도 (창조주처럼 우주 천체 하나도 만들지는 못하지만) 지금까지 만들어놓은 것만 보아도, 외계에 날려 본낸 날것(인공위성)들을 아도, 인간은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유일무이한생명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드는 능력이 커질수록 행복이 커지지 않고 불행이 더 커질 수 있다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 볼 문제들을 몇 개 나열해 보면;

 

(1)생명을 지키고 보존하기 위한 물체와 생명을 죽이는 물체들 중, 어느쪽을 더 많이 만들어 왔을까? 앞으로는?   

(2) 죽이려는 사람들은 우리쪽인가?  “우리 아니라고 생각되는 다른 우리인가죽이려는 사람들은 정말 우리 아니면, 우리만 우리 살아남을 있을까

(3) 생명을 지키고 보존하는 물체와 생명을 죽이는 물체중, 어느 것을 만드는데 최고도 과학기술과 세금을 많이 쏟아넣었을까? 지금 쏟아넣고 있으까? 앞으로는?

중요한 다른 질문 가지;

(4) 기업체는 죽이는 물체를 만들 , 무엇을 위해 만들까?

(4-1) 알지도 못한 사람들을(애기들과 짐승까지도) 죽이려고

(4-2) 돈을 벌려고?   

(5) 비록 생명을 지키고 보존하는 물체를 만들 때도, 기업체는 무엇을 위해 만들까

(5-1) 사람 살리려고?  

(5-2)  돈을 벌려고? ( 둘의 비율이 어느정도면 좋을까?)  

(6) 사람 목숨이 돈벌이를 위한 것으로 전락되는 경우는 ?

(6-1) 이런 정도에 이르면, 인간는 금송아지 한님 누구를 섬기는 것일까?

다른 가지;

(7-1) 담배를 만드는 기업체는 처음에 사람을 위한 것을 만드는 것으로 알려졌다가, 이제는 사람을 죽이는 것을 만든다는 것이 들났는데, 종전과 달라진 것은? 앞으로 어떻게 되는 것이 좋게 되는 것일까?

(8-1) 미국에는 총기소지가 헌법이 보장된 권리로 되어 있다는데, 이총으 죽일 사람은 아닌 다른 ”(불법자등)라고 상정되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현상이란 말은 이론적으로 여라가지를 말할 있으나,) 가장 현실적이고, 가장 중요한 뜻은 인간생명의 존엄성 말하는 것인데,   아닌 다른 나의 생명에는 존업성이 없다는 것일까?

(8-2) 아닌 다른 없이 우리 성립되나요? (끔직한 총기 사고가 많아, 총기규제 목소리가 높을 , 오바마 대통령이 총기규제 입범화를 추진했었는데, 총기협회의 로비에 밀려 국회에서 압도적인 반대로 부결됐었습니다. 일을 대통령은 자기 임기 가장 뼈앞은 좌절이었다고 했답니다. 총기협회나 국회의원들의 판단을 좌우한 가장 동기는 무엇일까?

 

인간불행의 원인은 판단능력의 보족

창세기 2-3 선악과는 먹지 말라고 에덴동산 이야기는 바로 이런 문제들을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개개인의 성관계문를(특히 문제만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고, 그야말로 판단능력의 부족애서 생기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원죄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내게/우리에게 유익하거나, / 좋거나, / 옳거나 하면, 다른 /우리에게 해로워도, / 안좋아도, / 틀려도무슨짓을 해서라도, 기어히 밀고나가는 행함에서 (“행하지 않음에서가 아니고) 인간불행이 따른다는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치 못했던 둘째 사실을 알게 됩니다

[2] 불행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창조능력의 부족문제가 아니고판단능력의 부족 문제라는 것입니다불행은 힘이 무족하거나, 돈이 부족해서가 아니고, 잘못 판단해서라는 것입니다잘못 생각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가장 적합한 말이, “어리석어서 불행하다.” 일것입니다. 이것이 성경 창세 2장과 3장의 말하는 가장 핵심되는 진리입니다.

 

하지 않음에서 행복을

그래서 성경은 무엇을, 특히 이상향을 창조 하라 하지 않고, “이미 하고 있는 하지 말라라고 해서 하지 않음 모든 (불행) 치유할 유일한 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함께 더불어 사는 모든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서는 무엇을함의 윤리 아니고, “하지 않음의 윤리 절대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불행이든 행복은 오직 아닌 다른 나와의 관계에서만 체험되는 경지(상태)이지, “나만에서는 체험될 없는 경지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 유익하고 좋은 것은 하되, “나에게만 유익하고 아닌 다른 나에게 해롭고 좋은 절대로 하지 말라.” 것입니다.

 

성생활이 원죄 아니고, “나에게만 유익하고, 아닌 다른 나에게 해롭고 좋은 , 것이 무슨 일이든, 원죄입니다. 그런데 서구 기독교 교리는 유독 성생활만이 원죄인 것처럼 잘못 강조해왔기 때문에, 다른 모든 원죄들은 원죄인 줄도 른채 수천년을 지나왔습니다. 장님이 장님을 인도하다가 모두 구렁텅이에 빠진 격이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인간의 석음  한님의 지혜”  - 기도?

그런데, 수천년간, 성경 맨앞에 나와있는, 가장 중요한 내용은 간과한채, 여러가지 인간욕망들 특정한 한가지 욕망, 그리고 개인적인 욕망만을 부정하러드는 식의 교리종교가 되어왔습니다. 그리고 이런 개인적인 죄의 해결에는 죄를 사하노라 된다는 식으로 예식종교가 되어버렸다고 봅니다. 여기서 끝난 것이었다면, 그래도 다행이었을테데, 사회적인 문제인 진자 원죄는 오히려 방조한 결과가 되었습니다.

 

판단능력의 부족을(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기도를 드린다고합시다. 우선 한데 모은 손의 뜻이 다를 것입니다. “ 놓겠습니다.” 아니고, “ 놓지 않게 도와주십시오.” “포기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 손에 남은   모아 주십시오.”  “ 손이 아직도 못다 일이 남아있습니까? 그게 무엇이지요?”  “다른 형제들의 협조를 얻기에 부족한 결점이 있나요?” “제게 그대로 있어서는 어리석음이 있었나요? 실수가 있었나요?...” 해서 자기 을 모으는 것입니다.

 

자기 능력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결단이고 노력이라기 보다는, 자기 어리석음과 실수를 깨닫고, 한님의 지혜를 깨치려는 마지막 결투가 참된 기도일 것입니다. 마치, 올림픽선수에게는, 그의  매일 매일의 결단, 노력, 연마, , 체험, 배움어느것 하나 기도가 아닌 것이 없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이제 선악과 이야기가 사람의 생활에서 구체적으로 적용되는 가지 법을 말하고 있다는것을 밝혀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가지 밝혀야 것이 있습니다. 선악과는 먹지 마라고 했을까? 하는 문제입니다.

 

선악판단에 끼어드는 이해타산

악을 알게하는 나무 열매라는 말의  선과 좋다-나쁘다, “가하다-부하다, 예요-아니요라고 판단하거나, 결정하거나, 선택할 쓰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판단을 하거나, 어떤 결정을 하거나, 어떤 선택을 때는, 속으로 먼저 반드시 생각해 보는 것이 있습니다. 내개 유익한가? 해로운가?” , “내게 좋은가? 안 좋은가?”하고 저울질 해보는 계산입니다.

 

이런 계산에서 하게 되는 사람의 행동은

(1) 유익하면(좋으면) 하고,

(2) 해로우면(안좋으면) 하지않는 가지 경우가 생깁니다. 그러나 에덴동산(한님나라) 에서는 홀로 사는 것이 아니고, “ 아닌 다른 (다른 사람과) 함께 사는 것이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적어도 4 개의 경우가 생깁니다.       

 

(1) 나에게 유익하고(좋고), 다른 사람에게 유익한() 경우,       (하라)

(2) 나에게 유익하나(좋으나), 다른 사람에게 해로운(안조은) 경우, (말라)

(3) 나에게 해로우나(안좋으나), 다른 사람에게 유익한()  경우, (하라) (희생)

(4) 나에게 해롭고(안좋), 다른 사람에게 해로운(안좋) 경우.     (말라) (중독된 경우등

 

한님나라 헌법 1조와 2

이런 여러 가지 경우가 생길 있는 에덴동산(한님나라)에서 사람이 지켜야 (말씀) 오직 마디였습니다. “무엇이나 먹어라, 그러나 선악과는 먹지 말라 (먹으면 죽는다).”

(1) “하라  (2) “말라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 헌법 1조와 2조입니다.

<떠나라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말라 나무라고 이름 지어보았습니다.>

 

사람이 홀로가 아니고, “ ” (나가 아닌 다른 ) 함께 하나의 우리”(한님나라) 이룸에 필요한 짤막한 조문입니다. 간단하지만 안에 인간의 행복-불행의 모든 문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간단해서 좋습니다. 하나님나라 다운 것은 간단한 같습니다

 

하라 “(하지) 말라 위에서 말한 4 가지 경우에 적용시켜보면;

 

1 나에게 유익하고(좋고), 다른 사람에게도 유익한(좋은) 것은 무엇이든 하라. 이것이 무엇이나 먹어라 말의 뜻입니다.

2 나에게 유익하나(좋으나), 다른 사람에게 해로운(안좋은) 것은 하지 말라. 이것이 한가지(선악과) 먹지 말라.” 뜻입니다.

 

3 겨우, 나에게 해로우나(안좋으나), 다른 사람에게 유익한(좋은) 경우에 희생이 요청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천지지변, 불의의 사고 , 자발적인 희생이 나올 수있는 특펼한 경우인데, 때는 있으면 하라. 없으면 안해도 된다.” 말이 되기도 합니다. 희생은 법적인 강제성이 없습니다. 희생이 요청되는 경우가 생기긴 하지만, 사람이 사람에 의해서 희생당하는 것은, 예를 들어, 사람이 만든 제도에 의해서 희생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한님나라라면, 희생이 필요없어야 하지요.

 

희생이 필요없어야 한님나라

이는 뜻밖의 일이긴 한데, 아주 중요한 뜻이 있습니다. 여러분, 부부 사람이 희생해야 하는 결혼이 행복한가요? 부모가 희생만을 해야하는 가정이 행복한가요? 한국의 노인층 빈곤화의 이유가, 자식 교육비 마련하노라고, 노후대책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랍니다. 거지꼴이 될까 걱정하는 부모가, 그런 가정이 행복할까요? 국민의 희생이 강요되는 나라가 행복한가요? 희생이 강요된 결혼, 희생이 미화된 가정, 희생이 필요한 나라는 아직 자리가 잡힌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뜻이 예수님을 본받아 희생하는 의인들이 보다 많이 생겨나기를 바라신다는 것이라면, 의인을 죽이는 사회를 바라신단 말인가요? 극소수의 고위층 비리에 회생당하는 백성들이 많아지기를 바라신다는 말인가요? 예수님과 같이 희생당하는 사람이 사람도 생겨날 필요가 없는 그런 사회가 한님나라가 아닐까가요? 그래서 한님나라 헌법에는 3 경우에 해당하는 법조문을 없애버린 것으로 봐야 것입니다.

 

4 경우: 나에게 해가 되는(안좋은) 일은 하지 말라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는 일은 2조에 말라라고 되어 있으니) 법조문도 있을 법한데, 이것도 생략되었다고 보면 됩니다. 말하지 않해도 실천할 것이니 말입니다. 중요한 이유는, 예를 들면, 담배나 술에 중독되어 있는 상태에서는, 해롭다는 것을 알면서도 벗어아지 못하는 경우인데, 이런 경우는 법으로 통제할 있는 영역을 이미 벗어난 상태입니다.

 

가장 중요한 법은 하지않음(말라)

그래서 님나라 한법은 1조와 2 마디만으로 충분한 것이고, 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하면, “죽는다라고 생사의 문제가 걸린 일이라고 강조한나에게 유익해도(좋아도),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는(안좋은) 일은 하지말라. 하면 죽는다.”입니다. 이것이 한님나라의 씨입니다.

 

서구교회 씨가 심겨지지도 못했었음

씨가 심겨졌었다면, 지난 2000년간, 서구애서 같은 가독교 국가들이 서로 전쟁을 이르킬 , 이런 전쟁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한번도 없지는 안했을 것입니다. 기독교 국가들이 (기독신도라는 사람들이) 신대륙에 건너와서 원주민들의 삶의 터전을 빼았는 강도짓을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최근에 이런 범죄에 기독교회가 동참한 것을 사죄하는 운동을 이르켰을 , 보수파에서 이교도에게 사죄함은 신성한 복음을 모독하는 죄다.”라는 교리 주장으로 맞서지는 안했을 것입니다. 기독교 국가라는 영국이 중국에 아편전쟁을 감행했을 , 국가의 범죄행위에 항의하는 기독교의 목소리가 하나도 없지는 안했을 것입니다. 기독교 국가라는 미국이 중동에 이랔 전쟁을 이르킬 , 미국에 유익하다고, 중동 백성에게 해가되는 짓은 한님이 하지 말라고 했다고, 항의할 있는 교인이 사람도 없는 기이한 현상이 이러나지는 했을 것입니다. 상하원 의석을 보수당이 독점하도록 투표력을 과시할 있었던 미국 보수 기독교계가, 개인의 성윤리에만 눈에 불을 켜면서, 사회 국가적인 범죄행위는 보지도 못하는 기이한 현상은 일어나지 안했을 것입니다.

 

이제야 태어나신 선각자 서구 교단장님!

<제가 통용되는 직함대신 일부러 이런 칭호로 이분을 부르는 데는 저만의 이유가 있어서입니다. 이분도 황제라는 말과 비슷한 통상적인 존칭에 불편해 하실 것이라는 저만의 (잘못된?) 느낌에서 이러는 것이니 이해해 주시기바랍니다. 그렇다고 교단장님은 알맞는 직함이란 말도 아닙니다만.>

 

저는 지금까지 캐돌릭교 단장님들 어느 분도 진심으로 존경하게 그런 체험을 볼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얼마전 3세계에서 오신 교단장님은  바로 존경할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가지만 예를 들면, 동성애자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질문에 대해서, “ 사람들 우리보더 진실된 사람들이 많지 않소! 내가 누구길래, 그들을 정죄할 있겠습니까?”

 

2000년간 성문제에 있어서 가장 깨긋한 것으로 위장됐던 성직자 계층에서 지른 성범죄가 미국 어떤 교구로 하여금, 손해 배상금을 못내서, 파산신고를 해야하도록 다는 뉴스가 나돌았던 때였습니다.

 

빈부의 격차가 극심해저가는 세태를 배경으로 해서, 교회의 입장을 묻는 질문에 대해서는,

교회의 일차 목적은 가난한 사람들과 약자들 편에 서는 겁니다! 교회는 부자노름을 그만 해야 합니다!”

교단의 엄청난 재정에 마피아단이 손을 대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때였습니다. 또 최근에,

 

생산력을 높여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나, 현대 자본주의는 가난한 자들을 외면하고, 금송아지를 섬기고 습니.” 말씀도 하셨습니다.

 

이런 답변을 있는 분이야 말로 2000 교회사에서 처음으로, 창조 이야기에 담긴 한님나라 헌범 2조를 바로 깨치신 분으로 보였고, 감격스러웠습니다. 이분이 번은 자기가 지금 자리에 오래 있지는 못할 같은 느낌이 든다는 말을 적이 있었는데, 저는 마피아단에 대한 불안감을 느꼈었습니다.

 

창조 이야기에 담긴 하나님 나라의 씨를 바로 심으시 이런 훌륭하신 분이 자리에 앉게 되신 것은, 2000 교회사 아니고,  인류 역사상 처음 있는 일입니다. 이런 분을 수장으로 모신 한님교회가 있다는 일은 세상을 바꿀 징조의 시작이라고 보입니다.

 

교쳐야 서구 교리문답

내가 지금 목회를 다시 시작한다면, 세례문답부터 고쳐야 한다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이 십지가에 돌아가셨습니까?”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러…”

 

이런 것이 서구식 교리문답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예수님께서 당시 잘못된 씨가 심셔진 것을 바른 씨로 바궈 심으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당시 식민주의 로마정권도, 자기들에게 유익하면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더라도, 칼로 사람을 죽이면서도, 목적달성을 하고야 마는 강도들이었습니다.

당시 특권계급처럼 변질된 ~ 교권도 예수님은 강도의 소글이라고 질책하실 정도였습니다.

이런 판국에서 예수님은 하늘나라의 헌법의 씨를 말씀하신 것이었는데, 당시 교권과 정권이 야합해서 사형집행으루한 것이 아니었나요? 기독교까지 로마 국교로 둔감하는 과정에서 지금까지 사탄의 나라 씨가 퍼져온 것입니다.

 

이런 서구 교리식 문답보다 가장 중요한 질문은;

한님나라 시민이 되기 위해서 지켜야 헌법 1, 2조는 무엇입니까?  정답;

무엇이나 먹되, 선악과는 먹지말라입니다.” 둘째 질문은,

헌법이 어디에 쓰여저 있습니까?” 정답;

성경 앞에요”.  세째 질문;

선악과는 먹지 말라의 뜻은 무엇입니까?”  정답;

나에게  이로와도(좋아도), 다른 (사람)에게 해로우면(안좋으면) 하지 말라. 하면 죽는다.”입니다.

 

자녀의 심성교육에서 가지 심어주고 세상에 내보낼 무엇입니?

나에게  이로와도(좋아도), 다른 (사람)에게 해로우면(안좋으면) 하지 말라. 하면 죽는다는 말씀이 뼈와 살에 새겨진듯, 그렇게 밖에 모르는 마음을 심어주고, 그런 몸으로 키워주는 일입니다.”

하면 정답이 되지 않을까요?

 

때가 되면, 구세주님이 구름을 타고 오셔, 천년왕국을 세운다는 식의 허왕된 몽상대신, 이런 상상을 해보면 어떨까요? 금년이 2015년인데,

 

2025년부터 태어날 애기들은, 자기에게 이로와도(좋아도), 다른 나에게 해로운() 일은 아예 각도 줄도 모르는 바보애기” (“천사애기”?) 들만 태어나도록, 유전자를 바로 있는 과학자들을 한님께서 성령으로 역사하셔서”,  잉태시키고,  출산시키시고키워주신다는 상상 같은 말입니다.

우리도 그때까지는 살다 가려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더 오래 사셔서, 더 좋은, 더 기발한 기독교적 상상들을 많이 창안해 내시지요.

 

문답 계속:

교회는 무엇하는 곳입니까?  

자기에게 이로와도(좋아도), 다른 나에게 해로운(안좋은) 일은 하지 말라 한님나라 헌법 2조를 실천해보는 수련장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사회에서 일은 무엇입니까?

그것도 한님나라 시민의 자격인 한님나라 헌법 2조를 실천하는 일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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